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26화 (26/229)

〈 26화 〉 5권 ­ 머리가 꽃밭인 세상(5)

* * *

'하프 오크...? 그것도 엘프의?'

갑자기 거유 엘프 미소녀가 달려와서 러브레터 비슷한 걸 건네주는 것도 이상한데.

그게 하필이면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에 나오는 딸인 '하프'와 마찬가지로 하프 오크라니?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상황 속에서, 최근에 하프 오크와 오크에 대한 배척이 사라져 가고 있다던 말이 떠올랐다.

설마 그것 때문에 고맙다고 팬레터 비슷한 게 온 건가?

확실히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상황이 설명되긴 하겠네.

"이, 이게 뭔데?"

"그, 그건.... 안돼요! 시우님만 아셔야 해요! 그러니까 절대로 편지 미리 열어보시면 안 돼요!"

"아, 알았어. 스승님에게 그대로 전해드리면 되는 거지?"

"네!"

그러더니 되게 밝은 얼굴로 뛰어다니면서 전시관 밖으로 나갔다.

저렇게 뛰면 가슴이 출렁거려서 너무 눈에 띌 텐데, 정작 본인은 저게 신경도 쓰이지 않는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죄송해요. 이미 어느 정도 관계자인 걸 깨달으셨는지, 난동을 피우셔서 어쩌다 보니...."

"이미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죠. 다음부터는 조심해주세요."

"명심하겠습니다."

갑작스러운 상황 때문에 내가 뭘 하려고 여기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아서, 한숨을 쉬고 있는데.

직원분이 나에게 이번 작품의 대금을 전해주신 다음에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차기작의 판매나 전시 방법에 대해서 내 아이디어가 실현 가능한지 물어볼 생각이었지?

"대금 확인했습니다. 근데 스승님이 후속작 판매 때문에 질문드리라고 했던 것들이 좀 있어요."

"굉장히 바로바로 신작을 그리시네요. 아마 많은 분이 기뻐하겠어요."

"아, 후속작이라는 건 그냥 신작을 의미하는 건 아닙니다."

"네?"

"화신강림에서 이어지는 다음 만화를 그리고 계십니다.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와 비슷하게 분량을 길게 해서요."

"진짜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래서 이번 판매가 일반적이지 않아서 물어볼 것이 있었던 것이라 답했다.

왜냐면 이번에는 '사전 주문', '예약 주문'으로 불리는 형태를 시험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건 내가 혼자 하고 싶다고 되는 것이 아니라 판매처인 전시관과 합의가 되어야 하는 부분이잖아?

그래서 원고가 완성되기 이전인 지금부터 와서 괜찮은지 물어보고 있는 거다.

"그러니까, 미리 신작을 구매하고 싶은 분들은 돈을 내고 만화를 예약한다는 거죠? 유명 음식점에서 방문 시간을 예약하듯이?"

"맞아요. 그래서 완성된 작품을 공개하는 시점에서 예약한 분들 모두에게 물량을 드리는 거죠."

물론 그 이외의 물량도 따로 판매하겠지만, 기존에 예약한 사람은 무조건 첫날 작품을 가질 수 있게 되는 거다.

사실 전시한다고 해도 만화의 특성상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다 보면 한참이 걸리고, 그렇다고 구매하는 것도 매번 물량이 부족했을 거 아니야?

첫날부터 나를 찾아줄 만한 충성 독자들이 확실하게 만화를 볼 수 있게 해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좋은 판매 방식이었다.

"그럼 1쇄의 물량도 어느 정도 뽑아야 할지 예상하기 좋아지죠. 그렇지 않나요?"

"물량 부족 때문에 화내는 분들이 줄어들긴 하겠네요. 다만 그럼 작품이 공개되는 시기가 늦어질 텐데 괜찮나요?"

"이런 판매 방식 자체도 작품 일부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런 문제점들이 해결되기 전까지는 여전히 작품이 완성된 것이 아니라고...."

"좋은 말이네요. 아, 하지만 예약을 받으려면 전시를 해야 할 것 같은데...."

아예 안된다는 것이 아니라, 예약을 받으려면 그 예약과 관련된 전시품이 있어야 한다는 식이었다.

그런 거라면 내가 해둔 준비로 완벽하게 대응할 수 있는 수준이네.

나는 미리 준비했던 그림 하나를 꺼내서 그녀에게 보여줬다.

"이거 확인하시겠어요?"

"이건...?"

"스승님이 이번에 그린 그림입니다. 화신강림에 등장했던 인물인 '니그레도'가 유화로 채색되어 그려져 있습니다."

화신강림의 주인공인 알베도와 처음 만났던 화신체, 니그레도를 몽환적으로 그려낸 그림이다.

그녀의 심적 특성을 검게 불타는 머리카락으로 표현한 것이 특징이고.

화신강림에 주요 인물로 등장하면서, 화신정열에도 큰 비중을 차지하는 주요 인물이니까 이거만 한 예약용 전시품은 없을 거라 판단했다.

"이건 신작의 표지로 쓰일 그림인가요? 죄송합니다. 저번에 규칙이 좀 조정되어서, 한 번 전시된 걸 만화 표지로 사용해서 다시 전시하는 건...."

"아닙니다. 이건 그냥 단독 그림이에요. 화신정열의 표지는 따로 그리실 예정입니다."

"네!? 정말요?"

"대신 이건 이번에 사전 예약을 진행한 분들에게만 작게 사본을 만들어서, 책갈피로 사용할 수 있도록 선물로 드리는 겁니다. 어떻습니까?"

사전 예약 한정 프로모 카드!

이 세상에도 한정 수량만 사본을 만들어서 판매하는 전략이 있는 만큼, 이게 어떤 것을 의미하는지는 그녀도 잘 알고 있을 거다.

당연히 저것 때문에 인쇄 비용이 늘어나겠지만, 카드 형태로 크기를 줄여서 최대한 생산 비용을 낮추면 해볼 만한 방법이 되겠지.

"엄청난데요!? 이렇게 예쁜 그림을 이번 기회가 아니면 얻을 수 없다니.... 아마 난리가 나지 않을까 싶어요."

"가능하면 전국의 전시관에서 모두 예약을 받으면 좋겠다고도 하시더라고요."

"물론 그래야죠. 한정된 사본인 만큼, 그런 부분에서 제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시끄러워질 테니까요."

아,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을 잊고 있었는데.

사전 예약에는 작은 조건을 달아볼 생각이었다.

"아, 그리고 스승님은 예약하려면 무조건 '포장이 뜯어진 화신강림'을 가졌는지 확인하고 진행해달라고 하시네요. 있으면 그것을 사용해 예약했다고 확인 도장도 찍어서, 중복으로 사용할 수도 없도록 하고요."

"하지만 그럼 만약 화신강림의 물량이 없으면 예약을 못 하는 상황이 오지 않을까요?"

"물량이 없다면 화신강림까지 함께 금액을 내서 예약하게 하면 될 것 같아요. 당일에 두 개를 함께 받을 수 있게 해주는 거죠."

"아, 알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은 왜...?"

"그것까지는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들은 그대로 말씀드린 거라서요."

그야 판매점들이 예약 물량을 잔뜩 쌓아놔서 프로모 카드를 되팔이하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프로모 카드를 구하려면 그 개수만큼 화신강림까지 추가로 구매해야 하니, 굉장한 비용적 압박이 생기도록 해서 포기하게 만드는 거지.

아예 막는 건 어렵겠지만 이 정도 방비는 해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아마 그건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아, 그리고 이건 이번 스승님 신작이랑은 관계가 없는 이야기인데요. 혹시 현재 시스템으로 겉표지가 없는 작품도 전시할 수 있어요?"

"어, 그럴 거예요. 대신 아무래도 표지가 단색이면 눈에 덜 띄지 않을까요?"

'확실히 그럴지도 모르지.'

만약에 그런 만화가 여럿이었다면 컬러에 비해서 확 밀렸을 거다.

근데 지금 만화 대부분은 다 컬러 표지를 만드는 식으로 진행을 하고 있잖아?

그렇다면 혼자서 단색 표지인 그림은 오히려 눈에 띄게 될 거다.

"그렇게 전부 단색으로 만든 책을, 용짓값도 좀 아껴서 완전히 저렴하게 만들면 어느 정도 단가가 나올까요?"

"음 아마...."

확실히 엄청나게 싸다.

그 정도면 일반적으로 나오는 저렴한 책이랑 비슷한 가격에 팔 수 있겠는데?

그리고 저렴한 종이라도 SD의 특성상 그다지 티가 나지 않는 느낌이 있을 테니, 실질적인 퀄리티 저하도 거의 없는 편일 것 같고.

괜찮은데?

"아, 이건 그냥 제가 개인적으로 물어본 겁니다. 스승님 아니어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 맞죠?"

"네, 추천수만 일정 이상을 받으면 그 방식으로 제작할 수 있을 거예요."

이건 애초에 내가 쓸 것이 아니라 로자리아가 써먹을 수 있는지 궁금해서 확인한 것이니까.

하여튼 이 정도면 오늘 들어야 하는 답은 다 들은 셈이었다.

생각보다 아무런 충돌 없이 이야기가 잘 진행된 느낌이네.

"끄으응, 그래서 대체 이 편지는 뭘까?"

나는 별장에 돌아오자마자, 아까 하프 오크로 추정되는 엘프 소녀가 줬던 편지를 확인했다.

시우 화가님에게 전해달라고 했던 걸 보면, 이번 작품에 대한 팬레터 비슷한 것 같은데.

뭔가 내가 의도하지 않은 결과로 이루어진 상황이긴 해도, 이런 걸 받으니까 기분이 묘하네.

"...응?"

내가 예상한 것은 분명 작품 덕분에 많은 오해가 풀렸다던가, 정말 고맙다던가 그런 말을 전해주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아무리 읽어봐도 그런 내용은 거의 없고, 불안정한 글씨체로 당황스러운 문장만 몇 개 적혀 있을 뿐이었다.

아무리 봐도 팬레터는 아닌 느낌인데...?

"당신의 검이 되겠습니다. 당신을 지키겠습니다. 당신에게 제 인생을 바치겠습니다...?"

나는 너무 당황해서 편지를 열심히 뒤져보면서 숨겨진 말이라도 있나 찾아봤지만.

아무리 봐도 중요한 내용은 저것 말고는 전혀 없는 느낌이었다.

아니, 이건 팬레터보다는 러브레터에 가까운 거 같은데...?

아무리 내가 이 세상보다는 현대의 감성에 더 익숙하다곤 해도,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평범한 팬래터가 아니었다.

고마움이나 존경을 표하는 걸 넘어서 인생을 바치겠다니?

그제야 편지지의 디자인이 굉장히 예쁘장한 것이, 러브레터에 가깝다는 것이 더 눈에 띄었다.

"만화 하나만 보고 나한테 고백을 했다는 거야? 얼굴도 모르고 아무것도 모르는 대상한테?"

심지어 그 답변을 받을 생각조차 없는지, 자신이 편지를 받을 수 있는 주소 같은 것은 물론이고 이름조차 적혀 있지 않았다.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건지 잘 모르겠다.

내가 당신을 사랑해서 당신을 위해 자신을 바쳐 지키는 검이 될 거라고?

하지만 거기 당신의 생각 자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건가?

"이, 이건 좀 무섭네."

솔직히 그녀가 미소녀 하프 엘프라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무서워서 편지를 보자마자 꼭꼭 숨어버릴 만한 내용이었다.

안 그래도 나한테 집착하는 미친 새끼한테 당한 경력이 있어서 더 그렇고.

아니, 사실 어지간하면 미소녀라도 스토커는 좀 사양인데...?

"어우, 모르겠다. 계속 보고 있으니까 점점 더 무섭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편지를 서랍 구석에 봉인해 버렸다.

내 시야에서 사라져라, 이 악마적 존재야!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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