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화 〉 3권 화신강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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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이거 생각보다 너무 오래 걸린 것 같은데."
솔직히 그렇게 많은 분량은 아니었는데, 처음이라서 그런지 스크린톤을 그려야 할 것이 너무 많았고.
그거 작업하는 데 걸리는 시간을 너무 많이 소모했다.
물론 이 세계에서 선보이는 최초의 만화라는 생각에, 힘 제대로 주고 싶어서 오바 떨면서 작화를 한계까지 끌어올린 것도 원인 중 하나긴 할 거다.
이게 오히려 선 따놓은 게 백업이 되니까 여러 번 시도해서 가장 잘 나온 걸 고르게 되더라고.
물론 100페이지가 넘는 분량을 한 달 만에 뽑았으니, 적당한 속도로 작업한 것이 아니냐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진짜 잠까지 다 줄여 가면서 이것에만 몰두했다는 점을 고려하면 실망스러운 속도였다.
사실상 휴식해야 하는 시간에 스크린톤만 찍고 있었던 셈이니, 멘탈 상태가 영 아닐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너무 신경 쓰지는 말아야겠지. 어차피 다음 작품엔 좀 빨라질 테니까."
아무래도 일상 파트에서 사용할만한 스크린톤은 물론이고, 전투씬에서만 쓸 것 같은 녀석을 비롯해 정말 어지간한 종류는 다 뽑아놨으니.
다음 작품이면 아마 이것보다는 훨씬 덜 걸리지 않을까 싶긴 했다.
하긴 원래 디지털 작업할 때도, 나에게 필요한 브러쉬를 구하는 중이거나 작업 환경에 익숙해질 때는 작업 속도가 느렸었다.
"이야 오랜만이네."
한 달 만에 돌아온 수도는 생각보다 크게 변화한 것이 있지는 않았다.
내가 기존에 지냈던 여관 같은 경우에도 그대로 있었고, 오히려 나를 알아보기까지 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하긴 원래 한 달 만에 뭐가 변하는 일은 많지 않을 거다.
사실 가장 궁금했던 것은 여전히 자신의 그림이 좋은 성적을 기록하고 있냐였다.
어차피 그 당시에도 한 달 이상을 유지할 추천수를 받은 상태였기에, 전시 자체는 여전히 되어 있었겠지만.
그래도 참신하다는 이유로 뜬 작품인 만큼 그때만큼 추천수를 폭탄으로 받고 있지는 않을 것 같은....
"뭐냐 이게...?"
이상하다?
내가 지금 졸려서 헛것이 보이는 중인가?
저번에 여길 왔을 때 느꼈던 그 특유의 감성 넘치는 작품들을 볼 생각에 뽕이 차올라 있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아니라 여러모로 내 눈을 의심하게 하는 작품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지금 이게 무슨 일이지?
일단 내 작품의 경우 엄청난 추천수를 꾸준하게 유지하면서, 여전하게 최상위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 이건 진짜 내가 감사해야 할 일이고, 기뻐해야 할 일도 맞는 것 같은데.
문제는 그 옆에 있던 그림들이 굉장히 많이 바뀌었다는 거다.
"아니, 이게, 이게 시발 맞나?"
기존에 엄청 인기 있던 히트작들을 제외하면, 전부 다 그림의 분위기가 역변했는데.
그 역변한 방향이 굉장히 어떤 한 그림하고 닮아 있었다.
당연하게도 그 그림은 내가 그렸던 '수백화'였다.
씹덕 그림체의 향연이라고 묘사해도 좋을 정도로, 내 그림과 유사한 만화체의 일러스트가 미술관 전체를 꽉 채우는 중이었다.
물론 지난번에 여기 왔을 때도, '문 안의 세계'라는 작품이 센세이션이었던 만큼 그것과 닮은 작품들이 많이 나왔었지.
심지어 그것들이 상위권에 박혀있는 경우도 자주 봤고.
근데 지금은 그때보다 더 심한 것 같은 것이, 그때보다 더 짧은 시간이었는데 그동안 이루어진 상위권 작품들의 교체가 너무나 많았다.
진짜 기존 대박작을 빼면 죄다 씹덕 그림으로 바뀌어 있는 이 사태를 보니까, 정작 그 씹덕 그림을 사랑하는 나조차도 정신이 어질어질했다.
이건 진짜 좀 무서워지는데?
'어우, 이 정도면 시우가 이세계에 씹덕을 풀었다고 커뮤니티에서 고로시 당해도 할 말 없겠는데....'
사실 초기니까 내 그림체랑 닮은 것이 많긴 했지만, 그거야 화가들도 자기 그림체를 찾는데 시간이 걸릴거고.
개인적으로 내 그림체에 가까운 느낌을 사랑하기 때문에 오히려 내가 즐기기 좋으니까 나쁠 것은 전혀 없었다.
이거야 개인차긴 한데, 그만큼 내 그림을 사랑해주는 사람이 많다는 거라서 이 정도면 나에겐 오히려 고마운 상황이라고 본다.
오히려 걱정되는 건 이대로면 기존 이 시대의 그림들이 가지고 있던 특유의 특성들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들도 내가 보기엔 정말 아름답고, 보존되어야 하는 스타일들인데....
하긴, 이건 그냥 유행 반짝하는 거니까 그런 스타일도 살아남겠지?
내가 너무 걱정하는 걸지도 모르겠다.
'최상위권은 확실히 자기만의 그림체가 안정화가 되어 있네.'
심지어 유화가 아니라 다른 방식을 채용하면서도, 만화체를 안정적으로 유지한 작가들이 눈에 띄었다.
확실히 색감과 질감이 달라서 저런 것들은 눈에 확 띄게 다른 분위기가 나네.
한 달 만에 씹덕 그림이라는 장르를 이 정도로 따라올 수 있다는 게 놀라울 정도다.
지금 상위권만 보자면 현대 인기 그림 사이트의 상위권 랭킹과 크게 차이를 느끼기 어려운 수준이었으니까.
확실히 이 세계에서 그림이라는 취미 하나만큼은 무서울 정도로 발달해 있었다.
말이 취미지, 취미 활동으로도 본업인 마법의 실력이 올라간다는 특이한 특성 때문에 그림에 진심인 마법사들이 많아서 그런 건가?
그들이 그 실력과 노력을 만화체에 한 달간 쏟아부은 결과가 눈앞에 있는 이 그림들이겠지.
"그래, 이걸 가지고 어디까지 갈지 무섭다던가 그런 걸 생각하는 것 자체가 실례지."
그저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이 남긴 미학을 느끼며, 순수하게 그림 자체로 봐주는 것이 올바른 대응일 것이다.
나는 방금까지 끼고 있던 색안경을 최대한 내려놓고, 진지한 마음으로 그림을 살피기 시작했다.
확실히 내가 메타를 선도했다고 치더라도 이 그림들을 통해서 하고 싶은 말은 전부 다르네.
"유일하게 닮은 건 그림체라 이건가?"
하위권에는 거의 모작에 가까운 것들도 존재했지만, 기본적으로 상위권은 씹덕 그림체라는 공통점 말고는 전부 다른 수준이었다.
특히 나체의 변태적인 그림으로 시작된 열풍인데도, 다수의 그림이 옷을 제대로 표현하는 식으로 스타일을 낸 것은 좋은 방향이라고 생각했다.
확실히 옷이라는 것도 누군가는 입히고 누군가는 벗겨야 나체라는 것이 아름다운 거지, 모든 사람이 다 벗겨 놓으면 의미가 퇴색되는 법이다.
실제로 다들 만화체의 아름다움은 옷의 여부가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는 거다.
옷 또한 옷이 보여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존재한다는 것을, 화가도 관람자도 잊지 않고 있기에 지금과 같은 결과가 나온 것이리라.
물론 기존보다 옷을 벗고 있는 그림의 비율이 늘어나긴 했지만, 그것들도 구도가 모두 다른 만큼 그것대로 다 나와는 다른 나체의 맛을 표현하고 있었다.
'이렇게 보니까 또 적당히 건강하긴 한가...?'
그냥 시대에 따라 어떠한 화풍이 유행하는 것처럼, 내가 트리거가 되어서 다음 화풍이 씹덕식 만화체가 되었을 뿐이다.
하긴 저번에 이야기하는 걸 들어보니까 다들 카메라의 등장 때문에 이러한 '그림만 해낼 수 있는 아름다움'을 기다리고 있던 것 같긴 했다.
굳이 씹덕 그림이 아니더라도 비슷한 무언가로 화풍이 바뀌기 직전인 상태였겠지.
나는 그걸 방아쇠를 당기는 역할을 해줬을 뿐이고.
그리고 천천히 기억을 되살리면서 작가 이름과 예전 작품을 떠올려 매칭시키면, 의외로 전작들의 분위기가 많이 남아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처음에는 마냥 씹덕 그림이 널려 있으니까 당황했는데.
진지하게 흐름을 보면 볼수록 그다지 걱정할 만한 부분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중이었다.
예를 들어 굉장히 옷의 주름이나 표현이 디테일하던 드레스를 잘 그리는 한 화가가 있다고 하자.
그럼 그가 그린 전작은 가볍게 보면 사진을 찍은 것처럼 보이지만, 자세히 보면 워낙 주름이 섬세해서 어지간한 사진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아름다운 옷을 표현하곤 했다.
그런데 그가 이번에 그린 그림은 캐릭터야 씹덕 미소녀지만, 여전히 정말 아름답고 미려한 드레스를 그려내고 있었다.
특히 내 경우에는 꽤나 많은 머리카락 디테일을 포기하는 형태의 그림체인데.
원래 머리카락을 세세하고 미려하게 그려내는 것이 특징이던 어떤 화가는, 만화체에서도 그 세세하게 흩날리는 머리카락의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그림체를 사용하고 있었다.
참고할 만한 만화체의 원본이 내 그림밖에 없었을 텐데도, 딱 자신에게 필요한 것들만 잘 가져와서 적용했다는 점 때문에 나도 이 사람들을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었다.
"오, 이런 것도 있네?"
그리고 꽤 재밌는 시도를 하는 작품들도 많이 있었다.
지금 내가 보고 있는 '거울 세계'라는 작품은, 아예 똑같은 구도와 설정의 세로 그림을 두 개 그려 놓았다.
그런데 왼쪽은 실사체 오른쪽은 만화체로 그려서, 중앙의 선을 기준으로 서로가 대칭하는 거울의 느낌을 살린 거지.
실사체 그림의 아름다움과 만화체 그림의 아름다움을 모두 살리면서, 그 두 개의 차이에 대한 부분을 잘 생각한 티가 나는 작품이었다.
그리고 이게 이런 시도만 좋았다면 모르겠는데, 겨우 한 달 만에 파악했다기엔 믿기 힘들 정도로 만화체의 내공도 많이 담겨 있었다.
진짜 대단한 사람들이야.
"어쩌면, 이렇게 대단한 사람들 틈바구니에서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게 축복일지도 모르겠다."
나야 애초에 이런 그림이 당연한 시대에서 그림을 배웠고, 그 당연한 것들을 그대로 가져와서 펼치는 것일 뿐이지만.
그것을 해체해서 자신의 것으로 빠르게 소화하는 이곳 화가들의 실력은 그 이상으로 무서운 것이었다.
진짜 오늘 여기 보면서 많이 배우네.
이런 결과를 보고 나니까 과연 만화라는 것에는 이들이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해졌다.
이곳에서는 본래 소설만이 가지고 있던 영역을 그림에 끌어들인다면?
과연 이 고인물 화가들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가 진심으로 기대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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