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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1화 (11/229)

〈 11화 〉 2권 ­ 제 야짤이 범죄가 아니라 명작이라는데요?(5)

* * *

오히려 나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차라리 호통을 치면서 강요했다면, 못하겠다고 소리라도 치면서 싸우겠는데.

그게 아니라 미안하다며 부탁을 하니까 오히려 거절하기가 힘들었다.

아무리 감정의 골이 깊어져 있다고 해도, 결국은 그가 내 아버지였으니까.

'그렇다고 그림을 포기하고 검술로 넘어갈 수는 없어.'

마법이라면 그림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배울 수 있지만.

검술은 솔직히 계열이 너무 다른 이야기였기에, 여기서 아버지의 소원을 그대로 들어주기는 힘들었다.

어떻게든 설득하는 수밖에 없겠지.

다만, 처음에 가지고 있던 일단 가출해서 해결하겠다는 마음은 많이 사라져가고 있는 상태였다.

지금은 최대한 부모님을 설득해서 해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고 있었다.

하긴, 애초에 내가 부모님을 진심으로 싫어하고 있을 리가 없었다.

좋아하니까 그렇게까지 욕심부리면서 검을 연습했던 것이 아닌가.

"아버지, 솔직히 말해서 저는 아버지의 생각을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차피 제 부족한 실력으로 그다지 가문의 명예가...."

"그게 아니야. 결국 네가 우리 가문의 사람들과 비교당하는 것이 걱정되었을 뿐, 실력이 부족한 건 괜찮아."

"......."

다만 가문의 검이 명 자체가 끊기는 것은 아무래도 용납하기가 어렵다고 말했다.

만약 아버지 나이가 젊은 편이었다면, 손주가 대를 이으면 될지도 모르지만.

일반적인 결혼 적령기가 30대에 아이는 40대에 낳는 것이 평균인 이 나라에서 그걸 기대하긴 어렵기에 저리 급하신 거다.

지금부터 약 40년은 지나야 손주한테 직접 검을 가르칠 만한 상황이 될 테니, 백 살을 넘기신 그때까지 현역으로 검을 가르칠 자신이 없으신 거겠지.

'생각해보면 귀족들은 결혼 적령기가 늦었었지.'

검과 마법의 성 비율이 다르긴 해도, 여성들도 아주 많은 이들이 아카데미에 들어가서 자신의 꿈을 키우는 세상이니.

다들 연애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검이나 마법을 단련하는 데 시간을 쏟아내는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인지 자연스럽게 하고 싶었던 일들을 다 마치고 안정화된 이후에야 결혼하는 비율이 높다고 알고 있었다.

생각해보니까 제국의 주류 종교인 주신 미지아의 교단이 귀족들을 싫어하는 이유가 그거였지.

걔들 교리가 임신과 생명의 탄생이 신의 성스러운 축복이라고 믿고 출산을 장려하는 건데.

귀족들이 결혼을 늦게 하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아이도 적게 낳는 등 교리와 정반대되는 방향성의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럼 제가 일찍 손주 보여드리면 되겠습니까?"

"...뭐?"

"크흠, 아닙니다. 방금 말은 잊어주세요."

물론 좋은 사람만 있다면 이 해결책도 나쁘지 않겠지만, 그건 결국 내 일을 아이한테 떠넘기는 셈이니까.

지금 내가 그게 싫다고 주장하는 주제에 그런 식으로 회피하는 것은 올바른 방식이 아니었다.

그나마 방법이라면 아이를 아주 많이 낳아서 하나쯤은 검을 좋아하는 애가 나오길 기도하는 정도?

근데 그건 솔직히 불가능할 것 같은데.

"아버지가 뭘 걱정하시는지는 아시겠지만. 저도 이제 검을 잡고 싶지는 않습니다."

"칼리...."

"다만, 그럼 조건을 거셔도 괜찮습니다."

내가 그림만으로 소드 마스터 이상의 평가를 받을 만한 성적을 내면, 이 길을 인정해달라고.

만약 일반적으로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24살이 되는 해까지 그런 성적을 내지 못하면 다시 검을 잡겠다고.

이제까지 검만 보고 살아왔던 내가 하고 싶다고 느낀 첫 번째 일이라며, 오히려 내가 애원했다.

물론 내 그림은 이미 샤론 원로님도 인정한 상태이니, 이미 저 조건은 달성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래서 부모님을 속이는 것 같아서 죄송한 마음이 들긴 했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리는 내 장래와 관련된 일인 만큼, 확실하게 승리하는 조건으로 밀고 나가고 싶었다.

"소드 마스터 이상의 평가라니.... 오러 블레이드 같은 확실한 지표가 없는 마법 쪽은, 그런 평가를 확실히 받기가 더 어렵잖니."

"상관없습니다. 기준을 정하는 편이 좋으시다면, 샤론 원로님이 인정할 수 있을 정도의 그림을 그리는 것을 조건으로 하겠습니다."

"...자신이 있는 모양이구나."

"그게 아니라 이런 조건을 걸어서라도 꼭 해보고 싶은 겁니다."

아버지는 한숨을 푹 쉬더니, 반쯤 포기하듯 고개를 끄덕이셨다.

아마 아버지가 느끼기에는 난이도가 굉장히 높은 조건이었을 테니, 저렇게라도 하고 싶다는데 이번만큼은 져주겠다는 생각이셨을 거다.

"다만 그렇다고 가문의 지원을 받을 생각은 꿈도 꾸지 말아라."

"네?"

"이미 산 건 어쩔 수 없겠지만, 앞으로는 생활비를 최소한으로 줄일 거다."

괜한 심술 하나 부리시는 것으로 넘어가 주셨으니, 아버지치고는 굉장히 인도적인 느낌으로 마무리되긴 했는데....

시발 여기서 갑자기 물질적 지원이 끊겨버리네?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후, 드디어 그림 좀 그릴 수 있겠네."

예상치 못했던 부모님의 방문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는데, 혼자 남으니까 좀 정신이 드는 느낌이다.

그나저나 이번에 사 온 캔버스랑 재료 다 쓰면 돈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나.

이번에는 그냥 평범하게 경매를 맡겨야 하려나?

갑작스럽게 물질 지원이 끊겨버린데다, 괜히 아버지 화를 돋우면 이야기 자체가 없던 걸로 될 수도 있다고 어머니도 도움을 주지 않기로 하셨다.

그나마 도움 요청할 수 있는 대상은 로자리아 정도지만, 로자리아도 여름 방학을 시작해야 나오겠지.

이럴 줄 알았으면 저번처럼 몇 달 치를 미리 다 구매해 놓는 건데....

"근데 이 도구들을 어떻게 참냐고."

종류별로 도구를 다 사느라, 무게상 무제한으로 물건을 사기가 애매한 상황이었다.

최대한 빨리 마법사용 도구들을 써볼 생각에 내가 일반적으로 들 수 있는 만큼만 구매했거든.

어차피 어느 정도 적응은 되었으니 두 번째 작품은 저번보다 금방 나올 텐데, 그럼 당연히 출품을 위해 수도에 돌아와야 하니까 그때 또 사면된다고 판단했던 것이 문제였다.

하긴 갑자기 지원이 끊길 줄 거기서 누가 예상을 했겠어.

"돈을 번다라.... 그러고 보니까 저번에 인쇄 쪽도 발달을 잘 한 편이라고 했었지."

그래서 원본은 화가 본인이 가지고 있고 사본을 적당한 가격에 판매하는 경우가 있다고 들었다.

확실히 그렇게 일러 프린트해서 팔아먹는 것도 괜찮은 방법이지.

거기까지 생각한 나는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하나의 생각에 머릿속이 반짝였다.

생각해보니까 그림을 인쇄해서 팔아먹는 것이 가능하다는 건, 그걸 책으로 엮어서 파는 것도 가능하다는 소리잖아.

실제로 흑백이긴 해도 대량 유통되는 마법 서적들은 마법진 형태의 삽화가 들어가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정도 인쇄 시스템이 완성되어 있으면 그림 사본 말고 만화도 유통이 가능한 거 아닌가?

'물론, 여긴 만화라는 개념 자체가 확실히 정립되진 않은 모양이지만.'

당연히 글자가 없는 초기 형태의 만화야 존재하지만 어디까지나 초기 형태일 뿐이었다.

물론 만화가 한 장에 진심을 담은 일러스트에 비하면 디테일도 부족하고, 내용 표현을 그림뿐만 아니라 텍스트에도 의지하는 특성상 이 세상에서 먹히기 어려울 확률이 높았다.

하지만 지금 '시우'라는 화가는 엄청난 위상을 발휘하는 중이잖아?

그런 화가가 후속작으로 만화를 그려서 신장르 개척을 해두면, 의외로 인정받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그래, 수백화도 내가 예상하기에는 망할 줄 알았잖아. 그런데 성공을 넘어서 초대박을 쳤으니까, 만화라고 시도해보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

어차피 여기서 내가 실패한다고 해서 돈을 잃는 것도 아니고.

정 걱정되면 일단 만화를 전시한 뒤, 사람들의 반응을 보고 책으로 출판하면 되는 거다.

이거 진짜 괜찮은 아이디어 같은데?

"와, 그 와중에 펜 신세계인 거 보소."

이러니까 시발 만년필 개발이 안 되어 있었던 거구나.

마력을 사용하는 검은색 전용 펜의 성능은 정말 내가 상상하던 것 이상으로 대단했다.

이런 사기적인 녀석이 있는데 만년필을 개발하는데 시간과 돈을 사용할 리가 없지.

일단 기본적으로 엄청 좋은 촉감으로 그려지는 데다, 필기구의 압력이 부드럽게 작품에 전달된다는 점부터 굉장히 마음에 드는데.

아주 얇은 것부터 적당히 굵은 것까지 기본적인 두께까지 설정 가능한 기능도 있었다.

심지어 잉크는 그리는 순간 마력으로 만들어서 그런지, 절대로 번지지 않았다.

"오.... 진짜 괜찮은 것들이 많네."

특히 붓들의 경우에는 미세한 크기나 모양을 조절하는 기능은 물론이고.

현재 발려져 있는 물감을 1초 만에 청소해주는 기능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심지어 아직 마르지 않은 유채화 물감 위에다가 그릴 수 있는 붓은 실제로 테스트를 해보고 나서 그 신비함에 감탄을 참을 수 없었다.

"시발 이러니까 하루 만에 마르는 보조제가 그다지 인기가 없었구나."

애초에 이 세상에서는 마르는 시간 자체가 유화에서 중요한 문제점이 아니었던 거다.

그렇다고 그 녀석을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보조제는 작품의 표현을 위한 도구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이제까지 난 왜 그 고생을 했던 거지?

"그리고 별생각 없이 구매했지만, 지금 생각하면 신의 한 수였던 복사기."

검은색 단색이긴 하지만, 책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텍스트를 표현하기 위함이기에.

안정적으로 책을 보급하기에는 이 저렴한 형태의 단색 프린터가 유리해서 가장 많이 보급되어 있다는 녀석이다.

물론 그림이나 마법진을 위한 다색 복사기도 존재하지만, 그건 따로 전용 잉크도 들어가고 제품 가격이나 복사 시마다 들어가는 금액이 비정상적이라서 구매할 엄두조차 내지 못했었다.

"원래는 선 따놓은 걸 재활용하려고 구매했는데, 만화를 그릴 거면 이게 엄청 쓰임새가 많지."

나는 진심으로 이것을 구매한 과거의 나를 칭찬하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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