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44화 (44/229)

〈 44화 〉 9권 ­ 화신전장(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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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번호 보여주시겠어요? 시간 확인했습니다. 예약 도장 부분 보여주시면, 수령 확인 도장 찍어드릴게요."

"아, 네!"

지난번처럼 길게 줄을 서지 않고도 작품을 받을 수 있다니.

훨씬 더 개선된 시스템에, 여성은 꽤나 기분 좋은 느낌으로 신작인 '화신전장'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예약을 받기 시작한 시점을 고려하면, 굉장히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나서야 받을 수 있었다는 점은 불만이었지만.

아무래도 그림이라는 것은 본업인 마법 연구를 하고 남은 시간에 해야 하는 것이 일반적이니, 어쩔 수 없다는 것을 그녀도 잘 알고 있었기에 최대한 그런 마음을 털어버렸다.

"새 작품을 열어볼 때는 항상 두근두근하네."

예약할 때 확인한 그림인 치트리니타스의 나체 책갈피는 예상했던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자랑했고.

이번 작품의 표지는 알베도가 검은 액체 같은 침식에 잡아먹히는 듯한 연출이라, 좀 무서우면서도 신비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알베도는 저런 상태가 되어 있는 걸까?

그녀는 그런 궁금증과 함께 급하게 작품의 문을 열었다.

점점 늘어나기 시작하는 침식과 그 침식으로 인해 몸을 불사르는 화신체 소녀들.

그 와중에 니그레도의 실수로 인해 루베도가 다칠 때는, 그녀도 니그레도에게 뭐 하는 거냐고 욕을 할 정도로 진지하게 몰입했다.

왜냐하면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등장인물이 바로 루베도였고, 그런 루베도가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침식을 다 처리하고 나면 말이야, 순수하게 검을 휘두르는 실력으로 아버지에게 인정받을 거야. 그리고 소드 마스터가 되는 건 물론이고, 내 실력으로 세상의 모든 소드 마스터를 꺾을 거다? 그래서 검이라고 하면 모두가 나를 떠올리게 되는 거지!'

이전에 루베도가 알베도에게 선언했던 대사가 회상처럼 지나가며, 그녀의 가슴을 꾹 하고 짓눌렀으니.

당연히 루베도를 그렇게 만든 니그레도가 미워질 수밖에 없는 것이었다.

"에...?"

처음에 치트리니타스가 니그레도에게 화를 낼 때는 잘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그 실수에 대해서까지 함께 지적하지 않는 게 아쉽다고 생각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말에 벼랑 끝을 걷고 있던 니그레도가 완전히 무너지고, 결국은 후회와 고통과 슬픔 속에서 온몸을 침식당할 때.

방금까지 치트리니타스를 응원하던 그녀의 마음이 이상할 정도의 죄책감으로 조여오기 시작했다.

진짜 이렇게까지 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분명 니그레도도 소중한 동료였잖아.

어째서? 어째서? 어째서?

생각보다 상황이 심각하다는 것을 깨닫자, 그녀는 숨이 턱턱 막히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하나씩 넘겼다.

그냥 책일 뿐인데, 마치 그곳에서 손이 나와 그녀의 목을 조르는 것만 같다.

"뭐...?"

싸움이 끝난 뒤에는 일어나지도 못하고 시체처럼 누워있는 니그레도의 모습.

심지어 싸움이 시작되면 아무런 대답 없이, 아무런 의지 없이 조용히 싸움만을 계속하는 니그레도의 모습.

그저 싸우는 것만 아는 도구로 전락한 그녀의 모습이 전해주는 절망감은 굉장히 찐득찐득하고 기분 나빠서, 왜 침식의 검은 액체가 그런 질감을 보였는지를 이해하게 만든다.

끝까지 니그레도에게 말을 걸어보려는 루베도지만, 그 말은 전혀 닿지 않고.

니그레도가 그렇게 된 것이 자신의 탓이라고 생각한 치트리니타스도 점점 정신이 무너져간다.

심지어 상황이 더 심각해져서 비리디타스의 가족이 희생당해, 비리디타스의 정신도 끝에 내몰리게 된다.

절망과 절망의 연쇄에 책을 읽던 그녀의 손이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고 멈췄다.

"이건, 너무하잖아."

그렇게나 꿈을 향해서 행복하게 나아가고 있던 아이들이었는데.

심지어 나쁜 짓을 한 것도 아니고, 그렇게나 열심히 세상을 지키고 구하려고 싸워왔는데.

왜 이런 취급을 받아야 하는 거야?

왜 덧없이 스러지고, 스러진 이후에도 자신의 의지와는 별개로 싸움을 계속해야만 하는 거야?

그녀는 한참을 고민한 끝에 다시 페이지를 넘긴다.

작품이 전해주는 끈적끈적한 악의를 느끼며, 계속해서 페이지를 다음으로 넘기길 계속한다.

그녀는 이 아이들의 마지막이 고통스럽더라도 끝까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왜냐면 저 아이들은 그녀에게 있어서 이미 소중한 지인과도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에.

"표지는, 이걸 의미했구나."

알베도를 제외한 모두가 역겨운 침식에 뒤덮여 고통에 빠지고.

유일하게 남은 알베도는 기계처럼 싸우는 자신들의 동료를 보며 절망한다.

아마 이 작품에서 어떤 캐릭터를 좋아했더라도, 이쯤에 와서는 비슷한 감정을 느끼게 되었으리라.

그 소름 돋는 의도를 깨닫는 순간, 시우 화가의 악랄함에 표정을 구겼다.

아, 그림으로 이러한 감정을 전해줄 수도 있구나.

그게 만화구나.

표지에서 본 것과 같은 그림이 그녀의 눈앞에서 드러난다.

물론 표지에서와 다르게 흑백이지만, 그렇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새하얀 알베도가 검은 침식에 잡아먹히는 광경이니까 그다지 다르진 않다.

아니, 오히려 채색된 것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면서 색이 죽어버린 듯한 느낌에 오히려 섬뜩한 감정이 찾아온다.

아까 처음 표지를 봤을 때와는 사뭇 다른 감정이 그녀의 안에서 자라난다.

그녀는 무서웠다.

결국 이렇게 모두가 패배한다는 것이, 침식이라는 존재가 실재하지 않음에도 무섭다고 느낄 정도로 두려워졌다.

몇 번이고 다음 내용으로 넘어가는 걸 주저하게 된다.

더는 이 아이들이 끔찍하게 당하는 것을 보고 싶지 않아, 무서워, 싫어.

하지만 그녀는 그런 감정 속에서도 그 끔찍한 마지막을 눈에 담기 위해서 페이지를 넘겼다.

그 어떤 결말이라도, 도망가지 않아야 한다는 것을 이 작품에 등장하던 아이들이 알려줬으니까.

두렵다고 이 아이들을 부정하고 도망칠 수는 없는 일이었다.

'맞아요. 저는 평범해요. 정말 잘 알고 있어요. 아무리 평범해지지 않고 싶어도 절대로 바꿀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어요.'

알베도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를 하기 시작한다.

온몸이 새까만 침식에 뒤덮여가며, 울분이 담긴 기도를 하늘에 쏟아낸다.

'하지만, 당신들은 평범하지 않잖아요. 당신들은 신이라며! 그럼 좀 도와줄 수도 있잖아! 아니야? 내 말이 틀리냐고!'

그 대사가 아무것도 남지 않은 검은 대지에 울려 퍼진 직후, 하늘에서 내리꽂히는 빛의 모습이 작품을 읽던 그녀의 눈동자 안에 차올랐고.

그것과 함께 이제까지 죽은 것 같았던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면서 다시 뛰기 시작한다.

설마, 설마 아직 기회가 있는 것일까.

이 아이들이 침식이라는 지옥을 이겨낼 수 있는 것일까.

강렬한 빛이 알베도를 감싸고, 새하얀 화염이 알베도의 주변에 있던 침식을 전부 태워버린다.

화염은 기존처럼 그녀의 주변에서 싸움을 돕는 것을 넘어, 그녀의 온몸 안으로 기어들어 가서 불타올랐고.

마치 불과 한 몸이 된 듯한 알베도의 힘에 책 자체가 전율했다.

원래라면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되는 색채가 책에 그려지기 시작하고.

압도적인 새하얀 화염에 침식들은 전부 타올라 사라진다.

이 책에는 마법이 깃들에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 알베도에게 주어진 지금 그 힘이 책에까지 마법을 일으키고 있는 듯했다.

"아...."

알베도의 불길이 침식을 태울 때마다, 그 자리에 없었던 색채가 돌아오며 세상을 되살려내고.

그것과 함께 방금까지 가지고 있던 두렵고 끈적끈적한 감각이 그녀의 안에서 전부 불타 사라진다.

오로지 남는 것은 비현실적인 그 광경에 압도당한 그녀 자신이다.

모두의 감정에 공감해서 흘러내리던 슬픔의 눈물은, 어느새 그 모든 것이 회복된다는 것에 대한 감동의 눈물로 변화하고.

마지막 페이지에서 나체 상태로 깨어나기 시작하는 마그눔 아카데미 소녀들의 모습은, 겨우 눈물 정도로 버티고 있던 그녀의 긴장감을 완전히 놓게 만든다.

엉엉 울면서 다행이라며 책을 껴안는 그녀의 모습은, 잘 모르는 사람이 보더라도 걱정할 수 있을 정도로 진심이 담겨 있었다.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잘 전해졌으면 좋을 텐데."

오늘이 화신전장의 발매일인 만큼, 나는 굉장히 긴장한 상태로 하루를 보내는 중이었다.

인터넷에 연재할 때처럼 실시간으로 반응을 볼 수는 없으니, 그 긴장을 해소할 방법이 아예 없으서 점점 더 심해지는 기분이다.

긴 시간을 때려 박아서 만든 작품인 만큼, 내 의도가 그대로 전해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걱정이 많이 되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만들어 놓은 장치가 아주 많았기에 괜찮을 것 같긴 한데....

흑백 장면의 시작에서 표지의 컬러와 같은 그림을 보여주게 되는데.

이는 일단 흑백으로 그림을 그리고, 그것을 복사해서 그 위에 색감만 덧칠하는 기법으로 만들어낸 표지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하여튼 이런 식으로 자연스럽게 흑백을 보고도 이미 봤던 컬러를 머릿속에 오버랩시키면서 컬러에 대한 거부감을 조금 지워낸다.

물론 색의 대비를 이용해서, 작품 속의 어두컴컴한 상황을 느끼게 하려는 것도 있긴 했다.

하여튼 여러모로 생각을 많이 하고 작업 스타일을 고른 파트였지.

그 뒤로는 작품에 컬러를 서서히 잠식시키면서, 원래부터 이 작품이 컬러였던 것처럼 자연스럽게 작품을 읽어나갈 수 있도록 의도했다.

"떡밥도 좀 뿌려놨는데, 눈치를 챈 사람들이 있을지 모르겠네."

기본적으로 알베도에게 깃든 새로운 불길은, 몸 안에 흡수되었다가 나왔다가를 반복하기는 하는데.

깃들 때 가장 많이 흡수되어, 가장 강렬한 불길이 넘실거리는 부위가 있었다.

'성기를 비롯한 그 안쪽.'

심지어 그 안쪽에 대량의 불길이 흡수되면, 배가 살짝 부풀어 올라서 커지는 표현도 넣었다.

후속작에서는 이 추가 각성을 이용해서 스토리를 전개할 생각이었기에, 미리 좀 떡밥을 뿌려두려고 했던 행동인데.

아마 화려한 전투 장면에 묻혀서 쉽게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거다.

하긴. 원래 딱 그 정도가 좋은 법이지.

"아, 시발. 궁금해서 못 참겠다. 그냥 전시관 가서 말 들려오는 거나 들어봐야지."

원래라면 천천히 후속작 준비나 하면서 천천히 시간을 보내려고 했는데, 더는 못 참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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