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화 〉 5권 머리가 꽃밭인 세상(1)
* * *
"후, 생각보다 몰래 하려니까 힘들긴 하네."
로자리아는 방학이 시작하자마자 내가 지내는 별장에 눌러 붙어버렸다.
사실 그거야 항상 있었던 일이니까 신기한 것도 없는 일이지만, 일단 로자리아에게 내가 '시우'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렸다는 게 문제가 된다.
신작을 그릴 때마다 그녀가 보지 못하도록 몰래몰래 작업해야 했으니까.
사실 이 정도로 불편하면 그냥 말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는데....
하필이면 신작인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를 보고는 얘도 물들어서, 거기 나오는 대사 같은 걸 따라 하기 시작한 걸 보고 포기하기로 했다.
시발 내가 그걸 그렸다는 거 들키는 순간 바로 덮쳐질 것 같아.
"칼리?"
"일어났어?"
"으응.... 헤헤, 칼리 품속에 안겨 있으니까 자궁이 두근거려...."
"그것 좀 하지 말라니까?"
"이거 되게 로맨틱하지 않아? 심장도 아니고 자궁이 두근거린다니!"
나는 섹드립이랍시고 적어놨던 변태 엘프의 대사였는데, 의외로 저게 로맨틱하다면서 써먹고 있어서 여러모로 정신이 어지러웠다.
아니 대체 어떻게 자궁이 두근거린다는 말이 로맨틱하게 들릴 수 있지?
내가 이상한 건가?
"아니면, 정말 두근거리도록 자지 넣어서 이리저리 휘저어 줄 거야?"
"제발 그만해...."
이번엔 장난스러운 표정인 걸 보니까 그냥 일부러 장난을 친 모양이었다.
내가 이세계의 섹드립 수준을 너무 올려놓은 것이 아닐까 싶어서 걱정될 정도네.
물론 작품이 인기를 끌고 잘 되는 건 다행인 일인데, 뭔가 내가 생각했던 유행을 타는 것과 이 세상의 유행을 타는 건 많은 차이가 있는 모양이었다.
특히 이상할 정도로 과몰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중이었다.
작품 맨 앞에 이 이야기는 모두 픽션이라는 말을 적어놔야 하나 싶을 정도야.
그 와중에 전작인 '화신강림'보다 더 평이 좋다는 말도 많던데....
정말로 결과가 어떤지는 오늘 가서 결과를 들어보면 확실하게 알 수 있을 거다.
오랜만에 로자리아가 일이 있다길래, 나 혼자서 전시관에 다녀올 생각이었으니까.
"아, 맞다. 나 그림 그린 것 좀 봐줘."
"어, 응."
그리고 로자리아의 경우에는 지금 SD 그림체에 관한 연구를 굉장히 많이 하는 중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스케치였지만, 이제는 선을 무사히 따기 시작했고.
내가 기초를 알려준 디테일 살리는 법과 스크린톤도 점차 익숙해지는 중이었다.
"근데 내가 알려주는 게 진짜로 좋아? 나처럼 별로 아는 것도 없는 그림 초보한테 배워도...."
"아니야 칼리. 오히려 칼리 네가 알려줘서 더 즐겁게 할 수 있었어."
"그래?"
"응, 그리고 칼리 알려주는 거 되게 잘해!"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일단 네가 천재라서 잘 알아먹는 건 확실해.
근데 내가 알려주면 더 즐겁게 할 수 있다는 건 무슨 의미지?
내가 알려주는 거라면 공부조차 즐길 수 있다는 애정 표현인가?
"오, 근데 진짜 많이 늘었다."
아마 조금만 더 연습하면 단색으로 그려지는 SD 캐릭터만큼은 완벽하게 해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채색 부분도 연습하는 편이 좋긴 하겠지만.
정작 그녀는 채색보다는 어떻게 해야 좀 재미있는 만화를 그릴 수 있는지 연구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만화 스토리랑 콘티 짜는 능력은 꽤 괜찮았지.'
아직 미흡한 점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처음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로 그럴듯한 스토리를 만들어냈다.
아마 조금만 더 안정화가 되고 나면 진짜로 괜찮은 SD 만화를 그려낼 수 있지 않을까?
근데 컬러를 절대로 그리지 않으려고 한다는 점이 문제네....
'컬러 표지를 없애볼까?'
이 부분도 유통이나 전시에서 문제가 없는지 오늘 가서 물어봐야겠네.
어차피 로자리아가 노리고 있는 만화의 방향성은 귀여운 일상물 분위기인 것 같던데.
만약 그렇다면 아예 종이의 품질까지 내리고, 표지도 단색으로 해서 단가를 최대한 낮출 수 있다.
그러면 표지에 채색하지 않아도 별문제가 없으면서 경쟁력도 갖출 텐데....
"오늘 집에 다녀온다고 했었지?"
"응, 내가 난리를 쳐놔서 방학 내내 여기서 지내도 된다고 하시긴 했는데.... 그래도 들리긴 해야 하니까."
"그건 맞지."
로자리아는 금방 본가로 떠났고, 나는 수도로 향했다.
오랜만에 들어선 전시관은 확실히 분위기가 많이 바뀌어 있다는 것이 느껴지는 상태였다.
전체적으로 안정화가 많이 되었다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아, 안녕하세요!"
"되게 오랜만에 왔네요. 요즘 전시관 분위기는 어때요?"
"시우 화가님 작품 말고도 다른 만화도 판매를 시작해서인지, 은근 사람이 몰리고 있어요."
"그래요?"
"네, 원래 그림을 관람하지 않던 사람도 좀 더 유입되는 느낌이네요. 좋은 분위기에요."
마법사들만 득실득실 고여있던 장소가, 만화를 보려는 일반인으로 인해서 조금 다른 분위기가 되고 있다는 거다.
확실히 만화는 기존 일반적인 그림보다 다양한 사람이 즐길만한 컨텐츠지.
제대로 시장이 크고 있는 느낌이라서 소식을 듣자마자 되게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가장 많이 팔리는 건 여전히 마법사 쪽인 것 같긴 하지만요."
"그래요?"
"요즘 마법사들 단체란 단체에선 다 시우님 만화 때문에 시끄러울걸요? 유행어도 엄청나게 생기고 있어요."
"...그렇군요."
대체 어떤 유행어가 퍼져나가고 있는지는 슬슬 알고 싶지 않아질 정도였다.
아, 물론 재밌으라고 적어 놓은 대사들이라서 고마워해야 하는 부분은 맞는데.
요즘 로자리아가 자꾸 그거로 날 괴롭혀서 PTSD가 올 것 같았다.
"와, 근데 신작이 진짜 빠르네요."
"아무래도 두꺼워서 그런 것 같기도 해요. 가격 차이가 있긴 하지만, 분량 차이에 비하면 적은 수준이니까요."
"아무래도 입문에는 가성비가 좋아 보이는 걸 사게 된다는 거네요."
나는 대부분 이쪽 취미를 마법사들이 이용한다고 생각해서 그럴 일은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까 마법사라고 해서 전부 부자는 아니겠구나.
적당한 수준의 마법사는 당연히 돈도 평범하게 벌 테니까.
"그래서 요즘 조금 시끄러워요."
"시끄럽다고요?"
"이번 신작에 나오는 오크 같은 남자 없냐고 난리거든요."
"아...."
확실히 매력적인 캐릭터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당연히 성격을 말하는 줄 알았는데, 그냥 오크 전체에 대한 수요가 올라갔다는 말을 듣고 입이 떡 벌어졌다.
내 만화 하나 때문에 거의 배척받던 오크들이 신랑감으로 평가가 올라갔다고?
"성격도 성격이지만, 그 우락부락한 몸이나 우람한, 아.... 크흠 죄송합니다. 그리고 꼭 오크가 좋다기보다는 오크도 괜찮겠구나 싶은 분위기가 되고 있어요."
"그럴, 수도 있군요."
그리고 오래 지난 일이긴 하지만, 종족 전쟁 때문에라도 오크에는 '강간하는 종족'이라는 오명이 강하게 있었는데.
이제는 오크들이 그러지 않고 얌전히 살아가는데도 그 이미지가 잘 벗겨지지 않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게 최소 마법사들 한정으로는 변하고 있다는 것.
"...이 만화 하나로요?"
"네, 아마 시우님은 이걸 다 예상하고 이런 만화를 그린 거겠죠?"
그럴 리가 있냐고.
그냥 오크랑 엘프가 떡치는 그림 그리고 싶어서 시작한 만화인데?
그게 시발 왜 그런 식으로 떡상하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는데요?
사실 여기는 죄다 머리가 꽃밭으로 되어있는 세상인 건가?
"근데, 그게 그렇게 공감이 되나요...?"
"당연하죠. 그렇게 엘프랑 오크가 반대에 부딪히고 힘들어하는데.... 그때 진짜 조금이지만 울었다니까요?"
"아...."
시발 그냥 과몰입 때문에 생기고 있는 일이었잖아?
마치 '앞으로 오크와 하프 오크에 대한 모함을 금지한다. 그 모든 적대 행위를 나에 대한 것으로 간주한다.'라고 하는 느낌으로 일이 커지는 중이었다.
하긴 원래 작품에서 주인공들에 독자들이 몰입하면 이러한 일이 생기기 마련이긴 하지.
"아, 그리고 마지막에 나오는 하프 오크! 너무 귀여워요.... 송곳니 살짝 튀어나와서 앙증맞지 않아요?"
"그건 그렇죠."
생각해보면 아이는 축복이라는 이 세상의 주류 감성도 영향이 있었을 거다.
아무리 하프가 그 축복을 악용한 쓰레기 짓으로 유명하다지만, 이미 지난 그 일 때문에 아무런 잘못 없는 축복을 욕한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거부감을 자극해준 셈이다.
이렇게 생각하니까 이해가 되긴 하는데, 여전히 예상 이상의 여파라서 당황스럽긴 하네.
'오히려 야한 장면에 대해서는 엄청 조용해서 신기하고.'
가장 논란이 될까 봐 무서웠던 것 중 하나가 바로 너무 야한 장면을 대놓고 보여주는 만화라는 것이었는데.
이 세상은 나이에 따른 구매 제한도 없는데도 아무런 논란이 생기지 않는 중이었다.
왜 시발 야한 만화가 음란물이라면서 핍박받지 않는 거지?
뭔가 이상해.
"아, 이번에 드려야 할 대금 가져올게요. 여기서 잠시만 기다리세요."
"네."
그렇게 돈을 가지러 갔던 직원은 이상하게도 여자애 하나를 몸에 매달고 돌아왔다.
무슨 일인가 싶어서 그 여자애를 바라보는데, 엘프 특유의 커다란 귀와 분홍색 포니테일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그다음으로 보인 것은 그녀가 걸을 때마다 심하게 흔들리는 커다란 맘마통이었고, 마지막으로 보인 것은 나를 진지하게 바라보는 그녀의 녹색 눈동자였다.
"저, 저기. 혹시 당신이 시우 화가님의 제자인가요?"
"에?"
나는 깜짝 놀라서 직원 쪽을 바라봤지만, 직원은 어쩔 수 없었다는 듯이 고개를 이리저리 저었다.
엄청 막무가내로 난리를 쳐서 어쩔 수 없었다며 사과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녀의 옷이 잔뜩 찢어져 있는 걸 보고 용서해주기로 했다.
이미 저 정도로 괴롭힘을 당했는데 나까지 괴롭힐 맘이 들지는 않으니까.
"그렇다면? 너는 누구야?"
"이, 이거!"
"응...?"
엘프 소녀는 나에게 고개를 푹 숙이면서 묘하게 러브레터에 가까운 디자인의 편지를 내밀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가 가지 않아서 멍하니 그녀를 바라보는데, 그녀는 굉장히 간절한 목소리로 다음 말을 이어갔다.
"이, 이거! 시우 화가님한테 전해주세요!"
나는 얼떨결에 그녀가 건네주는 편지를 받았는데, 그녀는 내가 편지를 받았다는 사실이 기쁜지 함박웃음을 지었고.
그 순간 그녀의 작은 송곳니에 빛이 부딪히면서 산란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