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5화 (15/229)

〈 15화 〉 3권 ­ 화신강림(4)

* * *

"그것을 가장 심하게 느꼈던 것이, 여기서 침식이라는 것과 싸울 때 소녀들의 모습이네. 지금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역동성과 함께 네모 칸을 벗어나려고 하잖나?"

"그, 그렇죠?"

"즉, 이 네모 칸은 시간을 의미하는 걸세. 그래서 찰나의 순간을 표현하였을 때는 불안정해서 그 칸을 벗어나려고 하는 것이지."

아니 그냥 칸을 벗어나는 것이 더 역동적인 착시를 불러일으켜서 그렇게 한 것뿐인데요?

뭔가 엄청난 오해가 생겨나는 중인 것 같은데?

대체 왜 만화의 칸에 그런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는 겁니까.

"그리고 시간을 담으면서 늘어난 작품의 길이를 관람하기 편한 시스템을 고안하기 위해 생각해낸 것이 바로 책이었을 테고."

"어...."

그래서 그 책에 맞는 방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방법을 결정했다면, 그 섬세한 시스템의 연결이 가히 천재적인 감각이라는 것이다.

그것들을 따로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이 하나의 작품에서 단번에 선보인 것부터 그 완결성을 볼 수 있고.

그에 따라 시우라는 화가가 얼마나 이런 디테일에 목숨을 거는 천재인지 알 수 있다며 극찬을 날렸다.

이건 진짜 어질어질하네.

"그리고 처음에는 도대체 왜 그림에 글자를 쓰는지 몰랐는데, 보면 볼수록 그 글자들이 직관적으로 그림을 도와주고 있더군."

"아, 그렇죠?"

"그래, 이건 아마 소리와 감각을 그림에 담기 위한 시도가 아니겠는가?"

그게 또 왜 그렇게 되는 겁니까.

하여튼 그는 이 작품의 표현 방식은, 그림의 기초인 시각을 제외한 부분들도 담아내기 위한 시도라며 극찬하기에 바빴다.

듣다 보니까 그럴듯한 것 같기도 해서 내가 설득당할 것 같은 느낌이야.

나 너무 무서워.

"이거 보게, 여기 '콰앙'이라고 적힌 부분의 글자는, 이미 평범한 글자의 형태를 넘어서 자신의 모양 자체가 그림 일부가 되어 있지 않은가?"

"어...."

확실히 효과음의 경우 어떻게 쓰냐에 따라서 느낌이 확 다르긴 하지.

추후엔 이것도 폰트를 사서 사용하는 경우가 있긴 했지만, 사실 그림에 어울리게 하려면 효과음 텍스트는 직접 그리는 편이 좋긴 하다.

"하지만 여기 대화 부분은 타자기의 결과물을 사용한 모양인데, 이건 일부러 둘의 차이를 주기 위해서겠지. 대신 대화에서 감정 표현이 모자란 것은 대화가 들어가는 흰색 부분의 모양으로 표현한 것 같고."

그것에 대해서 그런 진지하게 고민하고 타자기를 구했던 건 아니었다.

그냥 원래도 그렇게 했으니까, 여기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다고 생각했을 뿐이다.

그래서 타자기를 빌려서 텍스트를 치고 복사기로 박아 넣는 방식으로 대사를 넣었었던 기억이 난다.

"크흠, 미안하네. 워낙 감동했더니 내가 너무 자네를 밀어붙였군."

"아하하.... 괜찮습니다. 다만 제가 스승님이 아니라서, 제대로 된 상대가 되어드리지 못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자네 스승은 절대로 누군가와 만날 생각이 없다고?"

"예, 무조건 정체를 숨기실 모양입니다."

샤론 원로님은 못내 아쉬운 듯, 안타깝다는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뭐, 그래도 본인이 정한 익명 화가 규칙이라서 그런지 더 캐묻거나 부탁을 하는 일은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런 사람이 그림 업계를 관리한다는 것부터, 이 세상은 굉장히 축복받은 곳이었다.

"작품의 평은 전체적으로 그런 느낌이야. 우리가 그림을 그릴 때 걸어갈 수 있는 새로운 길을 하나 제시해 주는 지침 같은 녀석이었어."

"그렇군요."

그래도 다른 것보다 가장 하고 싶었던 말이 제대로 전해졌다는 점에서 안심했다.

결국 나는 만화라는 장르를 이 세계에 문화 중 하나로 정착시키고 싶었던 거니까.

그리고 하는 김에 그 레퍼런스부터가 야한 만화라서, 자연스럽게 야한 것도 문제가 없다는 분위기가 되었으면 했고.

"그래, 그건 어디까지나 작품에 대한 부분이야. 화가에 대한 부분은 조금 더 있지."

"화가요...?"

"처음 관람을 시작할 때, 익숙한 그림부터 하나 보여주고 시작하지 않는가?"

"아, 그렇죠."

'화신강림'의 경우 표지로 '수백화'를 사용하기로 했기 때문에, 처음에 수백화를 보여주면서 시작한다.

그는 그 부분에서 굉장히 놀랐다고 말하며, 그때부터는 화가가 세운 계획들이 적나라하게 보여서 감탄만 나온다고 말했다.

오, 여기에는 대단한 계획이 존재했던 거구나.

그건 몰랐네.

"처음부터 이 작가는 이 둘이 하나라고 생각하고 작업을 했던 거야. 다만 처음부터 이런 형태를 보여줘도, 혼란스러워할 사람이 많겠지. 혹은 전시부터도 애를 먹었을 테고."

"아, 그건 그렇죠."

"그래서 일단 그 전에 자신의 입지를 늘리면서도, 그 늘린 입지가 그대로 자신의 원 목표였던 이 '화신강림'이라는 작품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계획을 한 거지."

그냥 여러 그림을 그리다가, 우연히 문제없이 완성된 첫 번째 그림이 수백화였을 뿐이다.

그러다가 만화를 그려볼까 했더니, 하필 전작이 수백화라서 재활용하면 나쁘지 않겠다고 생각해서 활용하기로 했던 거고.

전부 우연이었던 것들이 무시무시한 계획이 되어가는 중인데?

"그, 그건 너무 나간 것 아닐까요?"

"하지만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 달 만에 나왔다기에는 이번 작품은 너무 빨라. 미리 그리고 있던 작품이겠지."

"에, 실제로 스승님은 이걸 한 달 만에 그리셨는데요?"

"이걸 한 달 만에? 분명히 이 정도 실력이면 본업도 굉장히 뛰어난 마법사일 텐데, 그 정도로 시간을 낼 수 있다니...."

아, 그 부분은 나도 미처 생각하지 못하고 대답을 해버렸네.

생각해보니까 이 세계에서 그림은 어디까지나 마법사들의 취미활동이었지?

워낙 그 취미활동에 진심인 미친 사람들밖에 보질 못해서 헷갈리는 경우가 많았다.

"자네도 알겠지만, 그는 이 그림들에 있는 작은 무늬 패턴들을 하나하나 그렸을 텐데. 그럼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겠는가? 1달 동안 잠을 줄여가며 그림만 그려야 가능한 분량이라고 보는데?"

실제로 나는 그렇게 작업해서 결과물을 낸 거라서, 뭐라고 반박하기가 굉장히 어려웠다.

근데 지금 생각해보니까 스승인 시우는 대마법사라고 다들 믿고 있잖아?

그런 사람이 노는 활동인 그리기에 한 달을 내내 사용했다는 것 자체가 이해하기 힘들겠지.

당장 일을 던져놓고 달려온 듯한 샤론 원로도, 지금은 던졌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평소에는 일로 바쁜 상태였다.

얼마나 바빴으면 손녀인 로자리아와도 자주 만나지 않는 듯한 모양이고, 그래서인지 저번에도 나랑 거의 초면이었잖아.

이건 내가 실수했네.

"아, 아마 '스크린톤'이라는 걸 스승님이 활용해서 그런 것 같아요."

"스크린톤? 처음 듣는 말인데. 도구 이름인가?"

"스승님이 고안하신 것 같아요."

다만 이 소재의 경우 이야기가 나올 것을 예측했다.

혹은 나오지 않으면 어떻게든 내가 꺼내면 된다는 생각도 조금은 하고 있었고.

솔직히 이것 때문에 수도에 올 때 필요했던 짐이 2배가 되었는데, 써먹지 못하고 그대로 가지고 돌아가면 너무 아쉬울 것 같았는데....

지금 공개하면 딱 타이밍이 좋을 것 같네.

"그 패턴은 스승님이 매번 그리시는 게 아닙니다. 같은 패턴은 한 번만 그려두고 계속 재활용하는 것이죠."

"재활용한다고? 그림을?"

"별개의 그림을 하나의 도구로써 사용하는 겁니다."

거기까지 말한 내가 꺼낸 것은 스크린톤 용으로 만들어 놓은 패턴 용지였다.

물론 이게 원본은 아니고 복사로 만든 사본이지만, 사본이나 원본이나 스크린톤의 내용이 바뀌는 것은 아니니까.

하여튼 오늘 남은 마지막 목표는 이 스크린톤 기법을 상용화하는 것이었다.

"이건...?"

"잘 살펴보시면 익숙한 패턴들이 있을 겁니다."

"허...."

"같은 패턴은 여러 번 그릴 필요가 없이, 이걸 그대로 가져다 사용하는 거죠."

"하지만 이건 다른 그림인데 어떻게 저기로...."

내가 직접 복사기를 통해 사용하는 걸 보여주자, 그는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렇게 작업했다면, 순수하게 패턴을 다 그리는 것보단 빠르겠군."

"스승님은 이걸 직접 만든 붓 같은 그림 도구의 일종으로 여기는 것 같았습니다."

"그림이 그림을 그리는 도구가 될 수 있다니, 정말 상상도 못 했던 발상이라서 어렵군...."

이 부분은 아무리 새로운 것에 친화적이고 도전적이었던 그에게도 당황스러운 분야였는지.

살짝 고민에 빠진 듯한 모습이 전해져 오고 있었다.

저런 모습은 또 처음 봐서 그런지 나름대로 신선한 느낌이네.

"그래서 스승님은 자신이 만든 스크린톤을 전부 무료로 공개하시겠다고 하셨어요."

"뭐?"

"레퍼런스로 사용되었으면 좋겠다고 하시던데요?"

"무료로 사용할 수 있게 한다? 자기가 그린 그림을?"

"네. 누구든 스크린톤을 싼 가격에 구매하면 거기 그려진 패턴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요. 물론 스승님의 것으로 스크린톤의 종류가 부족한 경우, 누구나 스크린톤을 만들어서 만든 사람 본인이 설정한 적정가에 판매할 수 있는 시스템도 마련이 되면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허허, 진짜 당황스럽군."

그는 진심으로 놀라서 허탈한 웃음을 흘렸다.

자신의 그림이라고 볼 수 있는 스크린톤을, 도구라는 이름으로 다른 사람에 쓸 수 있게 허용해준다는 마인드 자체가 이해가 가지 않는 것으로 보였다.

하긴 이게 쉽게 먹히는 게 이상....

"나도 꽤나 이 방면에서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다만. 자네 스승은 한 수 더 높은 경지에 있구먼. 이대로 질 수 없는 부분이지, 진행하겠네."

"정말입니까?"

"그래, 어떤 화가가 이렇게나 진심으로 그림계에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걸 막아서면 내가 너무 나쁜 놈이 되지 않겠는가?"

"...예?"

변화를 위한 진심이라니 그건 또 무슨 미친 소리야?

나는 그냥 다른 사람들이 만든 스크린톤을 날로 먹으려고 공유하는 분위기를 만들려 했던 건데?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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