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화 〉 7권 그게 뭔데 씹덕아(3)
* * *
"아오, 진짜 힘들어 죽겠네."
내 작품인데 이걸 왜 몇 시간 동안 줄 서서 받아와야 하는 거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아까 그 압도적인 줄의 길이가 전부 내 만화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왔다.
아니 대체 얼마나 팔렸길래 수도에서만 이 정도인 거야?
전국에 있는 전시관은 전부 다 오늘 이거에 올인한다고 들었는데.
"히히, 그래도 받아온 게 어디야."
"그러게. 인력이랑 다 때려 박았는지, 오늘 안에 다 나눠줄 수 있을 것 같더라."
하긴 전시관이 엄청 빼곡하게 있는 편의점 비슷한 것도 아니고, 수도 근처에 전시관 없는 곳 사람들은 다 여기로 몰렸을 거 아니야?
그렇게 생각하니까 어쩔 수 없는 현상이라고 여겨지기도 하네.
다만 다음에는 이렇게 오래 줄 서지 않고 구경 좀 하다 오면 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할 것 같다.
솔직히 저렇게 줄 서 있으면 나는 되게 기분이 좋은데, 정작 독자들이 너무 힘들지 않나 싶어.
"리아야?"
"응?"
"아, 미안. 계속 봐."
갑자기 로자리아가 말이 없다 싶었는데, 벌써 침대에 누워서 만화를 읽기 시작한 상태였다.
괜히 만화 내용 보지도 않고 알아서 들키기 전에 지금 보는 척해야겠다.
물론 샘플이 아니라 실제 완성본의 상태는 어떤지 확인도 해봐야 하고.
"히히 치트쨩 귀엽다."
"그러네."
로자리아의 혼잣말을 슬쩍 받아쳐 줬는데, 로자리아는 자기랑 비슷한 캐릭터를 좋아하는 경우가 많구나.
저번에는 그녀가 그린 만화인 '핑크빛 일기장'의 주인공인 딸기를 엄청나게 아끼더니, 여기서는 그녀와 닮은 츤데레 캐릭터인 치트리니타스가 마음에 드는 모양이다.
"어라?"
"왜 그래?"
한참을 만화를 읽던 로자리아가 고개를 갸웃거리더니, 책을 펼쳐서 나에게 보여주기 시작했다.
아마 저게 화신정열에서 가장 첫 침식과의 싸움 직전일 텐데.
기본적으로 5번의 싸움을 넣은 작품인 만큼, 싸움마다 한 명씩 옷을 벗는 장면을 자세하게 묘사했다.
이때는 아마 니그레도가 옷을 벗는 것만으로 2페이지 정도 썼었나?
나는 항상 옷을 벗긴다는 행위에 대해서 항상 진심이었다.
"음, 이게 뭔지 모르겠어."
"어?"
그녀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것은 속옷 차림의 니그레도의 모습이었다.
뭘 모르겠다는 건지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녀의 손가락이 닿아 있는 위치가 가슴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럼 지금 로자리아가 말하는 건 커다란 가슴에 대한 건가?
"저렇게 큰 게 말이 안 된다고? 그건 리아 네가 작은 거지 다른 사람이.... 악!?"
"그게 아니라! 이거 입고 있는 거 말이야!"
"너 진짜 마법사 맞냐? 왜 이렇게 손이 매워...."
그나저나 가슴이 문제가 아니면, 설마 그 위에 입고 있는 브래지어 말하는 건가?
갑자기 브래지어가 뭐가 어쨌다는 거지?
디자인이 너무 현대적이었....
'어라?'
순간적으로 뭔가 잊고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면서, 온몸에 핏기가 싹 가셨다.
잠시만, 잠시만, 잠시만.
지금 로자리아가 브래지어를 보고 저게 뭔지 의문을 표하는 중이잖아?
설마 이 세상에는 브래지어가 없었던 건가?
너무 당연하게 있다고 생각하고 진행을 했었는데, 생각해보면 여기는 없을 수도 있는 거 아닌가?
물론 이런 상식이야 내 머릿속에 있어야 하지만, 칼리가 여자 속옷까지 관심이 없었던 것이 문제다.
아니, 오히려 그렇다고 해도 기억 속에 브래지어에 대한 게 전혀 없다는 걸 생각하면 이상하긴 한데...?
"칼리?"
"아, 미안. 뭔가 생각나서. 그러게, 저게 뭐려나...."
일부러 속옷으로 날 놀리려고 했다기엔 톤도 장난스러운 톤이 아니었고, 애초에 바로 아래에 나체도 나오는데 굳이 속옷으로 놀릴 이유가 없어.
즉, 정말로 로자리아는 브래지어라는 물건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소리가 된다.
생각해보니까 작품에 브래지어라는 말도 자연스럽게 사용했지만, 지금 떠올려 보면 그냥 졸린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써버린 것 같은데?
"아마 이게 이번 작품에 담긴 의미가 아닐까?"
"의미...?"
"시우 화가가 그린 작품에는 항상 뭔가 의미가 담겨 있다잖아. 수백화에는 데포르메 그림에 대한 혁명, 화신강림은 만화라는 존재의 탄생, 오크랑 엘프 나오는 건 오크와 하프 오크에 대한 오해."
시발, 그거 화신강림 빼고는 아무것도 의도한 것이 없는데요.
이번에는 그냥 평범한 작품이라고 생각하면서 그렸는데, 왜 여기서도 이런 상황이 터지는 거야.
아무 생각 없이 속옷을 하나하나 벗어 던지는 장면이 꼴려서 핵심으로 포커싱한 것인데, 저런 오해를 받게 될지는 몰랐다.
"봐, 등장인물별로 다 저런 걸 입고 있잖아. 아니면 이 만화의 세상에서는 저런 걸 입게 되어 있나? 아무튼 계속 나오는 거 보면 뭔가 있는데?"
솔직히 내가 잘못한 것이긴 한데, 나도 여러모로 억울한 부분이 많다.
여기가 아무리 중세 판타지라지만 마법 때문에 해결된 불편함이 한두 가지여야지.
마법을 이용한 냉장고도 귀족 쪽에는 다 보급된 데다, 화장실도 마법 처리가 법으로 정해져 있어서 아주 깨끗한 편이고.
평소에 그림 관련된 것을 할 때는 진짜 현대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대 이상은 무조건 되는 느낌이잖아?
그런데 설마 브래지어라는 개념 자체가 존재하지 않을 거라고는 어떻게 생각하겠어.
차라리 디자인이 너무 현대적이라서 그런 유행을 이끈다고 하면 그럴 수도 있겠다고 생각하겠는데.
아예 브래지어 자체가 없다는 건 너무 예상 밖이라서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냥 그 세상에만 나오는 옷 개념이라고 생각하게 만들면 될지도 모르겠지만, 하필이면 이 작품을 낸 사람이 대마법사 취급을 받는 '시우 화가'라는 점이었다.
아무런 의도가 없는데 이미 멋대로 오해해서 상황을 키울 가능성이 컸다.
'지난번이랑 똑같네.'
그때의 의도라고는 오로지 오크가 엘프한테 거근 자지를 박아서, 엘프 배 위가 볼록볼록 튀어나오는 음탕한 섹스 장면을 그리고 싶었다는 것 하나였다.
물론 정말 그런 장면만 그릴 수는 없으니, 자연스럽게 개그적 요소들도 들어가게 된 거고.
정작 엄청나게 심금을 울린 파트로 평가를 받는 중인, 결혼 허락받는 부분에서의 오크 차별 이야기도.
흔히 한국 드라마에서도 자주 쓰이는 차별 결혼 반대를 이겨내는 커플의 느낌을 써먹기 위해 시대에 맞춰 컨버팅 한 거였잖아?
"우우, 치트쨩 불쌍해."
그 와중에 로자리아는 치트리니타스의 감정에 몰입했는지, 눈물까지 흘리면서 만화를 보고 있었다.
나는 그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위로해주면서도, 속으로는 어떻게 해야 할지에 대한 고민으로 정신이 없었다.
'너무 쫄지 말고, 확인부터 해봐야 하나?'
조금 시간이 지나면, 아무래도 이야기가 건너 건너 퍼지게 될 거다.
그렇게 되면 자연스럽게 작품의 후기나 의문들도 시장에서 들려오게 되어 있잖아?
지금부터 너무 이걸로 스트레스받지 말고, 일단 그런 여론까지 다 완성되고 나서 고민하는 게 맞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무 성급한 고민일지도 몰라.
솔직히 로자리아야 천재니까, 브래지어가 평범한 옷과는 좀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렸지만.
일반적인 사람들은 그냥 속옷이라 생각하고 넘어갈지도 모르잖아?
제발 그렇게 간단하게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아, 시발.'
그리고 며칠이 지나서 실제로 그것을 확인하러 가자, 그런 기도는 정말 무자비할 정도로 강하게 부서져 내렸다.
진짜 어떻게 딱 내가 가는 타이밍에 론도 교수님이랑 샤론 원로님을 만났는지도 신기한데.
여성인 론도 교수님은 물론이고 샤론 원로님까지 브래지어 이야기에 열중인 거야?
"일단, 이게 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만드는 건 이상하다니까요."
"그래도 '시우'의 작품에 나오는 건데, 일단 만들어 보면 뭔지 알 수 있지 않겠어?"
"오히려 그걸 조심해야죠. 괜히 잘 못 만들어서 의도랑 다른 게 나와서 꼬이면 문제가 심각해지잖아요."
"그건 또 그렇구먼...."
그런 이유로 정말로 브래지어가 시장에 바로 튀어나오진 않은 모양이라 일단은 다행이었다.
아니 근데 원로님은 왜 누가 봐도 그림이랑 상관없는 물건을 만들자고 하시는 거야.
나 진짜 정신 나갈 것 같아.
"일단 저게 가슴 고정하는 끈이랑 비슷한 역할을 한다는 건 알겠는데...."
"허, 그런 것도 있군. 그런데 대부분은 코르셋으로 고정하지 않던가?"
"엘프들은 코르셋을 잘 사용하지 않으니까요. 가슴이 너무 흔들리면 보기 안 좋은 건 마찬가지니. 너무 큰 경우에는 끈으로 묶는 경우가 종족 있습니다."
"오호, 그런 용도라면 자네는 필요 없겠구먼."
"......."
론도 교수님은 화르르 타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샤론 원로님을 노려보았고.
결국 샤론 원로님은 미안하다고 사과하면서 말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냥 그걸 그리면 되는 게 아닌가? 왜 저런 식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만들어?"
"새로운 걸 제시한다는 점에서, 만화 때랑 비슷한 게 아닐까요? 이런 식으로 고정할 수도 있다는 거죠."
"그럼 분명하게 볼 수 있는 장점도 있어야 할 것이 아닌가? 만화의 경우에는 기존의 그림이 담기 힘들었던 시간을 더 확실하게 담을 수 있었다는 장점이 있었잖어?"
"그걸 알아내는 게, 이번에 시우 화가가 준 숙제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작품 내에서 아무런 설명도 없이 자연스럽게 존재하도록 그렸겠죠."
아주 진지하게 브래지어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토론을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당장이라도 여기서 도망치고 싶었다.
하지만 저번에도 말했지만 나 같은 일개 귀족 자제가 샤론 원로님에게 그런 무례를 저지르는 건 불가능했다.
누가 나 좀 구해줘!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네 스승이 무슨 의도로 이걸 넣은 것 같어?"
"...아무 의도도 없지 않았을까요?"
"하하하, 확실히 자네는 아직 무르구먼. 자네 스승의 그 능구렁이 같은 작품관을 아직도 몰라."
아니, 시발 진짜 아무 의도도 없었다고 미친 새끼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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