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2화 (12/229)

〈 12화 〉 3권 ­ 화신강림(1)

* * *

"역시 설명받은 것처럼 단색으로 복사되네."

흑백 인쇄라고 해도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를 이용해서 다양한 회색이 함께 출력되는 회색조가 있고, 완전히 불투명하게 칠하는 것과 칠하지 않는 것만 존재하는 단색이 있다.

간단하게 말해서 회색조는 검정 물감과 흰 물감을 적절히 섞어가며 그린 그림이고, 단색은 검정 펜 하나로만 그린 그림인 거지.

당연히 단색은 회색 표현이 안 돼서 명도 표현이 아예 불가능해진다.

그럼 당연하게도 명도 표현이 되는 회색조가 좋은데, 왜 그런데도 단색을 쓰는 걸까?

그건 회색조로 복사할 때는 흰색과 검은색을 적절히 섞는 식으로 복잡한 방식의 인쇄를 해야 하므로 난이도와 비용 문제가 굉장히 심각해지기 때문이다.

애초에 인쇄라는 것이 만화보다는 글을 담은 책을 최대한 보급하기 위해 만들어지는 것이니, 이런 것은 최대한 싸고 쉽게 보급하기 좋은 형태가 주류가 되는 법이다.

물론 이 세계에는 그림을 위한 컬러 복사도 따로 발달했지만, 단색 복사에 비해서 엄청나게 큰 비용을 요구하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오, 이거 꽤 그럴듯하게 만든 것 같은데?"

실제로 꼭 이 세상의 문제가 아니라, 지구에서도 비슷한 인쇄가 주류이던 시절이 있었다.

그렇다면 예전에 이런 단색 만화를 팔던 만화가들은 어떻게 회색을 만들어냈을까.

처음에는 아주 얇은 선이나 작은 원을 직접 빼곡하게 그려서, 일정 패턴을 그림에 새겨 넣는 식으로 해결했다.

이런 패턴은 조금 떨어져서 보면 칠해진 면적에 따라서 명도가 조절된 회색으로 보이는 착시 현상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걸 매번 다 그리는 것은 너무나 버거운 일이었고, 나중에는 그림 도구를 만드는 회사들이 '스크린톤'이라는 도구를 만들어냈다.

아주 얇고 투명한 스티커 필름에 이미 특정 패턴이 미리 그려진 녀석을 파는 것이다.

그럼 이제 만화가들은 그걸 필요한 모양으로 잘라서 작품에 붙이는 식으로 디테일을 살리는 거지.

실제로 이 형태는 디지털 작업에서도 프로그램을 통해서 비슷한 분위기를 내는 기법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있었다.

그래서 만화가들이 다 디지털로 넘어가니까 사라진 도구임에도, 나는 디지털 버전으로나마 사용해본 적이 있어서 어떤 건지 정도는 알고 있었다.

'당연하지만 이 세계에 스크린톤 따위가 존재할 리가 없지.'

하지만 그걸 대체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내가 사 온 복사기였다.

미리 스크린톤으로 사용할 패턴을 완벽하게 그려두고, 그걸 그대로 필요한 위치에 인쇄하면 스크린톤이랑 비슷한 효과를 낼 수 있으니까.

물론 내가 원하는 자리 이외에는 다른 종이를 덮고, 칠할 부분만 구멍을 뚫는 번거로운 작업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이번에 꽤 얇아서 뒤가 좀 비치는 종이를 샀고, 그림을 그리면 그 선에 맞춰서 나중에 종이가 잘려 나가는 펜도 구매했기 때문에 그다지 문제가 되는 난이도는 아니었다.

"아 진짜 이거 마법 펜 있어서 다행이지, 없었으면 이딴 패턴을 어떻게 그리냐...."

그래서 지금 나는 자주 사용될만한 패턴들을 직접 그리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기억에 기반해서 최대한 그럴듯한 녀석을 찾아서 하고 있다 보니, 그리 효율적으로 진행하고 있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건 한 번 해두면 계속 쓰는 거니까 힘을 내봐야지.

"대충 이 정도면 되려나?"

필요한 것을 미리 다 만들어 놓기는 어렵고, 기본적으로 자주 쓰인다고 기억이 나는 것들만 그려뒀다.

필요한 것이 없다 싶으면 그때 가서 새로 하나씩 마련하면 되겠지.

미리 끝낸답시고 이것만 붙잡고 있으면 아마 정신을 놓아버릴 거다.

"이야, 이거 선 따기가 너무 편해졌네."

깃펜이랑 다르게, 지우개질을 한다고 해서 잉크가 떨어져 나오는 경우가 아예 없었고.

굵기 조절이나 필압 등이 거의 타블렛 펜 수준으로 안정적인 느낌이라서 굉장히 편하게 작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선따기를 마치면 디테일 작업과 스크린톤 작업을 진행하기 전에 방금 그 프린터로 사본을 만들어둔다.

중간에 정말 어려운 작업을 할 것 같으면, 이렇게 사본을 만들 수 있다는 것도 기존과 굉장히 달라진 점이었다.

하, 마법사 놈들 이렇게 좋은 걸 자기들만 쓰고 있었단 말이야?

진짜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억울하고 분통해지는 성능이었다.

"일단 초반에는 좀 일상물 느낌의 분위기를 내다가, 침식 부분부터 확 분위기를 틀면 되겠지."

이번에 내가 작성하는 작품을 최대한 간단하게 설명하면 '마법소녀물'이라는 장르에 속한다고 설명할 수 있었다.

평소에 자기 자신의 삶에서 의미를 찾지 못하던 평범한 소녀인 주인공이, 세상을 망가트리는 침식이라는 재앙과 만나면서 시작되는 이야기다.

주인공이 이 세계를 수호하는 '화신'이라는 존재를 몸에 품는 것으로, 침식을 물리칠 힘을 얻게 된다는 내용의 비교적 흔한 장르와 설정을 하고 있다.

물론 당연하지만, 이 작품에서 관통하는 내 작품만의 특별한 설정 같은 것들도 존재하긴 하는데.

그거야 뭐 스토리보다는 그림과 더 밀집성이 높은 부분이었다.

만화는 글이 아닌 만큼, 그림으로 표현하는 특별한 설정도 있는 법이거든.

"이제 설정 부분은 대부분 다 해결된 게 맞겠지?

아무래도 이쪽 세상에서 설명하기 쉽게 작품 설정을 바꿔야 하다 보니, 미리 다 짜둔 작품인데도 신경을 쓸 것이 꽤 있었다.

예를 들어 원래 주인공의 이름은 '수백화'였는데, 한국식 이름을 여기서 쓰긴 애매하다고 판단했었다.

그래서 이름을 '알베도 드 아쿠아'로 변경을 해야 했지.

'분량은 최대한 짧게 자르자.'

딱 이 시리즈의 인트로를 느끼게 해주는 프롤로그 격 작품이라고 보면 될 것 같았다.

사실 좀 길게 자르고 싶은 생각이 없다면 거짓말인데, 그건 이 '만화'라는 시스템을 첫 시연 해야 하는 상황에서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기 때문이다.

시작부터 책이면 단행본 수준의 분량을 바로 때려 박아서 팔아버리면 되지만.

나는 이 만화를 그림이라는 시스템으로 전시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니까.

아무리 그래도 전시가 가능한 수준의 매수로 진행해야지.

'침식에 습격받을 때부터 분위기 바꾸고, 니그레도가 나타나서 도와주는 장면은 최대한 역동적이고 화려하게.'

기본적으로 이 작품이 그런 분량으로 설정된 이상.

결국은 이 처음이자 마지막 전투가 작품을 관통하는 가장 중요한 파트라서, 최대한 힘을 줘서 그릴 필요가 있었다.

조금 미소녀들의 외모를 해치더라도, 더 역동적이고 살아 움직이는 듯한 선을 주는 것이 중요했다.

개인적으로 이 작품은 소년만화풍의 전투 감성도 놓치기 싫었으니까.

평범한 생활과 평범한 나머지 재능조차 평범해서 어떤 길을 걸어야 할지 방황하는 소녀 알베도.

그런 알베도의 눈앞에 나타난 비현실적이고 끔찍한 재앙인 침식.

그 침식을 없애기 위해 온몸을 불태우며 싸우는 아름다운 소녀 니그레도.

아마 이 시점에서 평범한 알베도와 비현실적인 니그레도의 색채 대비를 주는 게 좋겠지.

"그런데 여기서 끝내 니그레도도 당한다는 식으로 절망적인 분위기를 극대화하고."

주인공인 알베도가 화신을 품어, 화신체로 각성하는 변신씬을 그려낸다.

입고 있는 옷을 깡그리 불태워서 사라지게 만들고, 몸은 새하얀 불꽃이 가려주는 것으로 특별한 힘을 손에 넣는다.

사실 이게 이 작품의 메인 주제지.

'알몸 마법소녀.'

변신 중에 알몸이 된다는 컨셉은 마법소녀 세계에서 자주 있는 설정이지만.

싸우다가 불을 사용할 때마다 사용한 불이 있던 부위는 옷이 사라지는, '진짜 알몸'형 마법소녀라는 점이 기존의 마법소녀물과 다르다.

이 작품에서만큼은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에 진심이다.

스토리야 솔직히 장르적 클리셰를 다 때려 박았기에 특별한 것이 없지만, 저 알몸 연출만큼은 내가 생각해낸 이 작품의 가장 큰 특징이자 내가 이 작품을 그리는 원동력이었다.

변태 같은 설정이지만 원래 그래서 더 좋은 것 아니겠는가.

"아, 니그레도가 기술 쓸 때, 이 부분은 노출을 조금 더 넣는 편이 예쁘겠는데?"

그리고 그건 당연히 주인공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작품에서 '화신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마법소녀 전원이 이 설정을 공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전체적으로 진지한 스토리의 마법소녀물임과 동시에, 그림에서는 변태적인 옷차림이 빛을 발하는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이렇게 진지하고 몽환적인 분위기에서 등장하는 나체의 아름다움을 굉장히 좋아하거든.

"그래도 진짜 생각보다 분위기 있게 잘 그려져서 다행이네. 제대로 연출하는 데 걸리는 시간이 긴 것만 제외하면 괜찮은 느낌이야."

몸에서 타오르는 불꽃을 얼마나 잘 묘사하느냐가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점 중 하나고, 그만큼 스크린톤을 잘 사용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솔직히 맨날 디지털로 작업하다가, 스크린톤까지 사용해가며 아날로그로 단색 작업을 하는 것은 처음이라서 굉장히 불안했다.

아무래도 처음에는 퀄리티를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 살리기 어려운 것이 당연하니까.

하지만 걱정과는 다르게 정작 결과물은 되게 예쁘게 나오는 중이었다.

"이런 거의 알몸인 상태로 싸우면서도, 부끄러움은커녕 자신을 구해준 니그레도를 구해주겠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 있는 알베도의 진심 파이어 펀치로 침식을 마무리."

하지만 그렇게 침식을 쓰러트린 뒤, 자신에게 담겨있던 '화신'이 빠져나가면서 옷이 되어주던 불이 사라진다.

그럼 그녀는 그냥 덩그러니 알몸만 남는 상태가 되게 되는데, 이제 이 타이밍에 깜짝 놀라서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진짜 존나게 귀엽지.

진지한 알몸과 부끄러워하는 알몸 둘 다 놓칠 수 없는 특별한 매력을 가지고 있기에 이것도 꼭 작품에 들어가야 하는 장면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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