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43화 (43/229)

〈 43화 〉 9권 ­ 화신전장(2)

* * *

"여기부터가 문제네."

여기부터는 알베도가 불의 신에게 새로운 힘을 받아 각성하는 장면이다.

그냥 평범하게 그려내면 충분한 장면이긴 한데, 이제까지 전투씬에 너무 힘을 많이 줘서 그런지 느낌이 살지 않는다.

아무래도 파워업 했다는 걸 확실하게 보여주고 싶은데, 이제까지 도구를 한계까지 쥐어짜듯 다뤄왔던 것이 문제인지 그 수준을 표현하기가 너무 어려웠다.

'나중에야 이걸 당연하게 여기겠지만, 등장하는 처음에는 최대한 압도적인 감각을 주고 싶은데.'

여기까지 열심히 살려온 피폐 감성을 순간적으로 잊고, 멍하니 알베도의 각성을 바라보게 하고 싶을 정도로 강렬한 인상을 주고 싶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단색으로는 지금 이상의 분위기를 내기가 쉽지 않았다.

이 부분만 컬러로 작업하면 꽤 괜찮은 느낌이 될 것 같은데....

'시간을 때려 박으면 그릴 수는 있지만, 출판이 어렵다는 게 진짜 문제야.'

책을 컬러로 구현한다?

정말 제작비가 너무 솟아서 팔 수 있는 대상이 확 줄어들고 만다.

물론 흥할 거고, 돈도 많이 벌겠지만 지금 내 작품을 보던 모든 사람이 다음 편을 보기 위해 구매하기에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그렇다고 흑백 버전과 채색 버전을 모두 만드는 건 불가능한 것이, 그러려면 그냥 다른 만화를 두 번 그려야 한다.

왜냐면 흑백 버전은 단색이어야 하다 보니, 명암을 패턴으로 넣어야 해서 아예 새로 12장을 그려야 하니까.

컴퓨터가 자동으로 명암을 패턴화시켜주는 것이 가능한 상황이 아니잖아.

오랜만에 진심으로 컴퓨터 마려워지네.

"일단 이야기는 꺼내 볼까."

스케치까지는 일단 끝을 냈는데, 여기서 더 들어가서 진짜 작업에 들어가고 나면 수정하기 좀 아까워지니까.

물론, 이미 그린 상태였다고 해도 컬러로 내는 게 가능하다면 다 갈아엎었을 것 같지만.

그 정도로 이번 작품은 컬러 작업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중이었다.

처음 스케치를 시작할 때만 해도 그냥 힘 좀 더 주고 그리면 될 거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는데.

사람이라는 것이 막상 상황에 닥치면 욕심을 부리게 되는 모양이다.

아무리 봐도 이거론 임펙트가 부족하고, 임펙트가 부족하면 그것이 곧 개연성의 부족으로 이어진다.

이제까지 모두가 힘들어했던 '침식'을, 완벽하지는 않아도 지금 상황을 전부 정리할 정도로 강력한 힘이다.

그걸 허투루 표현할 수는 없는 일이지.

물론 그걸 단색으로도 충분하게 표현해내는 것이 내가 해야 할 일이겠지만.

아무래도 옛 시절의 흑백 만화 거장이 아닌, 컬러 만화를 디지털로 그려오던 나에게는 아직 쉽지 않은 일인 것 같았다.

"아, 오랜만이에요."

"안녕하세요."

"설마 신작인가요?"

"예, 일단 예약에 쓸 그림은 가져왔습니다. 예약은 시작해도 될 것 같은 느낌인데.... 스승님이 사실 좀 어려운 요청을 하셔서요."

"예약이라면, 화신정열의 다음 이야기인가요?"

"맞아요. 그런데 혹시 책의 마지막 파트만 컬러로 만들어서 붙일 수 없겠냐는 이야기를 하시더라고요."

"네!?"

당황스러울 만한 이야기였다.

일단 표지에 쓰이는 컬러만 해도 기존 책 원가의 3분의 1을 담당할 정도의 엄청난 가격을 자랑한다.

물론 대부분은 용짓값이라서, 양면 인쇄하고 최대한 크기 아끼면 그 가격에 4페이지 정도는 뽑긴 한다.

그런데 내가 아무리 마무리 장면을 압축해도 12페이지 정도는 들어갈 텐데, 단순 계산해도 지금 책 2배의 가격은 나온다는 말이잖아.

"네, 말씀하신 거랑 거의 맞아요. 원가가 지금의 2배를 넘어갈 정도라서요. 물론 12페이지 정도면 전체 페이지 수에 비하면 적은 편이긴 한데...."

그리고 다른 문제도 존재했는데, 바로 용지의 재질이 평소에 책에 사용하는 것과 달라서 책 뒷부분만 재질이 많이 다르게 느껴진다는 거다.

현재 겉표지나 프로모 카드로 이용되는 컬러 인쇄용지는 굉장히 두껍고, 반들반들해서 차이가 크게 느껴진다.

내가 원하는 것은 해당하는 페이지를 읽을 때까지 컬러 페이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거였고.

그런 상황에 저런 용지를 사용하면 책 자체에서 티가 많이 나게 된다.

사실 그걸 떠나서 책의 모양 자체가 이상한 느낌이 되어서 별로기도 하고.

"다른 용지는 아예 없어요?"

"있긴 한데, 그럼 인쇄 품질이 꽤 많이 떨어져요. 평소에 그리시는 유화 그림이면 많이 이상해 보일 거예요."

과거에 쓰다가 퀄리티가 좋지 않아서 버려진 기술이라, 그냥 단색을 인쇄하는 것보다도 낮은 퀄리티를 보일 정도라고 한다.

실제로도 테스트해 본 용지를 받아보니까 색감이 되게 이상하고, 디테일도 뭉개져서 나왔다.

"별로죠?"

"확실히 별로긴 한대, 이거 단가가 어떻게 된다고요?"

"일반 컬러의 절반 정도 될 거예요."

그렇다고 해도 기존보다 원가가 1.5배 이상은 늘어난다.

다만 그것의 경우에는 해결할 방법이 하나 있었기에 그다지 괜찮을 것 같았다.

딱 그 정도일 때만 해결 가능해서 문제지.

"만약에 스승님이 모든 수익을 포기하면, 아슬아슬하게 기존 가격에 맞출 수 있을까요?"

"네!? 수익을요?"

"비율상 가능할 것 같은데."

"저희 쪽도 조금만 감당하면 되니까, 그 정도라면 해드릴 수 있는데요...."

"그럼 일단 이거 스승님에게 보여드리겠습니다. 스승님이 원하시는 건 이런 거 같아서요."

사실 이걸 보자마자 써먹을 방도를 찾아봐야겠다고 생각한 이유가 바로 용지의 감촉 때문이었다.

저가형이라 그런지 거의 기존 책에서 쓰던 고급 용지랑 색감과 감촉의 차이는 물론이고 두께도 비슷해서 차이를 느끼기 어려웠다.

물론 정말 자세히 보고 만져보면 알겠지만, 모르고 있으면 차이를 느낄 수 없을 정도다.

'인쇄 품질이 낮지만, 제일 중요한 가격이랑 재질이 너무 완벽해.'

품질이 문제가 있는 건, 내 경험상 그림의 세부 느낌이랑 채색 방식을 만지작거리면 완화가 될 거다.

최대한 방법을 찾아서 단색 그림이랑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 정도까지만 끌어올리면 된다.

표지 그림처럼 완벽하게 원본 수준의 표현력을 원하는 것이 절대로 아니니까.

"아니다. 혹시 이거 그림 몇 개만 더 테스트해 주실 수 있나요. 스승님 작품들 몇 개로 해주시면 될 것 같아요."

"네, 가능할 것 같아요."

지금 이 낮은 인쇄 품질에서 문제가 되는 것 중 하나는 색 재현도가 낮아서 원본이랑 너무 다른 색감이 나온다는 거다.

그래서 원본과 샘플의 차이를 보고, 원본 자체의 색을 일부러 다르게 그려서 출력물이 내가 원하는 느낌이 되도록 해볼 생각이다.

물론 아예 내지 못하는 색도 있어서 한계가 있긴 하겠지만, 애초에 그런 색상만 가지고 그림을 그린다고 생각하면 큰 어색함은 느끼지 못할 거다.

그리고 다음 디테일이 뭉개지는 부분인데, 이 부분은 일부러 다른 곳도 뭉개지는 듯한 효과를 넣어볼 생각이다.

워낙 힘이 강해서 그림체 자체가 짓눌리는 듯한 컨셉으로 그려낸다면, 이상하지 않게 처리할 수 있을 거다.

다만 이러한 방법들은 전부 평소에 내가 하던 방식이 아니기에, 연습과 시행착오가 엄청나게 걸리는 일이었다.

'고생길 예약이긴 한데, 내가 원하던 걸 보여줄 수 있는데 보여주지 않는 건 더 싫어.'

내가 지금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시간이 부족한 것도 아니잖아?

이 세상의 사람들은 내 만화를 예술로 취급해주는데, 정작 내가 그걸 진심으로 모두 표현해내지 못하면 기만이겠지.

나는 몇 번 그림을 그려보다가, 가능할 것 같다는 확신을 하고 작업에 들어갔다.

"처음부터 바로 컬러로 가면 이질감만 느껴질 거야, 그럼 순간적으로 몰입이 깨져서 악효과가 나."

그러니까 첫 페이지는 흑백으로 간다.

다만 단색이 아니라 회색조로 넘어가는 거지, 여기서 정말 자세하게 보지 않는 이상은 눈치채기가 어려울 거다.

그렇게 눈치채지 못하고 다음 페이지를 여는 순간....

색이라곤 하나도 없던 세상에 조금씩 색이 탄생하기 시작한다.

바로 컬러 페이지가 되는 것이 아니라, 천천히 칸을 지나면 지날수록 방금 알베도가 받은 힘으로 인해 주위의 어둠이 사라져가는 느낌으로.

세상이 점점 밝아져 가고, 또한 천천히 색을 되찾는 것을 작품의 호흡과 함께할 수 있도록 돕는다.

"하, 그래. 진짜 뒤질 것 같긴 한데. 이 느낌이지."

아예 여관을 장기로 빌려놓고, 여관에서 작업을 하고 바로 테스트 인쇄를 해보는 식으로 작업에 들어갔다.

아무래도 색감이나 뭉개지는 것은 테스트해야만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아예 폐기하고 새로 그리는 경우도 자주 나왔다.

하지만 인쇄한 결과물이 딱 원하던 수준에 도달할 때마다 느껴지는 쾌감은, 이 기약 없어 보이는 짓거리를 어떻게든 버티게 해줬다.

"이, 시발. 진짜 매번 새로 해야 하는 게 너무 힘드네...."

최근 만화 작업을 위주로 하다 보니, 고난이도 작업 전에는 사본을 만들어 놓고 실패하면 사본부터 다시 할 수 있어서 좋았는데.

컬러는 그게 안 되다 보니까 작업할 분량이 늘어나니까 진심 죽을 맛이었다.

사실 그게 아니더라도 컬러 자체가 지금 도구로 작업하기가 굉장히 힘든 것도 사실이고, 솔직히 디지털로 작업하던 시절이 너무 그립다.

하지만 이렇게 기도한다고 하늘에서 컴퓨터랑 태블릿이 떨어질 리도 없으니까, 지금은 이를 악물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최소한 이렇게 뼈를 갈아 넣은 만큼 결과물은 나오잖아?

결과물을 아예 내놓지 못하는 상황보다는 훨씬 나은 상황이야.

"자, 확인해보시겠어요?"

"이게 몇 번짼지 모르겠네요. 스승님이 죄송하다고 전해달라고 하셨어요."

"에이, 이게 제 일인데요."

나는 천천히 컬러로 인쇄된 페이지를 살펴보기 시작했고, 딱 내가 원했던 느낌이 살아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안도의 한숨을 내뱉었다.

이 정도면 진짜 이 인쇄 품질로 보여줄 수 있는 건 다 보여준 느낌이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괜찮다는 것을 알리고, 아예 일반 분량과 조합한 최종본을 제작해보자고 말했다.

이제 그 부분만 자연스럽게 접합시켜서 티가 안 나게 하면, '화신전장'은 여기서 완성이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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