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화 〉 6권 화신정열(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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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저나 칼리는 오늘도 방 안에 틀어박혀 있네."
그래도 얼마 전까지는 내가 그리는 만화에 대해서 같이 이야기도 나누고, 어떤 방향이 좋을지 함께 고민도 해줬었는데.
지금은 대체 뭘 하는지 나올 생각을 하지 않고 나랑 놀아주지도 않았다.
하긴 칼리가 언제는 안 그랬나, 지금 이 만화나 완성해서 의견 묻는 식으로 이야기 나누는 게 낫겠지.
전에 그런 일도 있었는데 굳이 억지로 놀아달라고 하고 싶지는 않았다.
"아, 또 딴생각 했다.... 빨리 그림이나 그려야지."
만화를 그린다고 작업을 시작했는데, 자꾸 머릿속에 칼리 생각만 떠올라서 집중되질 않았다.
하긴 내가 지금 그리는 만화에 나오는 남자 등장인물인 '우유'가 칼리를 모티브로 따온 검술 캐릭터고, 여자 주인공인 '딸기'가 나를 모티브로 따온 마법사 캐릭터니까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에 이 사실을 말했더니, 칼리는 모티브로 쓰는 건 좋은데 그림의 분위기상 너무 폭주하면 작품이 망가질 수 있다고 조심하라는 말을 했었지.
그, 그건 우리 둘이 이어지는 만화 이야기가 이리저리 팔려나가는 정도야, 나를 위해서 당연히 감수할 수 있다는 거겠지?
그래서 그 만화를 망칠 가능성부터 걱정해준 거겠지?
헤헤 칼리도 참.
"아, 여기서는 칼리.... 아, 칼리가 아니라 우유가 좀 더 약하게 그려져야겠지?"
주인공인 딸기는 재능이 좋다고 평가받는 마법부 학생이고, 기본적으로는 마법부 친구들과의 일상 이야기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다만 계속해서 검술부의 우유라는 평범한 남자애와 부딪히게 되고, 실력도 없으면서 굉장히 까칠한 그의 모습에 딸기는 어이없어한다.
심지어 실력도 없는 주제에 사사건건 껴드는 모습은 무모해 보이는 거고.
"헤헤, 하지만 그게 좋은 거라니까...."
하지만 정작 딸기는 자신의 실수로 인해 큰 위험에 빠지게 되고, 아무도 구하러 오지 않아서 절망하고 있을 때 우유가 구해주게 된다.
그때 굉장히 망가진 상태로 다행이라며 한숨을 내쉬는 우유의 모습에 반해버린 딸기의 사랑 이야기를 담은 만화다.
제목은 딸기의 빨강과 우유의 흰색이 섞인 색감을 표현하고 싶어서, '핑크빛 일기장'이라고 지었다.
기본적으로는 작고 귀엽게 등장인물을 그리지만, 방금 설명한 것 같은 진지한 부분에서는 크고 멋지게 그리면 느낌이 있다고 칼리가 조언해줬고.
이런 파트도 잘 그리기 위해 그림 연습을 따로 하고 있었다.
어차피 만화 대부분은 작은 애들로 진행할 테니, 큰 버전은 오래 걸리더라도 한 장을 멋지게 그릴 수 있으면 충분하다고 했었지?
"으음, 생각이 나니까 더 아쉽네."
칼리도 우리 아카데미에 입학할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이제 칼리는 아예 검술을 포기한 듯했으니까, 우리 아카데미에 들어오는 것은 불가능해졌다고 봐야 할 터다.
사실 그래서 이 만화의 설정을 평범하게 아카데미에서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딸기와 우유의 사랑이라는 관계를 주요 초점에 잡은 것이기도 하다.
이렇게 나도 아카데미에서 칼리에 대한 사랑을 꿈꾸면서, 그 행동 때문에 친구들한테 쓴소리나 부럽다는 말도 듣고 싶었다는 망상이 담긴 만화란 소리다.
뭐, 칼리도 꼭 현실적인 이야기나 현실을 옮기는 게 아니라 내가 보고 싶었던 걸 그리는 것이 좋다고 했지만....
근데 칼리는 만화를 그린 적도 없는데 왜 이렇게 만화에 대해 잘 아는 거지?
사실 방 안에 숨어서 맨날 신작 만화 쌓아놓고 혼자 보는 거 아니야?
'그런 거라면 나도 좀 보여주지.'
물론 어디까지나 정말 그럴 때의 이야기지만, 나중에 떠보듯이 그런 거라면 보여달라는 말을 해봐야겠다.
칼리가 만화에 대해 굉장히 잘 아는 거 보면, 멋진 만화를 많이 알려주지 않을까?
솔직히 나는 만화라는 게 나오기 시작할 때, 아카데미 안에만 있었으니 잘 알 턱이 없었다.
시우 화가의 작품만 신나서 읽었을 뿐이지 다른 건 잘 모른단 말이야.
"근데 이렇게 내가 생각한 망상, 아니 이야기를 그리니까 재밌긴 하네."
칼리는 내가 자연스럽게 사람들이 재밌어할 만한 부분을 찾아서 건드려준다고 그 특유의 재능이 좋다고 말했는데.
나는 그게 재능이 좋아서인지, 노림수가 잘 통해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나라도 재밌을 것 같다 싶은 장면들을 일부러 연출시키는 식으로 만들고 있는데.
꼭 공을 들인 부분은 칼리가 칭찬해주는 걸 보면, 내가 잘 그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나저나 여기서 더 재밌어지려면 우유랑 딸기가 더 오해가 깊어져야 하는데...."
일단 딸기는 우유에게 좋다고 달라붙고, 우유는 대체 얘가 왜 나를 좋다고 하는지 이해하지 못해서 무서워한다.
그렇게 다른 서로 다른 생각 때문에 충돌하는 장면들이 굉장히 재밌고.
가끔 우유 특유의 별 생각 없이 해주는 행동에 딸기가 기뻐하고 더 사랑에 빠지는 것도 심장이 두근거려서 되게 좋다.
근데 이게 재미 요소로는 좋은데, 너무 짝사랑 느낌으로만 가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저런 분위기를 의도하지만, 후반부에서 갑자기 주인공이 우유로 바뀌면서 상황이 바뀌는 식으로 이야기를 설정한 거고.
'사실 우유는 약한 게 아니라, 힘을 숨기고 있다는 설정...!'
하지만 그것에 대해 언급해서는 절대 안 되도록 제한이 되어 있다.
그래서 엄청난 위험에 노려지고 있는 딸기를 매번 몰래 구해주지만, 당연히 그에 대해서 딸기는 모를 테니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는다.
하지만 딸기는 이상할 정도로 항상 자신을 좋아해 주고 사랑해줬고, 그 모습에서 특별함을 느껴 사랑에 빠지게 된다.
우유도 딸기를 좋아하지만, 자신이 좋아하는 상대라는 것이 알려지면 딸기도 위험할까 봐 마음을 숨기는 식으로 가는 거지.
이렇게 하면 아마 둘 다 서로 사랑하지만, 그 사랑을 한쪽이 표현하지 못해서 재밌는 상황을 계속 연출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이건 칼리가 나한테 잘 대해주긴 해도, 정말로 나를 좋아하는 건 아닐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만들게 된 설정이긴 했다.
물론, 그 사실은 절대로 칼리에게 말하지 못하겠지만 말이다.
"음, 오늘은 여기까지 할까? 슬슬 저녁 준비를...."
아, 그 전에 일단 몸부터 씻고 생각해야지.
아무래도 여름이라 그런지 땀이 많이 흘러서, 슬슬 씻어야 할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리고 슬슬 여기도 제모해야 하네."
몸을 씻어내기 시작하려는 순간, 성기 주변에 있는 털이 자라난 것이 눈에 띄었다.
원래 이런 털들의 경우, 그냥 자라게 내버려 두는 편이었지만.
아카데미에 있을 때, 다들 '화신강림'을 읽으면서 여기를 밀어서 매끈매끈하게 만드는 유행이 퍼지면서 다들 밀어버리기 시작했다.
나도 아카데미에서는 귀찮다고 하지 않았지만, 방학이 시작된 이후로는 주기적으로 밀어서 정리하고 있었다.
왜냐면 지금 나는 칼리랑 같이 동거하는 중이잖아?
어쩌다가 칼리에게 여기를 보였을 때, 털 없이 깔끔하고 매끈한 모습을 보여주고 싶거든.
솔직히 이게 시우 화가가 괜히 털이 없도록 그린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내가 느끼기에도 이 매끈매끈한 느낌이 아무래도 더 예쁘다는 생각이 들거든.
인간 기준으로는 이게 평범하지 않아서 그런가?
'원래 엘프가 여기 털이 없다고 했지? 그건 부럽네. 매번 정돈하기 귀찮은데.'
하긴 비슷해질 방법이 존재라도 하는 게 어디냐며, 나는 마법을 사용해서 털을 제거하기 시작했다.
모든 털을 제거한 뒤에 몸을 깔끔하게 씻고 나오는데, 제모가 끝난 성기가 아주 보드랍고 미끈거리는 게 느낌이 괜찮았다.
뭔가 내가 엘프의 하프 비슷한 게 된 느낌이라서 묘한 기분이 든다고 할까?
"좋아, 머리 모양도 완벽하고."
몸과 머리카락에 남아 있는 물기를 모두 말린 뒤에는, 빗질로 머리카락을 정돈한 다음 평소처럼 끈으로 묶어서 형태를 고정해줬다.
거울을 보면서 혹시 부족한 것이 있나 살폈지만, 별문제가 없어서 편한 마음으로 밖에 나왔다.
그리고 나오자마자 요리를 하려다가, 아직은 시간이 좀 이르다는 것을 발견했다.
"너무 일찍 씻었나? 지금 저녁을 준비하면 너무 빠를 것 같긴 한데...."
그럼 지금은 좀 쉬다가, 혹시 칼리가 빨리 나오면 뭐 먹고 싶냐고 물어보고 요리해야겠다.
나는 아까 그려놨던 만화를 다시 확인하면서 이상한 점이 있는지 살폈고.
조금 더 나은 재미를 줄 수 있을 것 같은 아이디어나 의도하지 않았던 문제들을 전부 메모했다.
"와, 근데 칼리도 진짜 지독하네. 이쯤 되면 밖에 나와서 내 얼굴 한번 봐줘야 하는 거 아니야? 저녁 먹자고 지금부터 미리 불러버리고 싶네."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으니, 나는 앞치마를 두르면서 요리의 준비를 시작하려고 했다.
하긴 다시는 칼리를 보지 못하게 될 뻔했던 적도 있는데, 식사라도 매번 같이 먹는 인생이면 행복한 거지.
이 정도면 충분히 감사해야 하는 수준일지도 모르겠다.
"음, 근데 진짜 뭘 하길래. 요즘 계속 저러는 걸까?"
요리하면서도 계속 신경이 쓰여서, 결국 요리를 중단하고 집 안을 천천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생각해보면 최근에 계속 나한테 뭔가를 숨기는 듯한 느낌이 들었었지.
물론 대부분은 지금 칼리가 들어가 있는 방 안에 있겠지만, 잘 찾아본다면 그가 놓치고 치우지 못한 것 정도는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솔직히 저번 사건이 있었던 만큼 당장 저 방에 들어가서 압박하기는 좀 그랬고.
요즘 그가 뭘 하는지를 몰래 알아내는 정도면 만족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솔직히 칼리를 괴롭히는 것도 아니니까 괜찮은 수준이잖아?
"응?"
별생각 없이 서랍 하나를 열어보고 있었는데, 그 구석에 어울리지 않는 종이 하나가 눈에 띄었고.
꺼내 봤더니 뭔가 귀여운 느낌의 고급 편지였다.
일반적으로 이렇게 여성스러운 편지지는 좋아하는 남자한테 사랑을 속삭일 때 사용하지 않나...?
"에, 이거 설마? 아니겠지?"
나 말고 다른 여자애가 칼리를 사랑해서 편지를 보냈고, 칼리는 혹시 나한테 편지를 들킬까 봐 이 서랍에 숨겨둔 건가?
그렇게 생각하니까 갑자기 가슴이 턱하고 막히면서 답답한 감각이 찾아왔다.
아닐 거야, 그냥 디자인이 이럴 뿐이지 그냥 평범한 내용의 편지겠지.
그렇게 최대한 희망적인 생각을 하면서 편지를 읽어보기 시작했고....
"이, 이이이익!"
나는 '당신에게 제 인생을 바치겠습니다.'라는 누가 봐도 고백인 내용을 읽자마자 기절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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