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20화 (20/229)

〈 20화 〉 4권 ­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4)

* * *

"생각보다 좀 길어졌네. 근데 자꾸 에피소드가 떠올라서 추가하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나는 목표였던 200장 전후를 훌쩍 넘어간 원고를 보면서 머리를 긁적였다.

솔직히 임산부 섹스도 그렇고, 굉장히 사실적으로 그려버린 출산씬도 그렇고.

여러모로 폭주했던 파트가 많았던 작품이라서 조금 걱정이 되긴 했다.

전체적인 분위기야 굉장히 밝은 느낌이지만, 야한 부분을 진심으로 파고 들어가서인지 떡씬 파트가 엄청 음습하게 나왔다.

근데 그렇게 해야지 진짜 제대로 꼴리는 건데, 그걸 포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잖아?

그리고 감정 묘사 같은 부분에서 역겨울 수 있는 부분을 제거해서, 최대한 행복하고 따뜻한 느낌만 남겼으니까 괜찮을 것 같기도 해.

'솔직히 잘 참고 있었는데, 그 그림이 준 자극이 너무 강했지.'

론도 교수님의 '백광'을 접한 나는 진짜 광기에 휩싸인 것처럼 이번 작품을 그려버린 느낌이다.

내가 저 그림에 자지를 지배당한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의 자지를 지배하는 만화를 그리고 싶다는 욕심이 생길 수밖에 없다고 해야 하나?

솔직히 이건 론도 교수님이, 아니 그녀가 그린 백광이 너무 꼴리는 것이 잘못한 거다.

나는 억울해.

"진짜로 엄청나게 늘어났네요...."

"혹시 아직도 일이 많이 밀려 있나요?"

"아뇨. 슬슬 안정화되고 있고, 대기열도 미리 잡아놨으니까 샘플은 바로 제작 들어갈 수 있을 거예요. 와, 근데 역시 시우님 그림은 예쁘네요."

이번에 표지로 작업한 그림을 본 그녀가 감탄을 내뱉었다.

엄청난 것은 없고, 그냥 굉장히 곤란해하는 오크와 변태 같은 표정을 한 엘프가 그려진 표지다.

다만 잘 보면 엘프의 가랑이가 애액으로 축축하게 젖어있다거나, 그것이 다리를 타고 흘러내린다거나 하는 디테일을 살려서 야함을 추가한 형태를 하고 있다.

이번 표지의 주제는 노출이 없는데도 야한 분위기가 느껴지는 거였으니, 굉장히 내가 원하던 느낌으로 결과물이 나왔다고 생각한다.

"그거 아세요? 이제 도서관이나 서점에도 화신강림이 납품되기 시작했다는 거?"

"...진짜요?"

"네, 물량이 좀 안정화되나 싶었더니, 그쪽 발주 때문에 또 한동안 고생했어요. 지금은 그것도 좀 해결이 된 상태지만요."

만화라는 새로운 그림 장르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데, 심지어 책이라는 형태 때문에 기존 소설 등 책이 가지고 있던 시장까지 잠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런 설명과 함께 판매 수익을 정산해주는데, 그 엄청난 금액을 보니까 점점 머리가 어지러워졌다.

솔직히 저번에 받은 것만 해도 내가 쓰기엔 충분한 수준이었는데....

오늘 받은 것 정도면 진짜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는 수준 아닌가?

"아, 그리고 지금 신규 만화들을 관람하는 공간이 생겼거든요? 한번 구경하실래요?"

"아, 그거 좋죠."

어차피 내 작품의 샘플이 나오는 동안 기다려야 하는데, 그 시간 동안 할 것도 딱히 없으니까.

이번에 수도에 있는 동안은 다른 작가들이 그린 만화를 구경하는 걸로 할까?

"일단 전에 질문드렸던 거 있잖아요? 그걸 토대로 디자인을 많이 변경했어요. 작품 표지가 크게 전시된 장소에 샘플을 쌓아놓는 식이죠."

"오.... 주변에 의자가 있는 것도 꽤 괜찮네요. 기본적으로 분위기도 좋고."

긴 시간을 관람해야 하니까 마련한 방식인데, 꽤 괜찮은 느낌으로 완성되고 있었다.

솔직히 미술관이라기보다는 도서관에 가까운 비주얼이긴 하지만, 그래도 새로운 만화를 발굴할 때는 이만한 방식이 없을 거다.

이건 진짜 유지해줘서 고마운 부분이었다.

"여기는 전부 출판 시작이 되지 않은 것들만 쌓아서 전시하는 곳이고. 며칠 시간이 주어지는 동안 추천을 못 받으면 내려가요."

"최소 유지 시간이 늘었네요?"

"일반 그림과 비교해 평가가 느릴 수밖에 없는 구조잖아요? 그걸 고려해서 평가 기준을 다 뜯어고쳤다고 해요."

그리고 여기서 검증된 작품들은 다음 전시관으로 이동하고, 그 전시관에 있는 제품들은 모두 책으로 판매가 되기 시작한다.

그래서 그럼 내가 신작을 내는 것도 공평하게 맨 아래에서부터 시작해야 하는 것 아닌가 싶었지만.

현재 다른 작품이 최상위권에 있다면, 후속작도 어느 정도 전시관 보정이 들어간다고 말했다.

그래서 나는 시작부터 생산해도 문제가 없는 식으로 결정이 되었단다.

"오.... 그럼, 생각보다 1쇄는 금방 만나볼 수 있겠네요?"

"그렇죠? 아마 초반에 엄청난 물량이 몰릴 거라고 예상해서, 최대한 빨리 생산할 생각이에요. 미리 대비도 해놨는데, 생각보다 분량이 많아서 조금 시간이 걸릴 것 같기는 하네요."

그 뒤로는 다른 작가들이 그린 신작 만화를 확인하기 시작했는데.

진짜 그림부터 전부 다 엉망에 가까운 작품도 있었지만, 거의 완벽하게 만화책에 도달한 작품도 존재했다.

다만 그 작품도 결국 추천을 누르진 못했던 것이 스토리가 너무 어지러웠기 때문이다.

"그냥 좀 재미없는 정도면, 이 그림 퀄리티면 그림 때문이라도 재밌을 텐데. 그냥 이해가 가지 않을 정도로 난해하네...."

그냥 화풍만 바꾸면 따라갈 수 있었던 씹덕 그림체의 일러스트와 다르게, 만화는 이런 스토리 전개를 해본 적 자체가 없는 화가들이 익숙해질 시간이 필요할 것 같긴 했다.

그래도 만화를 그리는 기술 자체는 나와 거의 같아졌다는 점이 아주 신기하네.

여기 사람들은 그림 그리는 방식에 새로 적응하는 속도가 되게 빠른 것 같아.

결국 나는 단 하나의 작품도 추천을 누르지 못하고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그냥 얌전히 숙소에 가서 내 작품의 샘플이 나오는 거나 기다려야겠다.

"오...!"

그리고 실제로 나온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의 샘플은 아주 괜찮았다.

원래 평균 200장 정도를 생각하며 만든 규격이라, 좀 오버한 분량으로 문제가 생기진 않을까 싶었는데.

여전히 보는 데 전혀 문제가 없는 수준이라서 안심할 수 있는 수준이네.

이제 이 작품이 시장에서 어떤 평가를 받느냐만 남았군.

"어떻게 생각하세요? 확인 때문에 읽어보셨죠?"

"아, 엄청 재미있었어요! 솔직히 오크라고 하면 성욕의 화신이나 강간 같은 것만 생각하는데, 사실 실제로 요즘 오크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긴 하더라고요. 내가 되게 편협하게 역사적인 사건만 생각하면서 종족을 판단했다는 생각도 들고...."

아니, 그냥 평소에 우리가 생각하던 오크랑 엘프의 이미지랑 다르다는 걸 강조할 생각일 뿐이었는데, 무슨 인식이 바뀌는 계기가 된다는 거야.

나는 묻고 싶었던 부분이 그 파트가 아니라면서 은근슬쩍 야한 장면에 대해서 의견을 물어봤다.

처음에는 살짝 부끄러워하더니, 솔직히 조금 동경하게 되는 연애 이야기였다는 말을 했다.

시발 연애 이야기를 물어보려고 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섹스하는 장면이 어떻냐고 직접 물어보기도 좀 그렇고....

"아, 죄송해요. 일이 계속 생기네요."

"아뇨. 어쩔 수 없죠. 저는 그럼 이제 돌아가 보면 되죠?"

"넵! 최대한 빨리 생산해서 판매 시작하도록 할게요!"

일도 끝났으니까 돌아가서 다음 작품이나 준비해야지.

이번에는 완전히 신작을 그렸으니까, 다음 작품은 화신강림의 후속작이라도 그려볼까?

솔직히 화신강림이 워낙 얇게 뽑아서, 좀 빨리 후속작을 내줘야 할 것 같다는 느낌이 있긴 했다.

전작이 너무 맛보기만 하는 수준이었어.

'따라서 이번 신작의 이름은....'

화신정열.

이 시리즈의 주인공인 알베도가 제대로 침식과 싸우기 시작하는 이야기를 다룬다.

당연히 혼자 싸우는 것이 아니라 다른 동료들도 많이 생기게 되고, 그 동료들과 함께 침식과 싸우는 것이 스토리의 주요 포인트.

이번에는 그 동료들과의 일상을 메인으로 잡고, 침식과의 전투는 어디까지나 서브로 집어넣어 볼 생각이었다.

"응?"

대충 이번 신작의 설정을 잡고, 가볍게 스케치라도 해보고 있던 도중이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서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부모님이면 굳이 저러지 않고 바로 들어오셨을 테고, 다른 사람이라면....

"미친, 로자리아!?"

워낙 만화를 그리는 것에 빠져서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는데, 벌써 여름 방학이 시작되는 시기가 된 것이었다.

이건 진짜 전혀 예상을 못 하고 있었는데?

이거 대응을 어떻게 해야 하지?

사실 처음에야 가문에 그림을 그린다는 사실을 들키기 싫었던 것과 순수하게 그림으로 인정받고 싶어서 ‘시우’라는 가명을 사용했지만.

지금은 왠지 ‘시우’라는 이름을 무슨 대마법사나 거장처럼 취급하는 느낌이라, 대마법사는커녕 허접한 마법조차 사용할 줄 모르는 ‘칼리’가 동일 인물이라는 것을 밝히기가 너무 무섭게 변해 있었다.

물론 친한 사람들에겐 밝혀도 괜찮을 수도 있고, 특히 가문에게는 이걸 언젠간 밝혀야겠지만....

당장 로자리아와의 관계조차 우왕좌왕하고 있는 나에겐 벌써 터트리기에 너무나 부담되는 건이었다.

'우, 우선 그림 그렸던 것들부터 다 치워서 숨겨놓자.'

내 상황을 그녀에게 밝힐지 말지는 나중에 고민하더라도, 일단 그 선택지에서 고민하려면 숨기는 것이 우선이니까.

급하게 스케치나 메모, 폐기 원고 등을 정리해서 창고 구석에 박고 문을 잠가버렸다.

다행히 로자리아는 내가 자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생각보다 긴 주기로 문을 두드리며 기다려주고 있었고.

덕분에 어떻게든 물건을 다 숨길 수 있었다.

"아하하, 로자리아 어서 와."

"칼리이이...!"

거의 울먹이듯 나에게 뛰어든 로자리아가 난리를 치면서 나를 탐닉하기 시작했다.

리아야 아무리 내가 좋아도 그렇지, 그렇게 몸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굉장히 창피해지는데?

그렇다고 거의 반년 만에 날 봤다고 행복해 미치려는 그녀에게 그렇게 말할 수도 없어서, 나는 그냥 얌전히 그녀가 만족할 때까지 기다려주기 시작했다.

"진짜, 진짜.... 보고 싶어서 죽는 줄 알았어."

"나도 보고 싶었어."

"헤헤, 그나저나 진짜 그림 그렸었나 보네? 집에서 미미하게 유화 냄새가 배어있어."

"어? 어, 그랬지."

그렇게 말한 로자리아는 여기도 되게 오랜만이라면서 신나서 돌아다녔고, 나는 설마 하는 마음으로 그녀를 따라다니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런데 그 와중에 진짜로 내가 미처 치우지 못한 그림 하나가 존재했고, 나는 급하게 그걸 숨기려고 했지만.

바로 로자리아에게 들켜서 빼앗기고 말았다.

'아, 시발.'

...이세계 반년 차.

소꿉친구에게 집에 있던 야짤 걸린 썰 푼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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