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화 〉 6권 화신정열(5)
* * *
마치 내가 녹아버리고 사라지는 느낌이다.
칼리의 자지가 내 안을 비집고 들어와서 헤집어 놓을 때마다, 내 신체 위에 칼리를 덧칠해서 리터칭 당하는 듯한 무서운 감각이 찾아오고.
몸이 찌르르 울리는 행복감이 뇌리를 잠식할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야한 목소리를 내뱉고 만다.
만화에서 봤던 오크와 엘프가 관계를 맺던 장면에서 엘프가 행복해했던 것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맺어지고, 아이를 만든다는 행위가 이렇게나 기분 좋은 거였다니.
이번에 용기를 내서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흐아아아아앙♡"
"읏...!"
쿵! 쿵! 쿵!
마치 나를 부수겠다는 듯이 칼리의 자지가 머리끝까지 올라오며 나를 찍어누른다.
그 순간 이제까지 느껴본 적 없었던 향락의 파도가 나를 덮쳐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칼리를 껴안으면서 자궁에 정액을 받으려고 했던 팔과 다리가 마비되어 움직일 수가 없다.
이게, 이게 사랑하는 이의 자지에 지배당하는 암컷의 기분...?
순간적으로 만화에서 봤던 엘프의 독백이 떠오르면서, 공감을 넘어 그녀와 하나가 되는 듯한 착각을 일으킨다.
마치 자신이 사라지는 듯한 감각이 두려우면서도, 나를 그렇게까지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칼리라는 생각에 두려움은 지워지고 쾌감은 상승한다.
순간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할 정도로 강렬한 절정을 느끼느라 시야를 비롯한 아무런 기능도 정상적으로 작동하지 않았다.
"히, 히이...♡"
가까스로 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칼리가 나에게서 살짝 떨어져 있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분명 칼리가 마지막에 부르르 떨면서 정액을 사정할 것 같은 모습을 보이지 않았나?
그런데 왜 내 자궁에서는 여전히 평범한 두근거림만 있고 뜨겁고 찐득한 충족감이 느껴지지 않는 거지?
"에...?"
그리고 천천히 내 배 위에 질척거리며 달라붙어 있는 정액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본래라면 내 안에서 우리의 아기를 만들어 줘야 할 정액일 텐데, 왜 그게 여기 뿌려져 있어?
설마 내가 방금 가버리느라 정신없을 때 칼리가 일부러 자지를 빼고 여기다가 싼 거야...?
대체 왜?
예상치도 못한 방향으로 내가 생각했던 임신 계획이 망가지자, 나는 정신이 혼미해지기 시작했다.
정액을 이렇게 낭비한 칼리에게도 화가 났지만, 쾌감에 정신이 팔려서 알아차리지도 못한 나에게 더 화가 났다.
거기서 꽉 붙잡고 놔주지 않았어야지...!
"칼리, 이거...?"
"흐, 어쩌지. 리아, 왜 이렇게 예쁜 거야."
"에...?"
그래서 대체 왜 이렇게 된 거냐고 화내면서 따지려고 했는데, 갑자기 나에게 뽀뽀를 해주면서 너무 예쁘다고 하니까 할 말을 잃었다.
진짜 뭔가 화가 나서 뭐라고 하고 싶은데 저런 얼굴에 화를 낼 수도 없어서 가슴이 답답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지금도 아주 행복하긴 한데 내가 원했던 건 이런 결말이 아닌데?
"왜 그런 눈으로 봐? 아, 책임은 질 테니까 걱정하지 마."
"책임진다고?"
무슨 소리야, 내가 지금 아기를 가진 것도 아닌데 책임을 져주겠다고?
그제야 이 바보 멍청이가 왜 정액을 자궁에 때려 박지 않았는지 깨달았다.
그렇게 해서 내가 임신하면 추후 활동이 불편해질 테니, 그것은 배려하면서도 섹스는 했으니 나를 책임지겠다는 어처구니없는 칼리식 발상을 한 것이겠지.
"바보...."
"갑자기?"
내가 아마 여기서 설득한다고 해도, 어지간하면 나중에 결혼하고 나서 하자는 소리를 하겠지.
이건 내가 나중에 다시 진심으로 각을 잡아, 배란일에 질내사정을 유도해 받아내는 것 말고는 답이 없을 것 같았다.
그래도 나를 책임지기로 한 이상 칼리는 나를 최소 첩으로는 삼아줄 테니, 오늘은 그걸로 만족해야겠지?
"어, 왜 그래?"
"잠시만, 자지 가져와 봐."
나는 내 처녀혈로 엉망이 되어 있는 자지를 입에 물면서, 내 배 위에 있는 정액을 쓸어다가 그 위에 얹었다.
하얀색인 정액이 붉은 피와 섞이면서 분홍색으로 변하기 시작하고, 나는 그것을 빨아 먹으면서 그의 자지를 청소하기 시작했다.
엘프가 만화에서 오크한테 종종 해주던 자지 청소가 생각나서 해보는 중이었다.
피의 씁쓸한 맛과 정액의 묘하게 이상한 맛이 섞인 느낌이지만, 그것이 나와 칼리의 산물이라고 생각하니까 되게 맛있게 느껴졌다.
"우음, 자지 청소.... 쯉."
"윽!? 아니, 미친 그걸 왜.... 그건 그렇다 치고 정액은 왜 거기다 뿌린 거야!?"
"에헤헤, 내 딸기즙이랑 네 우유가 뒤섞인 딸기 우유를 마시고 싶어서?"
원래 딸기랑 우유는 이어지게 되어 있는 법이거든?
일단 내 만화에서는 그래.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섹스 이후로 로자리아는 좀 편안한 느낌을 되찾게 되었다.
예전에는 솔직히 좀 불안해하는 듯한 모습을 자주 보였는데, 내가 책임진다고 했던 것이 원인인지 지금은 되게 자신도 넘치고 밝아졌다.
혹시 그 이후로 어색해질까 봐 걱정했는데, 오히려 더 편해진 기분이라서 좀 신기했다.
"음, 확실히 좋은데? 특히 LD가 엄청나게 좋아져서 놀라울 정도야."
"스토리나 연출 문제는 없지?"
"응, 완벽해."
지금은 로자리아가 그리고 있던 만화의 초안이 완성되어서 구경하는 중이었다.
솔직히 처음 내가 생각했던 SD로만 가는 형태의 책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졌지만....
충분히 일상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최근 그녀의 LD 일러스트의 실력이 급상승해서인지 충분히 가능성이 있어 보였다.
다만 조금 걸리는 건 남자 주인공인 우유가 내 외모를 좀 많이 닮았다는 거랑.
여자 주인공인 딸기가 로자리아의 외모를 많이 닮았다는 정도?
뭐, 근데 그건 아무래도 로자리아가 나를 좋아하다 보니까 작품에 감정을 몰입하려면 어쩔 수 없었던 부분이지.
첫 작품이니까 거기까지 터치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해서 초기에 이것부터 허락해 줬던 기억이 났다.
"와 근데 이거 첫 번째 권의 마지막 맞지? 엄청 절묘하게 끊어놨네."
"이래야 다음 권도 구매하고 싶을 거잖아?"
내 경우에는 아직 절단마공을 남발하는 건 위험할 것 같아서 오히려 주의하고 있었는데.
이미 그걸 눈치채고 첫 작품부터 적용해버리는 사람이 있다는 게 놀랍네.
이 정도는 되어야 마법의 천재 소리를 듣는 건가?
근데 그림이면 몰라도 만화 스토리랑 그 재능이 관련 있지는 않은가?
"흠, 하여튼 재능이 있어."
생각해보면 어릴 때부터, 어떻게 해야 남들의 흥미를 유발하게 할 수 있는지를 잘 짚어내긴 했다.
꼭 흥미가 아니라 짜증이라던가, 그런 감정도 컨트롤 하는 작전에 능숙하다고 하나?
어릴 때, 굳이 할 생각 없던 체스 같은 것도 그녀랑 대화를 좀 하다 보면 어느새 같이 그거로 놀고 있고 그랬던 것이 떠올랐다.
그리고 당장 저번에 섹스한 것도 그녀가 굉장히 능숙하게 나를 유혹해서 그랬던 거잖아?
"그래서, 이대로 가면 될 것 같아?"
"크게 문제없다고 생각해. 굉장히 재밌는데?"
그림도 안정적이고, 스토리의 재미도 많은 만화를 읽어본 내가 인정할 수 있을 정도로 괜찮은 편이었다.
심지어 딸기의 친구들도 굉장히 캐릭터 성이 잘 살아있고 귀여웠던지라 흠잡을 부분이 없었다.
이 정도면 아마 전시하고 금방 출판이 결정이 날 수 있을 정도의 퀄리티다.
"그럼 전시할 겸 수도에 데이트 가자!"
"어, 그게...."
자칫 얘랑 같이 갔다가 알아보는 사람이라도 있으면 괜히 '시우'에 대한 걸 들키지 않으려나?
아니지, 어차피 나랑 같이 가는 건 데이트를 위해서니까 전시관만 혼자 다녀오라고 하면 될 것 같았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그래, 나도 뭐 사고 싶은 거 있었으니까. 내가 그거 사는 동안 전시 신청하고 오면 되겠다. 그다음에는 둘이서 실컷 놀고."
"그냥 둘 다 같이 가면 되지 않아?"
"나도 사생활이라는 게 있거든?"
"아, 방금 내 만화에 있는 대사랑 똑같아!"
생각해보니까 우유가 몰래 자기 일을 해야 할 때마다 하는 대사구나.
진짜 숨기는 게 있다는 점까지 저 만화의 주인공이랑 닮았네.
그래서 처음 이 만화를 볼 때는 사실은 로자리아가 내가 시우라는 걸 알고 있는 게 아닐까 싶었던 적도 있었다.
물론 지금 보면 아닌 것 같지만.
"이따 봐!"
"응, 내가 말해준 그대로 하자고 하는 거 잊지 말고."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여?"
"그런 건 아닌데...."
"그냥 걱정된다?"
"응."
"으휴...."
쪽.
그녀는 내 뺨을 살짝 꼬집더니, 그대로 당겨서 반대쪽 뺨에 뽀뽀했고.
내가 황당하다는 눈으로 바라보자, 윙크하면서 방긋 웃더니 전시관 쪽으로 호다닥 달려갔다.
섹스 이후로 저렇게 능글맞은 진짜 연인 같은 느낌이 되어서 굉장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근데 솔직히 저런 연인이 있다는 건 굉장히 행복한 일이긴 하지.
"보자, 신작 스크린톤이 괜찮은 게 나왔으려나...."
그녀가 해야 할 일을 마치기 전에, 나도 용무를 마쳐야 하니까 넋 놓고 있을 시간이 없다.
신작인 '화신정열'의 작업은 거의 막바지로 돌입했는데, 여전히 남아있는 문제가 신 캐릭터들의 불 표현이었다.
그래서 오늘 나온 김에 그 불에 사용할만한 스크린톤이 나왔나 확인하려고 스크린톤 코너를 도는 중이었다.
"괜찮은 건 좀 있는데, 정작 불에 어울리는 건 없네."
사실 애초에 이걸 스크린톤으로 때우는 것 자체가 문제가 아닐까 싶기도 했다.
인쇄해놓고 여기만 따로 컬러를 칠할 수도 없고 미쳐버리겠네.
요즘 들어 디지털이나 컬러 인쇄가 대중화된 현대가 그리워진다.
물론 야한 걸 죄다 검열 먹이던 법은 별로 그립지 않지만.
"음? 이건 또 뭐야?"
슬슬 더 찾는 걸 포기하고 나가려는 순간, 스크린톤 코너 옆에 있는 '스크린톤 펜'이라는 이름의 정체불명의 무언가가 내 눈에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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