〈 10화 〉 2권 제 야짤이 범죄가 아니라 명작이라는데요?(4)
* * *
차가워진 분위기가 피부를 계속 찔러대는 것만 같다.
내가 당황해서 멍해져 있는 사이, 이쪽으로 다가온 아버지는 싸늘한 목소리로 내 이름을 불렀다.
"칼리."
"...네."
"여기 있는 캔버스 비슷한 것들은 다 뭐냐. 로자리아가 그렸던 거냐?"
"그것이...."
"한데 이상해. 로자리아는 내가 알기로 입학을 해서 요 몇 달 여기에 오지 못했을 텐데. 왜 아직도 기름 냄새가 나고 있는 건지. 왜 아직도 치우지 않았는지."
다 알고 있으면서 굳이 저렇게 묻고 있는 거다.
내가 직접 실토하도록, 뭘 잘못했는지를 직접 입으로 하나하나 이야기하며 되새기도록.
확실히 '칼리'의 아버지인 그는 '김시우'의 아버지와 꽤나 닮은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더더욱 그에 대한 반감이 강하게 느껴지는 중이었다.
"이제 1년 남았다. 언제쯤 정신을 차릴 건지 물어봐도, 네 엄마는 어련히 잘할 거라며 널 방치했지. 그래도 네가 재능이라도 있어 보이니까 검술에 흥미를 느낄 때까지 내가 기다려 준 거야. 그런데 마법? 마법이라고?"
"...조금 해본 겁니다."
"조금 해본 것이 이 정도다? 허, 검술을 이렇게 연습했다면 벌써 그라베다 아카데미에 입학할 성적 정도는 달성했겠군."
비꼬는 그의 말을 듣고 있으니 여러모로 속이 끓어올랐다.
이제까지 칼리가 뼈 빠지게 노력하고 검을 휘두르던 시간이 두통과 함께 스쳐 지나가며, 억울한 마음을 토로했다.
이런데도 평소라면 자기 잘못이라고 말하고 넘어가는 것이 칼리라는 인간의 성격이었겠지.
"불가능한 말씀을 하시는군요."
"뭐?"
"그라베다 아카데미에 들어가는 걸, 굉장히 쉽게 생각하신단 말씀입니다."
"당연하지. 네가 누구 아들인데. 당장 너도 알고 있지 않으냐! 지금 네가 그렇게 어영부영 놀고 있던 몸으로도 어지간한 동년배들과는 상대도 안 된다는 걸!"
아, 시발.
그냥 시원하게 뱉어내고 싶은데, 여전히 칼리의 기억은 그러지는 말아 달라고 간곡히 부탁하고 있었다.
하긴, 김시우로 살던 시절에도 제대로 뭐라 말도 못 하고 집을 나갔지.
그런 주제에 여기서는 말이라도 한 번 쏘아 붙여보자고?
'그럼 시발, 해야지. 똑같은 짓을 또 해? 그딴 응어리 한 번 경험해봤으면 된 거 아니냐?'
여러 생각들이 계속해서 충돌하며 판단을 어렵게 한다.
하필 왜 살아가는 길이 비슷해서 이 경험을 또 하게 하냐.
나는 몰려오는 두통을 억지로 삼켜내면서 고개를 들었다.
이런 상황이면 항상 주눅이 들어서 아무것도 말하지 못했던 '칼리'의 상황을 유지하고 싶지는 않았다.
"제가 못마땅하신가요?"
"허, 그래. 그럼 이렇게 허송세월하는 아들을 보고 못마땅해하지 않을 부모가 있을 거로 생각해?"
"그렇군요. 그럼 제가 가문을 나가면 되겠습니까?"
"뭐?"
"칼리...!"
내가 그렇게까지 강한 말을 할 줄은 몰랐는지, 어머니도 당황해서 이쪽으로 달려오셨다.
그나마 아버지보단 덜한 편이지만, 솔직히 그녀라도 크게 다르진 않았다.
결국은 내가 가문의 뒤를 이어서 제대로 된 검사가 되고, 그 끝에는 소드 마스터까지 찍으면서 계보를 이어나가길 원하겠지.
그것에 내 의견 따위는 하나라도 들어 있었던 적이 있었나?
"어차피 리카도 재능이 괜찮아 보이던데요. 리카가 뒤를 이으면 되겠네요. 아닙니까?"
"칼리, 알잖아. 리카는...."
"아무리 리카가 우리에게 소중해도, 우리 피도 잇지 않는 녀석이 대를 잇는다? 지금 그걸 제정신으로 하는 말이야!"
리카 드 글라디스.
내 여동생이지만, 여러모로 복잡한 사정이 있는 아이다.
4살 차이가 나지만, 그런데도 검술 재능이 나보다 뛰어날 거다.
전에는 마법 재능도 뛰어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은데....
하여튼 꼬우면 리카가 가문을 이어가라고 했더니, 아버지의 발작 버튼이 눌렸는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그렇군요. 그럼 저는 아버지에게 있어서 유일한 핏줄이고, 유일한 길이라는 거군요."
"그래, 알아들었으면 당장 이딴 거 다 가져다 버리고 검술...."
"그럼 그만큼 소중한 존재가 사라진다면, 아버지가 꽤나 슬퍼하시겠고요. 사랑하는 아버지가 그런 일을 겪는다니 좀 안타깝습니다."
"네 이놈 대체 무슨 말을...."
"오늘부로 저는 글라디스라는 성을 버리겠습니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아아...."
기어코 이야기를 옆에서 듣던 어머니가 다리에 힘이 풀려서 쓰러지셨다.
내 말에 화가 난 아버지는 그대로 내 뺨을 후려쳤고, 나는 어차피 피할 수 없는 실력 차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그대로 얻어맞았다.
솔직히 아프다는 고통이 신경 쓰이기보단, 지금 당장 머리가 열을 받아서 뜨겁게 타오르는 것이 먼저였다.
"왜 네 멋대로 그걸 결정하느냐! 항상 그런 식으로 우리 기대를 짓밟고! 네가 검술에 집중해 줄 거리고 우리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저는 기다리라고 한 적 없습니다."
"뭐야?"
"아,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애초에 그렇게 기대하시도록 거짓말을 해왔던 게 잘못이니까요."
인정해야 할 건 인정해야 한다.
그 부분은 부모님이 잘못한 것이 아니라, 칼리가 어린 마음에 실수했던 것이 지금까지 이어져 온 거다.
아니, 정확히는 칼리도 이쯤 되면 자신이 바뀔 수 있으리라 믿었던 거겠지.
하지만 현실의 벽은 높고도 높아서, 거짓말로 끌어본다고 따라잡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을 뿐이다.
"거짓말?"
"제가 재능이 있다는 거짓말 말입니다. 아버지를 실망하게 해드리고 싶지 않아서! 그리고 언젠간 나도 가능할 거라고 나 자신마저 속이면서! 이 별장 구석에 틀어박혀서 온종일 손이 부르트도록 검을 휘두르고!"
"...뭐?"
하지만 저도 바라던 것이 있었으리라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제가 그렇게 숨기더라도 알아차리고, 그만 쉬라고 말려줬으면 하는 마음에 한 번이라도 보답해주신 적 있으세요?
이렇게 티가 나는 애새끼 거짓말에 언제까지 휘둘리실 건데요!
"손. 은.... 놀다가 다친...."
"아버지가 제일 잘 아시잖아요. 검을 휘두른 손과 장난질하다가 생긴 굳은살의 차이 정도는. 소드 마스터인 아버지가 제일 잘 아실 거 아니에요."
"......."
사실은, 사실은 다들 알고 있었을 거다.
솔직히 어리던 칼리가 갓 성인이 될 때까지 해온 거짓말이 얼마나 믿음직했겠어.
내가 당장 보더라도 이상한 것투성이인데, 전문가인 아버지가 보시기에 어떠하겠는가.
하지만 그런데도 이 현실은 외면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기 아들의 재능이 그렇게 떨어지리라곤 믿고 싶지 않았으리라.
"질립니다. 진짜로 질려요...."
이렇게까지 울분을 토해서 말할 필요는 없었을 텐데.
좀 더 얌전하게 같은 내용을 전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런 후회도 있었지만, 분명한 것은 이렇게 토해낸 이후에야 개운해진 부분들이 분명 있다는 거였다.
결국은 이렇게 한 번은 부딪쳤어야 하는 문제였어.
"해도, 해도, 아무리 해도 끝이 없는데. 팔이 부서지도록 휘둘러도 저 위에는 도달할 수가 없는데. 저보고 어떻게 하란 겁니까."
"칼리...."
"그래서 그냥 포기하기로 했습니다. 이번엔 진심으로 쉬면서 다른 일 찾아보려고 했습니다. 그게 그렇게 잘못된 겁니까?"
부모님들도 여러모로 생각이 복잡해지셨는지.
한숨을 쉬면서 진정하기 시작했고, 나는 그대로 내 방에 틀어박힌 다음 침대에 누워버렸다.
하, 진짜 정신 나갈 것 같다.
"조금 다르긴 하다. 그치?"
나 때는 그래도 대학교 때려치우고 그림 그려서 먹고살겠다는 소리 정도였는데.
여긴 아무리 해도 도저히 못 하겠다고 때려치우는 거잖아.
물론 부모님이 정해온 길을 부숴야만, 내가 행복해질 수 있을 거란 확신만큼은 똑같긴 했다.
"...칼리."
"예, 어머니."
그리고 곧 생각을 정리하셨는지, 어머니가 방으로 들어오시더니 말을 걸었다.
아버지는 뭐라고 하셨으려나.
이럴 거면 그냥 나가라고 하셨으려나?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나에게, 어머니가 하기 시작한 말은 굉장히 뜻밖의 분위기를 담고 있었다.
"일단, 미안하다. 우리가 너한테 너무 무거운 짐을 안겨주려고만 했어."
"...아뇨, 속인 건 전데요."
"그런 생각이 들게 되었던 것도, 결국 우리 때문이잖니."
갑자기 이렇게 간질간질한 대화를 하니까 기분이 이상해졌다.
차라리 짐 싸고 집에 나가라는 말을 했으면 마음이 놓였을 텐데.
여기서 사과를 해버리니까,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잘 모르게 되는 느낌이었다.
"아버지도 많이 생각하신 것 같아. 오히려 자기가 네가 검술을 싫어하게 만들었다며 자책하시더라."
"......."
"하지만 말이다. 아버지가 가장 원하는 게 그거잖니? 너도 다시 생각해보고, 검술을 버리진 않는 걸로 해주면 안 되겠어? 이제 높은 구간을 강요하진 않을 테니까."
후우....
솔직히 이쯤에서 이미 '칼리'는 만족시킬 수 있을 만한 상황에 도달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김시우'로서의 삶도 이 몸으로 살아가야 한다.
겨우 칼리의 기억이 원하는 것만 달성한 결과로는 만족할 수가 없다는 거다.
"아뇨. 저도 하고 싶은 걸 찾았어요. 이제부터는 그림을 그릴 생각입니다."
"너, 그거 진심으로 하는 말이니?"
"예, 저는 진심입니...."
"절대로 안 돼!"
"여보!"
"네가 검술을 포기하고 마법을 배운다니. 칼리, 그건 절대로 안 된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 제발 검술만은 계속 배워다오."
아버지가 무릎을 꿇고 애원하는 모습은 처음으로 봤다.
대체 왜 아버지는 이렇게까지 내가 검술을 배우기를 원하시는 걸까?
나로서는 정말 이해할 수가 없는 일이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