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42화 (42/229)

〈 42화 〉 9권 ­ 화신전장(1)

* * *

"은근 답변이 빠르네. 아니, 근데 이걸 추가 컨펌 없이 바로 진행한다고?"

이런 경우에 꼭 나중에 이야기 나와서 추가로 수정해달라는 요청 나오고 그러지 않나?

나야 그때 가서 수정해도 크게 다르지 않으니까 상관이야 없지만, 이건 옷 디자인까지 생산되는 건데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하긴, 딱 아카데미 하나만 대상으로 시범 운행한다고 했으니까 그 정도는 괜찮으려나?

솔직히 어느 정도는 내가 폭주해서 그린 부분이 많아서 수정 요청이 오면 겸허히 받아들일 생각이었는데.

그걸 빠꾸 없이 진행한다고 하니까 여러모로 기분이 좋아졌다.

솔직히 나중에 수정되더라도, 일단 내 의견을 존중해서 밀어줬다는 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지.

"뭐, 이 결과는 진행 상황에 맞춰서 알려준다고 했으니까 천천히 기다려 보면 될 것 같고."

사실 반쯤 잊고 있었던 정책에 대한 요청 사항에 대한 답변도 같이 와서 좀 당황스러웠다.

일단 그림 검열에 대한 부분은 지금의 시스템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말이 전부였다.

하긴 이 부분은 왕정 국가에서 쉽게 확답을 하기 어려운 부분이고, 심지어 곧 세대교체가 될 거란 말도 있으니까 황제도 조심스럽게 생각하겠지.

오히려 이 파트에 황제가 직접 신경 쓰겠다는 말을 보내준 것만으로도 굉장한 성과였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진짜 진국이었던 것이, 앞으로 진행할 계획에 대해서 쫙 알려주는데 이게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마법사가 평민 출신이 적어서 지원해야 한다는 내용에 관한 답인데, 사실 평민을 위해서라기보다는 나는 더 많은 그림쟁이가 생기길 원하는 마음에 부탁했던 내용이었다.

그랬더니 이걸 위해서 제국과 전시관이 협력해서 더 많은 평민이 비용 부담 없이 그림을 배울 수 있도록 하고.

마법까지 배우기는 어려우니, 그림만으로도 아카데미 입학시험을 평가받을 수 있도록 하는 제도를 준비 중이라고 했다.

"이건 진짜 좋네."

핍박당하는 것이 아니라 우대받고 지원받는 느낌을 야짤 그리면서 느끼다니.

막혀있던 속이 뻥 뚫리는 듯한 전개에 절로 행복해지는 느낌이었다.

갑자기 일이 다 잘 풀리니까 오히려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걱정이 될 정도였다.

'이제 마음 편하게 화신 시리즈 신작을 그리면 되겠다.'

외주 일도 끝이 났고, 슬슬 화신 시리즈도 다음 편을 내줘야 할 때가 되어가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화신정열을 출시한 것이 방학 때니까, 지금 시간이 꽤나 흘렀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번 작품이 화신 시리즈의 1부가 끝이 나는 느낌의 파트라서 조금 빨리 선보여주고 싶었다.

그 뒤의 내용이야 조금 천천히 그려내도 된다.

"이제 캐릭터 소개도 끝이 났으니까 제대로 스토리 전개를 시작해 봐야지."

화신정열을 통해서 주요 캐릭터들에 대한 성격과 과거사를 한 번씩 다 풀어줬다.

즉,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에 모두가 제대로 몰입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거지.

따라서 이번 에피소드에서는 그때처럼 일상을 그리는 척하다가, 중간부터는 제대로 어두운 이야기를 풀기 시작할 예정이었다.

화신정열에서도 각기 품고 있는 마음이나 정신 상태를 보여주기 위해서, 약간 눈물을 뺄 수 있는 슬픈 이야기나 감동적인 이야기를 넣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까 말했듯이 캐릭터의 소개와 현재 주연으로 나오는 캐릭터들이 서로를 믿는 동료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거야 물론 아주 아름답고 감동적인 이야기지만, 이런 마법소녀 물의 묘미는 그렇게 서로를 믿는 동료들이 절망에 가까운 상황에 고생하는 것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점점 침식이 발생하는 빈도랑 강해지는 빈도가 강해져 가는 게 전조가 되는 거고."

이번 에피소드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주인공인 알베도를 제외한 모든 캐릭터의 '절망'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것을 보면서도 그들을 도와주지 못하는 알베도 자신의 나약하고 평범한 모습에 실망하고 혐오하고 절망한다.

그것을 계기로 각성한 알베도가 일차적으로 사건을 마무리한다는 것이 이번 신작 '화신전장'의 기본적인 전개 흐름이었다.

니그레도는 화신체를 관리하는 마그눔 아카데미에서 나고 자란, 말 그대로 화신체로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아이였다.

본래에는 화신체로서 침식을 쓰러트린다는 사명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텅 비어있는 그녀였지만.

이미 '화신정열'에서 알베도와 친구들로 인해 소중한 것, 즉 동료라는 것이 생겨나는 것으로 일종의 '구원'을 받은 것처럼 묘사하는 구간이 있었다.

즉, 이제 침식을 지운다는 사명보다 더 소중한 동료가 생긴 셈이었는데....

'실수하고 말지.'

워낙 많은 침식과 싸우는 바람에, 공격 하나가 루베도에게 튀게 되고.

자신의 공격 때문에 튕겨나간 루베도가 침식에 팔 한쪽을 당하고 만다.

그렇게 침식에 당한 몸은 영구적인 문제가 생겨서, 화신체가 아닐 때는 사실상 장애인이 되어버리는 설정이 있었다.

그런데 하필이면 루베도는 원래 기사를 지망하던 검술부 지망이었고.

검을 쓰지도 못하는 상황에 괴로워한다.

니그레도는 소중한 동료의 미래를 조졌다는 생각에 무너져서 제대로 전투하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악순환을 일으켜 점점 피해가 커지는 식으로 니그레도의 정신을 벼랑 끝까지 몰아넣는다.

"당연히 여기서 니그레도를 탓하는 사람은 없지만."

솔직히 이 작품에서 항상 주의하면서 연출해왔던 것 중 하나는, 서로서로 보면서 구해주는 식으로 상황이 흘러간다는 것이다.

함께 싸우면서 서로를 살려주는 식으로 침식과 싸워왔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동료를 지키기 위해 휘두른 검에 어쩌다 동료가 다친 것이기에, 다른 동료들도 니그레도를 탓하진 않았다.

다만 계속해서 니그레도가 제대로 전투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충분히 짜증이 나는 부분이 될 수 있다.

결국 니그레도의 길어지는 전투 공백에 참지 못한 치트리니타스가, 이젠 루베도를 넘어서 전부 다 다치게 할 셈이냐고 비꼬듯 화를 내고.

그것에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니그레도의 정신은 완전히 무너져서, 다음 전투에서 침식의 공격에 전혀 대응하지 못하고 제대로 당하고 만다.

"와, 피폐 미쳤네...."

내가 짠 콘티대로 그려나가고 있는 거지만, 감정 표현을 담아내면서 그리다 보니 그 감정이 나에게까지 전염되는 것 같았다.

그래도 이런 컨셉의 작품을 그리고 싶었던 거니까 멈출 수는 없다.

단번에 이 상황을 역전시키는 장면이 만들어내는 뽕맛이 메인이 되는 내용인 만큼, 더 벼랑 끝까지 상황을 밀어버릴 필요가 있었다.

니그레도가 침식에 당하면서, 화신체가 해제되면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인간으로 변하고.

화신체가 되어 싸울 때도 자신의 의지 따위는 없다는 듯 아무런 대답 없이 몸을 몇 번이고 희생하면서 싸워나간다.

그 모습을 보던 치트리니타스는 그것이 자신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마찬가지로 멘탈이 개작살나고 만다.

꿈을 잃어 힘들면서도, 동료들이 얼마나 힘든지 알기에 티 내지 않고 마음을 부숴가며 싸우는 루베도.

이미 망가져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누워있는 니그레도.

그런 니그레도에게 마지막에 했던 말 때문에 후회하고 후회하며, 자신의 몸을 희생해가면서까지 그 둘의 공백을 메우려는 치트리니타스.

알베도는 그렇게 동료들이 망가져 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자신이 굉장히 분하다.

자신이 너무 평범해서 그렇다며, 조금만 더 강해지면 좋겠다고 염원한다.

하지만 아직 부족해.

조금 더 알베도가 간절해야만 '불의 신'은 응답할 테니까.

아직은 멀쩡하게 싸움에 집중하고 있는 사람이 하나 남아있잖아?

비리디타스는 그런 동료들을 보며, 자신이라도 해내야 한다며 채찍질하고.

실제로 굉장히 좋은 성과를 내고 있었으니, 사실상 팀을 캐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비리디타스의 특별해 보이는 듯한 강함과 실력 때문에 알베도는 더 자신이 평범하다고 느꼈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비리디타스에겐 동료도 소중했지만, 더 소중한 게 있어.'

애초에 비리디타스는 자기 자신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고 오히려 혐오하는 편인 성격의 캐릭터다.

자신은 죽어도 별로 상관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고 자신을 평가하는 것이 말버릇일 정도인데.

그런 그녀가 화신체가 되어 싸우는 이유는 유일하게 소중한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침식으로 인해서 세상에 문제가 생기면, 결국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가고.

그것 때문에 자기 자신보다 훨씬 소중한 동료나 가족들이 죽어 나가는 것이 싫었기에.

소중한 사람들을 위해 싸워온 것인데....

'여기서 비리디타스의 가족들이 침식에 희생당하지.'

아무리 노력해서 침식을 제거해도, 계속해서 늘어나는 침식에 세상은 잠식되어가고.

절망과도 같은 상황이 이어져 나간다.

그나마 자기 자신이 도움이 되는 것 같아서 버티던 비리디타스도 여기서 꺾여서 부서져 버린다.

알베도가 정신을 차렸을 때.

이미 그녀의 동료였던 4명은 온전히 몸이 침식당해서 현실의 몸은 움직일 수 없게 변한다.

그나마 싸울 때가 되면 불의 신의 의지에 따라서 기계처럼 싸우기만 할 뿐이지, 사실상 죽은 상태에 도달한 셈이었다.

'여기서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알베도도 무너지고, 온몸을 침식당하게 되는 장면.'

새하얀 나신이 점차 더러운 침식으로 물들어가는 끔찍한 광경을, 하나하나 묘사하며 극한에 내몰리는 감정을 표현해낸다.

아, 이 캐릭터들은 결국 침식이라는 악에 패배했구나.

너무나도 괴로워하면서 죽어갔구나.

그런 감정선이 그려지면서 울컥하고 감정이 올라오는 장면이다.

그리고 그 절망과도 같은 상황에 알베도는 새하얀 자신의 불꽃에.

불꽃의 신에게 기도한다.

자신은 평범하지만, 당신은 평범하지 않은 것이 아니냐고.

제발 좀 도와달라고.

그렇게 소녀의 마지막 기도가 하늘에 닿는 순간, 한줄기의 번개 같은 빛이 그녀에게 내려꽂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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