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40화 (40/229)

〈 40화 〉 8권 ­ 혁명의 팬티를 휘날리며(4)

* * *

'아, 이상한 내용은 아니었구나.'

아니 근데 사람이 쫄 수밖에 없지.

겨우 편지 하나 보내는데 나라에서 기사단장을 보내면 어지간한 사람은 당황할 거다.

그만큼 대우해주려는 느낌으로 한 행동이겠지만, 진짜 나라에서 잡아가려고 했던 전적이 있는 나로서는 무서울 만했잖아?

"그나저나 나는 옷 디자인하는 사람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는 사람인데...."

이번에 브래지어를 디자인해서 뿌린 것 때문에 이런 요청이 들어온 건가?

편지에 적혀 있던 것은, 나라에서 아카데미 제복을 새로 디자인할 생각이니.

그 디자인을 나에게 맡겨보고 싶다는 내용의 요청이었다.

'뭐, 완벽하게 디자인하라는 것이 아니라. 내가 생각나는 디자인을 그림으로 표현하면 구현해서 쓰겠다는 거겠지.'

일종의 콜라보라고 보면 될 것 같긴 했다.

일단 제국 직속 아카데미 하나에서 테스트를 해보고, 평가가 좋으면 제국 직속 아카데미 전체에서 사용할 계획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이런 부분까지 내가 굳이 신경을 써야 하는 것은 아닐 것 같고....

"보상은 지원금이 있긴 하지만, 사실 이미 돈 때문에 불편한 상황은 아니니까 신경 쓸 필요는 없어. 그런데 정책적인 부분에서 이야기해주면, 그것도 반영하겠다...?"

내가 말한 정책을 고려하겠다는 거잖아?

이건 아마도 내가 엄청난 대마법사, 즉 연륜이 깊은 사람이라고 착각했기 때문에 나오는 평가일 것이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꼭 부탁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에 꽤 괜찮은 조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림을 검열하지 않는 상황을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을 잡아달라고 해야지, 그리고 검술과 비교해서 마법사는 내가 알기로는 평민 출신이 아주 적으니까, 평민도 그림 그리기 지원 등으로 조금 더 신경을 써 달라는 정도면 충분할 것 같은데?'

사실 이 부분이야 모든 것을 들어줄 수는 없으니, 어디까지나 부탁 정도로만 듣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좀 하고 싶은 말을 다 던져서 올린 것이고.

혹시 심기를 거스를까, 지금이 너무 좋으니 지금처럼 해달라는 식의 감사함을 섞은 분위기로 적어놨다.

"답장은 전시관에 맡겨 놓으라고 했지."

일단 방금 생각했던 것처럼, 검열당할 미래의 가능성을 막으려는 이유로 하겠다고 한 것도 있지만.

솔직히 내가 아는 예쁜 교복 문화를 전파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도 있었다.

내가 지구에서 아청법으로 신고를 당했던 원인도, 교복을 입은 캐릭터가 노출하거나 했기 때문이 아닌가.

개인적으로 교복을 비롯한 정갈하게 모두가 같은 제복을 입고 있는 것이 흐트러지며, 점점 야하게 변모하는 것을 사랑하는 나로서는 굉장히 억울할 따름이었다.

매번 설정으로도 성인이라고 적었지만, 아무튼 어린 학생이 연상된다는 이유로 그 사달이 났을 정도니까.

그렇다 보니 교복에 대한 것이 많이 한이 되어 있었다.

그리고 사실 이쪽 세계의 아카데미 제복이 예쁘기라도 했으면, 디자인이고 뭐고 이쪽 디자인도 함께 즐겼을 텐데.

저번에 로자리아가 입고 와서 본 결과, 진짜 여러모로 아니었다.

남자랑 여자랑 거의 같은 디자인의 옷이라서 성별 구분이 안 되는 것은 그렇다 쳐도, 이도 저도 아니라서 남녀 모두 빻게 보이는 디자인이라서 당황스러웠다.

아마 못생겼다고 싫어하는 어지간한 한국 교복도 그것보단 예쁘지 않을까?

"존나 빠르네."

내가 답을 한 지 하루밖에 지나지 않았을 텐데, 벌써 최대한 고려하고 고민해볼 것이라는 답이 왔다.

조금 매크로에 가까운 답변이라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나쁘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에 만족해야 하려나?

하여튼 그렇게 이번에 받은 제국에서의 외주 의뢰는 하기로 결정이 나버렸다.

'이제 중요한 건 제복의 디자인 베이스를 어떤 거로 하느냐지. 가장 먼저 떠오르는 건 세라복인데.'

해군 군복으로 이용되던 디자인이지만,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교복의 베이스 디자인으로 많이 사용되었기에 나에겐 교복이나 학원물 제복으로 익숙한 디자인이다.

그래서 아카데미 제복을 디자인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가장 먼저 떠오른 디자인이기도 하고.

그런 판단이 나올 수밖에 없는 논리적인 이유가 있는데, 지금 당장 아카데미에 있을 만한 주변 인물이 하나 있잖아?

로자리아와 아카데미의 여학생들이 다 같이 입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을 때 가장 좋은 디자인이라니.

이건 무조건 세라복이다.

왜냐면 내가 세라복을 존나 좋아하기 때문이고, 그 이외의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예전에 화신 시리즈에 사용하려고 만들어 놨던 세라복 디자인이 있었지 않나?"

여기서 그리기 시작하면서, 그것보다는 캐릭터별 특징이 담긴 사복이 작품에 더 어울릴 것 같다는 이유로 폐기된 설정이었다.

프로토타입이니까 그걸 그대로 사용하기는 애매하고.

그걸 베이스 디자인으로 해서 완성형으로 만들어 사용하면 될 것 같았다.

물론 프로토타입 그대로 사용해도 지금 아카데미의 제복보단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또 다른 문제는 그 설정이 여학교였다는 거라, 비슷한 분위기의 간지나는 남자 제복도 만들어야 한다는 거.'

하긴, 이미 만들어 놨던 걸로 외주를 퉁치는 것도 양심이 없지.

솔직히 시작한 이상 제대로 된 결과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내가 아는 교복 디자인의 붐을 일으키고 싶었다.

제국 직속 아카데미만 전부 세라복 베이스로 통일되어도, 굉장히 만족스러울 것 같은데.

굳이 그걸 현실로 봐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아카데미가 베이스가 되는 설정의 만화나 그림들도 세라복 붐이 온다는 거잖아.

안 그래도 슬슬 재밌는 만화가 올라오기 시작해서, 이쪽에서도 덕질을 하는 재미가 생기는 중이었는데.

이럴 때 그 덕질을 강화할 껀덕지를 찾았다는 것 자체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지금 이쪽 아카데미 제복 문화는 나한테 있어서 너무 꼬무룩해.

일단 베이스도 정해졌으니까 스케치부터 그려봐야겠다.

물론 아까 말한 대로 개선이 필요한 디자인이지만, 그래도 일단은 그려보면서 조금씩 수정해 나가는 것이 맞으니까.

이게 내가 눈으로 봐가면서 수정사항을 짚는 거랑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는 건 아무래도 다르다.

그래서 콘티를 짤 때 손을 계속 움직이면서 이리저리 낙서하는 거기도 하고.

"어라, 이거 좀 이상한데."

스케치를 시작한 이후로, 이상할 정도로 잘 그려지지 않는 그림 때문에 당황했다.

최근에 그림을 쉬어서 굳은 손이 풀리질 않았나?

아니, 그런 건 아닌 것 같은데?

"선이 왜 그쪽으로 튀어나가? 와, 돌겠네."

이상할 정도로 내가 원하는 그림이 그려지지 않아서 당혹스러웠다.

그려내는 선은 내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튀어 나가기 일쑤였고, 가끔은 간단하게 스케치에 담는 명암 수준도 이상해져서 그림이 기괴해졌다.

대체 내가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스케치가 제대로 완성이 되질 않는다.

"어디 아픈가?"

요즘 스트레스가 좀 많았기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일단 조금 쉬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멈췄다.

지금은 또 괜찮은데, 그림만 그리려고 하면 팔이 덜덜 떨리고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아서 기분이 이상했다.

이게 지금 왜 이러는 건질 모르겠네.

'아오....'

혹시 몸이 안 좋아서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신전에 가서 성가를 들으며 치료를 받아 보기도 했고.

치료소에 가서 마법으로 치료를 받기도 했다.

심지어 내가 지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잠까지 푹 자서 완벽하게 휴식을 취한 뒤에야 다시 그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와, 시발. 진짜 사람 돌아버리게 만드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는데, 왜 그림을 그리려고만 하면 손가락이 제멋대로 그림을 망치는 건지 모르겠다.

심지어 이게 애매하게 튀어 나가기만 하는 거면 모르겠는데, 지금 그리는 그림의 디자인을 자꾸 망치는 식으로 튀어서 더 문제였다.

아무리 스케치라도 여기서 지우개를 쓰면 여러모로 디자인이 이상해지겠다 싶은 라인으로 쭉 그어버리는데....

'아니지. 일단 지워가면서 완성이라도 해보자.'

완벽하진 않더라도, 어차피 지금 그리는 건 스케치잖아?

나중에 선만 따면 되는 거니까 일단은 지워가면서 라인이라도 그럴듯하게 잡는 게 우선이다.

나는 이상하게 그려지는 것을 매번 지워가면서, 천천히 그림을 완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드디어 완성.... 윽, 우욱...!?"

스케치가 완성되어 갈수록, 손의 떨림은 심해지고 두통이 시작되더니.

꽤나 내가 생각했던 디자인에 가까운 것이 완성된 것을 보는 순간, 헛구역질이 나오면서 정신이 어지러워졌다.

이, 시발 왜 이러는 거야?

"애미, 좆같은 억지 피폐각 잡네. 지랄맞게...."

설마 싶어서 방금 그린 그림을 시야에서 치우는 순간, 두통도 꽤나 줄어들고 숨쉬기도 편안해졌다.

심지어 방금까지 팔을 지배하던 강렬한 떨림도 잦아들기 시작한다.

아까부터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했고, 사실은 조금이지만 이유를 알 것도 같았지만 애써 무시하려고 했다.

왜 나는 이제까지 그리 좋아하던 세라복을 그림으로 그리지 않았던 걸까.

왜 나는 평소에 그리 좋아하던 세라복보다, 캐릭터별 사복이 낫다고 판단했었던 걸까.

마치 자연스럽게 이걸 그리면 안 될 것 같다고, 무의식이 막아서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 하하하...."

결국 세라복 그림은 치워두고, 연습 삼아 다른 그림의 스케치를 하는 순간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손이 떨리기는커녕 하나의 실수도 없이 원하는 그림을 쭉쭉 그려나가고.

완성된 스케치를 보고도 별다른 이상한 기분이 들지 않는다.

즉, 지금 문제가 되는 것은 결국 '교복'으로 보일 수 있다고 생각되는 그림뿐이었다.

그때 나에게 있었던 일은, 그냥 좆같은 일 정도가 아니라 아직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던 거다.

그것도 그림쟁이에게 있어서 가장 나쁜 형태로.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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