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4화 (14/229)

〈 14화 〉 3권 ­ 화신강림(3)

* * *

"한 달만인가요? 스승, 아 시우님께서는 뭐라고 하시던가요?"

"기뻐하시더라고요. 이번에는 신작 전시 때문에 왔는데.... 이게 좀 특이해서 가능할지 모르겠네요."

내가 100장이 넘는 원고를 꺼내서 내려놓자, 직원의 표정이 황당함으로 물들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100장이 넘는 그림을 전시해달라고 한 번에 가져오면 어처구니가 없을 것 같긴 하다.

하지만 이것도 스토리를 적당한 시점에서 끊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타협한 분량이라 어쩔 수 없었다.

"이게 여러 작품이 아니에요."

"여러 작품이 아니라고요?"

"네, 이것들을 전부 하나로 해서 시우 스승님의 신작인 '화신강림'이라는 이름의 작품입니다."

"음, 잠시만요. 아무래도 일반적인 작품들이랑은 상황이 달라서.... 이걸 어떻게 전시해야 하죠?"

아무래도 작품을 이전 내용에서 이어지는 형태로 관람해야 하는데, 그렇다 보니 무조건 한 방향으로만 작품을 관람해야 했다.

또한 이 세상에서 글을 읽는 방향으로 만화 칸의 진행을 그려 놓았기에, 이전에 본 것이 좌측에 있고 다음에 볼 것이 우측에 있는 형태가 좋겠지.

그리고 지난 작품인 '수백화'도 이 작품과 관련이 있어서, 가능하면 같이 전시하고 싶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녀는 해당 내용을 펜으로 전부 메모하고는 잠시만 기다려 달라며 안으로 들어갔다.

'아무래도 쉬운 부분은 아니겠지.'

지금 가장 히트 치고 있는 인기 작가의 신작이니까 이렇게까지 대우를 해주는 거지.

만약 그게 아니라 쥐뿔도 없는 사람이 와서 이런 규격 외 전시를 요청하면, 나라도 거절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하, 근데 이거 말고도 요청할 것이 많은데 큰일이네.

"오래 기다리셨죠?"

"괜찮습니다. 이해해요. 무모한 요구였으니까요."

"일단 이 분량이면, 다행히 하나 남는 전시관이 있어서 그곳을 사용하면 괜찮을 것 같아요. 근데 이러면 전시관 승급 없이 계속 그곳에만 전시되어야 하는데 괜찮나요?"

"그건 상관없습니다. 추천수에 맞는 전시 기간만 그대로면 매우 감사하다고 하셨어요."

이게 되네.

나는 이 작품을 전시할 때 어떤 형태를 설명해 주는 그녀를 보며, 내심 안심했다.

혹시 이게 거절되면 이걸 어떻게 공개해야 하나 싶었는데 다행이야.

"그리고 현재 전시되고 있는 '수백화'말인데요. 이건 이미 전시된 작품의 사안이라서 이동하면 혼란이 생길 거라고 거절되었는데 어쩌죠?"

"아, 그럼 혹시 사본이라도 가능할까요?"

"그럼 그건 그렇게 진행하겠습니다."

"혹시, 사본 제작하게 되면 몇 장만 주실 수 있나요?"

"사본은 왜요?"

"사실 스승님이 이번에 '수백화'와 신작을 사본으로 제작해서 판매하고 싶다고 하셨거든요. 근데 이게 '수백화'를 그냥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위에 더 추가하실 게 있답니다. 당연히 원본이 아니라 판매용 사본 전용으로요."

"어, 진짜요? 사본의 경우에는 현재 전국에 공급하는 중이라서 여분이 있을 거예요. 위쪽에서 결재 맡으면 드릴게요."

생각해보니까 인기 작품은 전국에 사본을 전시해둔다고 했었지.

정작 내 작품이 그렇게 될 거라 생각을 하지 않고 있었다 보니, 그 이야기를 들으니까 기분이 묘했다.

그럼 내 야짤이 지금 전국의 미술관에 전시가 되어 있다는 거네?

오우 미친.

"그나저나 이걸 다 사본으로 판매한다고요?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이러면 단가가...."

"혹시 일반 책에 쓰이는 단색 복사가 가능할까요?"

"네? 어, 물론 작품은 아니지만 필요한 때도 있어서 설비는 있습니다. 어라? 잠시만요. 이거 설마...."

"이번 신작은 전부 단색으로만 그려졌어요. 투명도도 없으니까 책으로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이거 설마 책으로 만들 걸 가정하고?"

"네."

그제야 왜 이렇게 이 작품의 매수가 많았는지, 또한 왜 갑자기 이번 작품이 흑백이었는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말이 나온 김에 관련된 이야기를 다 해놔야 일 처리가 편하겠지?

나는 설명용으로 가져온 겉표지 견본을 꺼내 들고는 그것에 대한 설명도 시작했다.

"지금 시스템으로 책을 만들면, 무조건 다 흑백 단색으로 만들어지죠?"

"네, 맞아요."

"그럼 이제 '수백화'같은 컬러 작품을 인쇄해서, 이런 형태로 접어서 책에 끼우는 겁니다. 그럼 겉에는 컬러가 보이는 형태라서 더 예쁜 책이 되죠. 이 정도면 생산 단가가 맞지 않을까요?"

"어떻게 이런 생각을...."

"저야 모르죠? 스승님이 워낙 좀 특이한 성격이셔서."

가상의 시우 스승님 뒤에 숨는 거 너무 편하네.

대답하기 애매한 부분은 아무튼 스승님이 그런 거고 나는 모른다고 하면 되니까.

이런 꼼수에 맛 들이면 안 좋은데....

"스승님은 이걸 겉표지라고 부르시더라고요. 하여튼 수백화 사본을 달라고 하신 게, 수백화를 이용해서 겉표지 디자인을 하시겠대요."

"자세히 확인은 해봐야겠지만, 불가능한 건 아닐 것 같습니다."

"어차피 스승님도 겉표지 디자인에 시간이 걸린다고 하셨으니까, 그동안 천천히 알아보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일단 가장 급한 전시부터 진행 시작할게요."

나는 천천히 해도 괜찮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으면서 시간이 굉장히 빡빡하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대체 그게 무슨 소리인가 했는데.

전시가 완료된 뒤에 익숙한 사람이 등장하는 걸 보고 나서야 상황을 이해할 수 있었다.

"오셨습니까."

"크흠, 미안하네. 나도 참 나이답지 않게 흥분해버렸어."

"안녕하십니까. 원로님."

"호오, 자네. 몸에서 유화 냄새가 사라졌구먼. 마법이라도 연습하는 모양이지?"

"아, 네 뭐...."

그렇기는커녕 한 달 내내 펜을 붙잡고 만화만 그렸다고 말할 수는 없으니.

대충 그런 느낌이라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갔다.

하여튼, 미술관의 대표가 구경하러 온다니까 급하게 일을 진행했던 거구나?

"시우 화가가 그린 신작이라니, 심지어 전시의 틀부터 달라진 작품이라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있어야지."

"아하하...."

저렇게 기대하고 왔는데 마음에 안 들면 어쩌지?

오히려 부담감만 심하게 느껴져서 여러모로 당황스러운 상태인데.

이럴 줄 알았으면 전시 상태 보지 말고 그냥 숙소 가서 쉴 걸 그랬나?

'아니지, 혹시 순서라도 틀리면 골치 아프잖아. 최종 검수는 해야지.'

샤론 원로님은 방금 내가 검수를 마친 관람관으로 향하더니, 말없이 천천히 '화신강림'을 관람하기 시작했다.

굳이 설명하지 않았는데도 맞는 순서에 따라서 칸을 살피는 걸 보면, 아마 저 순서로 배치하는 것이 정답이었던 모양이다.

한 페이지씩 꼼꼼하게 살핀 뒤에 다음으로 넘어가기를 여러 차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짧은 감탄을 내뱉는 것이 나에게도 느껴졌다.

생각보다 괜찮은 느낌인데?

'글자를 보고 이딴 건 그림이 아니야! 같은 소리를 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는 그러한 편견 따위는 전혀 없는지, 진심으로 즐거운 표정으로 웃고 있었다.

내가 살다 살다 100살도 넘는 할아버지가 저런 눈으로 만화를 읽는 걸 실시간으로 보게 될 줄이야.

참 세상 여러 번 살고 볼 일이었다.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만화는 계속 진행되었고, 슬슬 마지막 파트가 진행되고 있었다.

모든 사건이 끝나고 평범한 생활로 돌아온 주인공 알베도가 허전함을 느끼는 장면이다.

만약 '수백화'가 작품 내에 들어간다면, 아마 이 장면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싶네.

"여기서 끝이라니. 자네 스승도 굉장히 짓궂군."

"아하하...."

그렇게 허전함을 느끼던 알베도의 앞에 니그레도가 나타나는 것에서 화신강림은 끝이 난다.

이건 뭐 후속작을 생각하고 그린 작품이니까 어쩔 수 없는 엔딩이지.

그리고 원래 이렇게 간질간질한 느낌으로 끝나는 엔딩도 개인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고.

"사실 처음에는 대체 왜 작품을 흑백으로 했나 싶었다네. 물론 그런 작품들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처음에는 채색에 시간이 오래 걸려서 시간 때문에 이걸 선택했다고 생각했어."

솔직히 그것도 아니라고 보긴 어렵지 않나?

풀컬러 만화는 디지털로 그려도 엄청난 시간을 갈아먹는 괴물인데, 아날로그에서 그 짓거리를 했다간 이 정도 분량을 뽑기 위해 지금의 3배 이상의 시간이 들었을 거다.

심지어 스크린톤처럼 그려두면 나중엔 좀 빨라지는 부분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혹시 이거 책으로 만들 생각인가?"

"맞아요. 아직 못 들으셨군요."

"오자마자 여기부터 온 거라서 말이네. 역시, 이건 책으로 만들 예정이었군. 하, 정말 자네의 스승은 무시무시한 작자구먼."

"그렇습니까?"

그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내가 스크린톤으로 넣은 회색 부분을 가리키며 세세하게 보이는 패턴 무늬를 하나씩 언급하기 시작했다.

이것들로 마치 기존의 그림들과 비슷한 명암을 주면서도, 이미 완성된 복사 기술로 책을 만들 수 있도록 호환시킨다.

그것이 너무 놀라운 일이라는 것이다.

"점묘법을 도입해서 만들어낸 생각 같은데, 누구 한 사람의 생각이라기보다는 마치 오랜 시간 사람들이 연구한 결과물 같아."

"크흠...."

그는 예시를 들려고 한 말이겠지만, 오히려 굉장히 본질에 근접한 말이라서 굉장히 양심에 찔렸다.

솔직히 오늘 가져온 만화는 말 그대로 지구에 있던 만화계 발전의 정수를 담은 것들이니까.

만화는 내 것이어도 그 기법 등에 대해서는 찔리는 부분이 많았다.

"사실 그것뿐이었다면, 그저 저렴한 가격으로 그림의 사본을 즐기게 하려는 이상한 마법사 정도였을 걸세."

"그럼...."

"이 사각형은 그림에 시간을 담았네. 사실 예전에도 비슷한 형태가 있었지만, 그걸 너무나 깔끔하게 완성해냈어."

"시간을 담아요?"

"이 사각형이 다음으로 지나갈 때마다 다음 상황이 펼쳐지지, 그럼 이것이 과연 시간을 그림에 담은 것과 무엇이 다른가?"

...만화라는 게 원래 그렇게 고차원적인 무언가였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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