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5화 〉 5권 머리가 꽃밭인 세상(4)
* * *
"아...."
처음 책을 읽을 때는, 그림이 있어서 이해하기도 편하고 재밌다고 생각하는 것이 전부였다.
특히 엄마가 말해줬던 아빠와의 젊은 시절 이야기들이 그대로 풀어진 것 같은 내용이라서, 미묘하게 다르거나 비슷한 부분을 비교하면서 읽는 재미가 쏠쏠했으니까.
하지만 엘프와 오크가 서로 사랑을 확인하고, 주변인들의 시선과 싸우는 내용이 나왔을 때부터는 가슴이 꽉 조여드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사실 모르는 척했지만, 아빠가 주변에서 항상 괴롭힘을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오늘 오크나 하프 오크가 주변에서 좋지 않은 취급을 받는다는 말에 가슴이 철렁했다.
아, 나는 태어날 때부터 주변에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구나.
그래, 그건 어쩔 수 없는 거겠지.
하지만 내심으로는 그게 너무 억울했다.
우리는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는데, 엄마랑 아빠는 서로 사랑해서 나를 낳았고 우리 가정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는데.
그래서 더 고집을 부리면서까지 도시에 나가고 싶다는 소원을 이뤘던 것도 있었다.
"다행이다."
그래도 이 책에 있는 엘프와 오크도 우리 엄마와 아빠처럼 무사히 결혼하게 되었다.
아침에 엄마한테 들었던 아이를 낳게 해달라는 기도를 할 때, 정말로 책에서는 행하면서 둘은 행복한 표정이 되는 것을 보고.
나도 저런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마침내 책의 마지막에서 하프 소녀가 하나 태어나서 귀엽게 웃는 것을 확인하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나왔다.
"계시나요?"
그때 갑자기 문을 똑똑 두드리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까 나에게 이 책을 건네줬던 소녀의 목소린데?
내가 방문을 열었더니, 왠지 음식 같은 걸 잔뜩 짊어진 그녀가 안으로 들어와서 그것들을 내려놓았다.
"이거 선물이에요. 이 여관에서 가장 맛있다고 유명한 저녁 세트랍니다?"
"이, 이건...?"
"제가 쏘는 거예요! 같이 먹어요. 아, 제가 좀 막무가내였나요? 헤헤, 하프 오크를 실제로 만났다고 생각하니까 좀 폭주했나 봐요."
"...이거, 대체 뭔가요?"
"만화책이요?"
"만화...?"
그녀는 나에게 그림으로 이야기를 만든 책을 만화책으로 부른다고 설명해줬다.
음, 그런 설명을 듣고 싶은 건 아니었는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그녀는 대충 내가 하고 싶은 말을 깨달았는지 알아서 설명을 해줬다.
"시우라는 유명한 화가가 그린 만화에요. 원래 그림을 좋아하던 마법사들 사이에서는 엄청나게 유행하고 있고, 최근에 수도처럼 큰 지역에는 서점에서도 팔면서 엄청 인기를 끌고 있을걸요?"
"그, 그럼?"
"아, 읽어 보셨나 보네. 맞아요. 저도 그 책을 읽고 오크랑 하프 오크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거든요. 아마 시우님은 그걸 노리고 이 만화를 그리지 않았을까요?"
"아...."
시우라는 그 화가는 오크와 오크의 밑에서 나온 하프들이 어떤 취급을 받는지 잘 알고 있었던 거다.
그래서 되게 사실적인 이 이야기를 많은 사람이 알고 공감하게 해서, 더는 잘못된 눈으로 바라보지 않도록 하고 싶었다는 것.
전혀 모르는 사람인데도 그 사람의 따뜻한 마음씨가 그대로 전해져 오는 것 같아서, 왠지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아마 그래서 주인공 부부의 이름도 따로 설정하지 않고 '오크'랑 '엘프'였던 거 아닐까요? 아마 딸 이름도 '하프'인 것 같던데."
"헤에...."
"아, 이건 조금 조심스러울 수도 있는 질문인데요. 혹시 이 만화에 나오는 거랑 실제 오크 엘프 가정은 되게 달라요?"
"아뇨! 되게 비슷해요! 처음에는 우리 엄마랑 아빠 이야기랑 너무 비슷해서 깜짝 놀랐을 정도예요."
"오, 진짜로요!? 진짜로 요즘 오크들은 그렇게 멋지구나...."
"맞아요. 우리 아빠 멋있어요!"
후후, 우리 아빠의 멋짐을 알아줄 수 있는 사람들이 생겼다니.
정말 이 책은 여러모로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알기론 하프 오크를 좋아하지 않는 분위기는, 긴 전쟁으로 생긴 감정의 골이라서 설득하기 쉽지 않다고 알고 있었는데.
그걸 이 책 한 권으로 해결해낸 사람이 있다니.
그리고 내 앞에서 웃으며 음식을 권하는 이 사람도, 이 책 덕분에 나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이라니.
"처음에는 되게, 놀랐어요."
"아, 죄송해요. 제가 너무 막무가내였죠?"
"그게 아니라, 하프 오크라는 거 들키면 안 된다고 생각했거든요. 엄마도 신신당부했었고."
"그건.... 제가 좀 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어야 했는데."
"아니에요. 이렇게 말 걸어주셔서 많은 걸 알려주시고, 이렇게 저녁도 사주셨잖아요? 오히려 제가 고맙죠."
그 뒤로 그녀는 수도에서 구경할만한 것들을 소개해주거나, 맛집을 알려주는 등.
나를 엄청 많이 도와주고 이끌어줬다.
심지어 엄마처럼 여기는 가면 안 된다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고 싶다고 하면 같이 가서 설명해주는 엄청난 친절함까지!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그리고 여행 도중에 만났던 수도의 많은 사람은, 정말로 그 책으로 인식이 바뀌어서 나를 환영해줬고.
오히려 이제까지 그런 시선 때문에 힘들지 않았냐며 보듬어 주는 착한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차별받으면 무섭다거나 하는 생각이 많아 사라졌다.
예전에는 아빠를 괴롭혔던 일부 엘프나 다른 종족의 사람들 때문에 정말로 그런 상황이 떠올라서 무섭게 느껴졌는데.
이제는 그런 사람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서인지, 정말 그런 상황을 만나더라도 괜찮을 것 같았다.
"이번엔 정말로 고마웠어요!"
"예, 오르카. 나중에 기회가 되면 저희가 다시 만날 일이 있겠죠."
"네! 그날을 기대하고 있을게요!"
그렇게 그녀 덕분에 내 생일 선물이었던 수도를 혼자서 여행하기 프로젝트는 성공리에 막을 내렸다.
나는 그녀가 선물해준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를 들고 기분 좋게 집으로 돌아갔고.
내가 오자마자 걱정했다는 듯 안아주시는 엄마 아빠를 보고 웃음을 터트렸다.
"엄마, 아빠! 나, 마법사 하고 싶어!"
"응? 갑자기?"
"이거, 이거 읽어 봐! 요즘 유명한 화가인 시우라는 사람이 그린 건데...!"
나도 그런 만화라는 걸 그리고 싶다.
그렇게 해서 누군가를 지금의 나처럼 행복하게 해주고 싶다.
무언가를 그렇게 일로써 하고 싶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게 된 순간이었다.
다만....
"이건, 무리네. 미안하다. 이런 부분은 엄마를 닮았어도 될 텐데."
"히잉...."
그렇게 마법과 그림의 연습을 시작했지만, 전혀 괜찮은 그림을 그리지 못했다.
그림을 그리기는커녕, 펜으로 종이를 찢어먹지 않으면 다행인 수준이었다.
나 그럼 만화는 못 그리는 건가?
"아니면 오르카, 조금 다르게 생각해 보면 어떨까?"
"다르게...?"
"이 그림을 그린 사람은 엄청난 마법사라고 했지? 하지만 싸울 때는 항상 마법사의 곁을 지키는 기사도 있어야 하거든."
"기사...."
"그럼 그런 멋진 만화를 그려주는 사람을 지키는 기사를 한다면, 그 만화를 그리는 것에 도움이 되지 않을까?"
"그럴지도!"
다행히 나는 아빠를 닮아서 신체 능력도 좋은 편이었고, 몸을 움직이는 것은 자신이 있었다.
실제로 아빠에게 간단하게 배운 결과, 아빠는 확실히 재능이 있다면서 칭찬해주셨다.
그럼 내가 그 만화를 그린 시우 화가님의 기사가 되어서 지켜주면 되겠지?
나는 검술에서 성공할 가능성을 보자마자, 바로 그 시우 화가님에게 편지를 썼다.
내가 당신의 검이 되겠다고, 당신을 지키겠다고, 당신을 위해서라면 내 인생을 바치겠노라고.
예전에 들었던 멋있는 말들을 잔뜩 적어서, 평소에 엄마나 아빠의 생일에도 쓰지 않던 이쁜 편지지에 담았다.
"다녀오겠습니다!"
"잠시만, 오르카!?"
편지를 든 나는 일단 막무가내로 수도에 찾아갔다.
저번에 들었던 것에 따르면, 이 책은 수도에서 엄청나게 유행하고 있다고 했었지.
그럼 그 책을 파는 시우님도 이 수도에 있지 않겠어?
"저, 저기. 이 만화요. 혹시 화가분을 어디서 만날 수 있을지 알 수 있을까요?"
대부분은 자신도 모른다며 그냥 고개를 젓고 떠나갔다.
하지만 어떤 친절한 언니가, 이런 그림이나 만화는 전시관이라는 곳에 가면 운이 좋다면 만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줬고.
나는 그것을 듣자마자 전시관이라는 곳을 찾아갔다.
"우와...."
그 안에는 정말 많은 그림과 만화책이 전시되어 있었고.
거기서 열심히 그림을 주고받으며 이야기를 나누는 화가 같은 사람들도 눈에 들어왔다.
여기라면, 여기라면 분명 시우 화가님도 있지 않을까?
"저, 저기.... 혹시 이 만화를 그린 시우 화가님은 만날 수 없나요?"
"죄송합니다. 시우 화가님의 경우에는 정보가 비공개되어 있어서요."
"아, 그런가요...."
직원분을 붙잡고 물어봤지만, 알려줄 수 없다는 답만 돌아올 뿐이었다.
결국 여기까지 와서도 시우 화가님은 찾을 수 없는 모양이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돌아가는 것도 아쉬워서, 나는 여기 전시된 커다란 표지 그림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왠지 이쪽을 열심히 살피는 한 남자와 아까 나에게 안내를 했던 직원이 눈에 들어왔고.
그 둘이서 하는 대화가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와 관련된 내용인 것을 넘어.
그것의 판매량이나 여파에 관해 설명하는 것임을 훔쳐 듣게 되었다.
그걸 들은 나는 혹시 저 남자가 시우 화가님은 아닐까 싶었고.
그 직원이 남자분과 떨어지는 순간, 직원에게 달라붙어서 저 사람이 시우 화가님이지 않냐며 난리를 치기 시작했다.
"이, 이러시면 곤란해요. 저희도 규칙은 규칙인지라 그런 정보는...."
"그럼 저 지금 저분한테 시우 화가님이라고 크게 소리치면서 부를 거예요!"
"아니, 저분은 시우님이 아니라...."
결국 그녀는 포기하고 나에게 그가 시우 화가님의 제자라는 것을 알려줬다.
나는 처음에는 그가 시우 화가님이 아니라는 것에 조금 실망했지만, 잠시 다시 생각해 본 뒤로는 실망하기만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저분이 시우 화가님의 제자라면, 편지를 전해달라고 부탁하면 되는 거잖아!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