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6화 (16/229)

〈 16화 〉 3권 ­ 화신강림(5)

* * *

"오랜만.... 까지는 아닌가요? 하여튼 잘 지내셨어요?"

"아, 그럼요. 시우님은 잘 지내시던가요?"

"잘 지내니까 저한테 또 심부름을 보낸 거겠죠. 생각보다 너무 빨리 온 건 아닌가 싶은데, 아직 준비가 덜 끝났죠?"

"아뇨. 딱 맞게 오셨어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더니, 내가 예전에 요청했던 것과 굉장히 닮은 자그마한 책을 꺼냈다.

확실히 분량 때문에 얇은 느낌이 있긴 해도, 분명하게 만화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다.

일단 겉보기에는 내가 원하던 모습 그대로네.

"오, 재질 진짜 괜찮네요. 이러면 단가 괜찮아요?"

"적당한 가격에서 결정했어요. 어차피 겉표지 가격 생각하면 너무 싸게 만들어도 문제가 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이거 용지가 얼마죠?"

아무리 마법이 발달했다고 해도 그렇지, 현대의 갱지 정도의 품질을 기대했었다.

실제로 내가 이 세계의 서점에서 본 책들도 대부분 그 정도의 품질을 가지고 있었고.

근데 이건 거의 현대에서 쓰이던 책 용지에 근접한 수준 같은데?

엄청 하얗고 촉감도 잘 손상되지 않을 것처럼 마감이 잘되어 있었다.

그래서 진심으로 가격이 걱정되어서 물었지만, 이 정도 품질 차이라면 감당할 수 있을 만큼의 차이만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초기 만화는 귀족이나 경제적으로 여유로운 사람들 위주로 팔려나갈 거다.

이건 내가 겉표지에 컬러를 넣겠다는 고집을 꺾지 않는 이상 어쩔 수 없을 텐데, 그런 경우에는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는 정도네.

"이렇게 퀄리티를 신경 써서 찍어낸 책인데도, 비용으로 따지면 겉표지랑 비슷한 수준이라니. 기분이 좀 묘하네요."

"컬러는 단가가 장난이 아니니까요. 어쩔 수 없죠."

일단 책의 마감이나 품질은 굉장히 훌륭했다.

심지어 내가 이야기했었던 것들이 전부 다 들어가 있다는 점이 감격스러웠다.

그리고 순서나 인쇄 부분에서 문제가 있는 부분들도 전혀 없었고.

사실상 이건 이대로 판매해도 되는 수준의 만화책인데?

"말씀하셨던 것처럼 책 하단에 페이지 수 표기했고요. 앞부분에는 이번이 몇 번째 인쇄인지, 그리고 이번에 몇 개를 인쇄했는지까지 적어놓았습니다."

"다 확인했습니다. 테스트 인쇄라서 0쇄 10부라고 되어 있는 거죠?"

"네, 실제로도 10개 정도만 인쇄했어요. 어떤가요?"

"괜찮네요. 이대로 진행하면 될 것 같아요. 이거 하나는 제가 그냥 가져가도 괜찮을까요?"

"네, 당연하죠. 시우님 보여드리셔야 하잖아요."

"아하하...."

자꾸 그 설정을 까먹고 대화해서 큰일이다.

그다음으로는 겉표지의 시제품이었는데, 이것도 역시 굉장히 마음에 드는 품질이었다.

애초부터 이건 사용하는 종이와 잉크 자체가 고급 명작의 사본을 만드는 용도라서 나쁠 수가 없지.

"네, 이제 그걸 이거로 대체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스승님이 완성하셨습니다."

"아, 이게 표지용으로 리터칭 된 그림이군요?"

"맞습니다. 아마 화신강림의 전시 쪽에 사용하던 것도 이것으로 대체하시면 될 것 같아요."

"알겠습니다. 이거로 최대한 빨리 새 샘플 뽑아 볼게요."

"저는 그럼 기다리면서 구경 좀 할게요."

저번에 한 달 만에 그렇게 많이 바뀌었던 걸 생각하면, 요 며칠 동안도 꽤나 달라진 부분이 있을 것 같았고.

과연 화신강림은 어느 정도의 추천수 추이를 보이고 있을까 싶기도 했다.

하, 이게 인터넷처럼 실시간으로 순위 확인이 되는 시스템이 아니라서 불편하긴 하네.

그 대신 직접 올 때마다 두근거리는 느낌도 분명 있다는 점은 장점이긴 하지만.

"어라, 론도 교수님...?"

"어, 오랜만입니다. 잘 지내셨나요?"

"저야 뭐 스승님이 하라는 일하면서 구르고 있죠."

엄청나게 올라간 추천수를 보며 감개무량해서 가슴을 부여잡고 있는데.

화신강림의 전시관에서 나오는 익숙한 얼굴이 보여서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그러자 그녀는 웃으면서 나에게 다가와 인사를 건넸다.

"하, 저걸 이제야 확인하네요. 이걸 혼자서 먼저 보고 알려주지 않았다니, 이기적인 노친네 같으니라고...."

"아, 모르셨군요?"

"아마 그 인간 딴에는 제가 강의 들어가랴 마법 연구하랴 바쁘니까 배려한답시고 그런 거겠지만요. 드디어 그리고 있던 그림이 완성되어서 전시하러 와봤더니, 신작이 있어서 진짜 깜짝 놀랐습니다."

"신작이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론도 교수님의 작품이라면 정말로 기대가 되는데?

솔직히 내가 이곳에 와서 가장 감탄하면서 봤던 작품 중 하나가 론도 교수님의 '문 안의 세계'였다.

과연 이번엔 어떤 그림을 그리셨으려나?

"기대되네요. 개인적으로 론도 교수님 작품을 좋아하거든요."

"...그렇습니까?"

"네. 특히 '문 안의 세계'는 진짜 엄청났다고 생각해요."

"크흠.... 정작 그 그림보다 더 대단한 게 나오지 않았습니까."

"그렇다고 론도 교수님 작품의 가치가 떨어지는 건 아니니까요."

그녀는 내 말을 듣더니 확실히 그렇긴 하다며 고개를 끄덕였고.

자신의 신작을 보여주겠다며 그 작품이 전시된 전시관으로 나를 안내하기 시작했다.

"오늘 전시관을 둘러보니까, 제가 주제를 잘 설정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어떤 주제인데요?"

"일단은 이종족이네요. 가능하면 다른 사람들이 고르지 않을 것 같은 그림을 그리고 싶어서 고른 주제죠. 뭐, 제가 이종족이라서 이런 생각을 했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런데 실제로 대부분은 인간을 그렸더라고요? 그래서 제 그림이 꽤나 눈에 띄겠구나 싶었어요."

그렇게 들어서는 대체 어떤 작품을 그렸는지가 전혀 예상이 가지 않았다.

혹시나 해서 화풍에 관한 이야기를 떠봤는데, 그녀도 역시나 이번 그림은 만화체로 그린 모양이었다.

이거 진짜 거의 역병 수준이네....

"다른 주제는 없어요?"

"전쟁이요."

"전쟁? 아, 그러고 보면 저번 작품에서도 비슷한 표현이 있었죠."

"제가 뭐 종족 전쟁의 시대를 살던 사람은 아니지만, 워낙 부모님들에게 들은 게 많아서요. 그때의 그런 끔찍하던 순간을 강하게 데포르메한 화풍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어떤 것이 나올까 궁금했어요."

물론 처음부터 전쟁을 그리려고 했던 것은 아니었고.

인간이 아니라 엘프를 비롯한 이종족들을 메인으로 포커싱한 작품을 그리려고 결정한 뒤, 적당한 소재를 찾다가 나온 것이 바로 과거 종족 전쟁 시절을 그려내는 것이었다고 한다.

생각해보면 지금은 종족들끼리 별문제 없이 지내지만, 예전에는 대륙이 종족 전쟁으로 온통 불바다이던 시절도 있었댔지?

"이겁니다."

"어...?"

별생각 없이 눈앞에 전시된 그림을 본 순간, 너무 깜짝 놀라서 숨이 멎을 뻔했다.

확실히 그녀가 그린 이번 신작은 만화체로 그려져 있었다.

심지어 본래 그녀가 사용하던 깔끔한 채색 방식을 사용한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엄청나게 두텁고 거친 표현으로 그렸는데.

그 강렬한 묘사가 마치 눈을 강간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일단 처음 그림을 보는 순간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오크'다.

이 세계의 엘프가 일반적인 판타지 세상의 상식과 마찬가지로, 귀가 길고 숲속에서 자기들끼리 모여서 장생하는 특이한 종족이었던 것처럼.

오크는 수명은 짧지만, 번식과 초기 성장이 빠르고 우락부락한 신체와 커다란 이빨을 지닌 터프하고 호전적인 종족이라고 알고 있었다.

일단은 그녀가 표현하려고 한 것이 오크라고 단번에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오크라는 종족의 특징이 잘 살아있는 그림이었다.

심지어 그 오크가 그림에서 빠져나올 것처럼 역동적인 분위기가 잘 살아 있었다.

굉장히 비현실적인 색채로 칠해졌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당장이라도 살아 움직일 것만 같다.

당장이라도 무기를 들고 앞으로 뛰쳐나갈 것 같은 강렬한 인상의 오크는, 그 커다란 손으로 한 엘프의 목을 붙잡아 바닥에 고정하고 있었다.

아주 가녀리면서 반짝이는 외모를 보이는 여자 엘프가 이리저리 찢어진 옷을 쥔 채로 오크에게 붙잡혀 있다.

찢어진 옷 사이로 드러나는 노출로 인한 신체의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찢어진 옷들이 지금 흩날리고 있는 것만 같은 역동감은 절로 숨을 죽이게 했다.

"이게, 미친...."

자신의 음습한 성욕을 해결할 생각에 역겨운 웃음을 짓는 오크의 표정은, 오크 특유의 호전적인 외모가 가져다주는 간지와 충돌하고 뒤섞이면서 강렬한 인상을 주고 있었고.

자신을 붙잡은 오크를 두려워하면서도, 엘프의 긍지를 위해 그런 감정을 최대한 숨기며 이를 악무는 엘프의 표정이 굉장히 애처롭다.

심지어 그 둘 다 전쟁으로 찌들어서 생겨난 피곤함과 고통의 흔적이 디테일하게 남아 있다는 것까지, 그림에서 전해지는 강렬하고 찐득한 감정과 감각이 머릿속을 잠시해 나간다.

특히 커다란 오크의 성기는 세세한 핏줄과 섬세한 주름의 표현 때문에, 당장이라도 맥동하면서 살아 움직일 것 같아서인지 그림을 관람하는 나조차 징그럽게 느껴질 정도였고.

그 성기에 짓눌린 자그마한 엘프의 여체가 대비되면서 전해지는 폭력적인 묘사가 무서울 정도로 뇌리에 각인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그림 내에 표현된 핏자국들은 마치 실제 피를 발라 놓은 것처럼 아주 사실적인 질감으로 표현되어 있어서 섬뜩하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 그림이 전해주는 그런 모든 감동을 어떻게든 소화하고 나면, 미친 퀄리티의 배경이 2차로 정신을 때려 부순다.

전쟁터 한가운데의 시체가 널려있는 그 공간에서, 승리한 오크들이 패배한 엘프들을 유린하고 있는 그 상황이.

마치 역사의 한 가운데에 들어온 것만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아니, 어...."

"괜찮으세요?"

"그, 론도님?"

"네?"

"...혹시 이거 사본 하나만 살 수 없을까요?"

나는 내 자지가 너무 심하게 발기한 탓에 강렬한 통증을 느끼면서도.

어떻게든 전해야만 하는 한마디의 말을 그녀에게 건넸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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