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56화 (56/229)

〈 56화 〉 11권 ­ 원 그리기에 진심인 사람들(5)

* * *

'뭐야, 미친.'

별생각 없이 옆을 봤더니, 니아가 그린 마법진이 모양이 꽤나 흔들린데다 불투명한 것이 눈에 보일 정도로 순도가 낮았다.

분명히 니아도 입학시험 때는 정상적으로 완벽한 원을 그렸던 걸 생각하면, 지금은 완벽은 아니어도 최소 순도가 꽤 높은 녀석을 그렸어야 했다.

근데 갑자기 저런 상태라는 건, 지금 뭔가 원래랑은 달랐다는 건가?

'살짝 마력의 흐름이 다르긴 했는데.'

그래도 애초에 마법진을 그린다는 것 자체가, 그런 마력의 변화를 버티면서 그려서 어려운 거라서 크게 다르지 않을 거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심한 차이가 벌어진 거지?

나에게 있어서는 굉장히 비상식적인 상황이라, 굉장히 당황할 수밖에 없었고.

그건 다른 학생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당혹감이 가득 담긴 무거운 공기가 강의실 전체를 짓누르기 시작했다.

"음, 일단. 아마 뭔가 평소랑 다르다는 것 정도는 다들 눈치를 챈 모양이네요. 맞습니다. 제가 여러분께 건네드린 도구가 평소랑 매우 다를 겁니다."

론도 교수님이 줘서 의심 없이 사용했던 '붓'에 눈길이 간다.

생각해보면 마력 사출에는 붓이 아니라 펜 형태의 도구를 사용하지 않았었나?

그럼 지금 니아가 실패한 원인이 겨우 그 차이 하나 때문이라고?

"이런 도구는 원래 그림을 그릴 때 물감이나 잉크가 나오는 것처럼 마력이 튀어나오죠. 그리고 아시다시피 펜은 정확한 라인을 그리기가 매우 수월합니다."

하지만 붓은 쉽게 꺾이고 붓의 털 가닥가닥이 모두 물감을 머금고 내뱉죠.

즉, 펜으로써 원을 그리는 것보다 훨씬 사출되는 형태가 복잡해지는 겁니다.

심지어 방금까지 내뱉었던 마력이 붓을 꺾어서 변수까지 되는 복잡함이 담겨 있으니, 원을 그리는 난이도는 더 올라가는 거죠.

"그런 의미에서 붓으로 바로 완벽한 원을 그려낸 칼리 학생이 대단한 겁니다. 니아 학생처럼 당황해서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는 건 물론이고, 아예 원 형태에 실패하는 학생도 많았습니다."

사실상 이렇게 완벽한 걸 그려낸 학생은, 비슷한 걸 주문한 다른 학년에서도 전혀 없었다며 나를 칭찬했고.

수석인 니아보다 돋보일 정도의 결과에 다른 녀석들이 나를 보는 눈이 이상하게 변했다.

집중 받는 것도 에반데, 이런 캐릭터성까지 심어지는 건 진짜 원하던 방향이 아닌데....

"자, 잠시만요 교수님. 근데 이게 그렇게 중요한 건가요? 어차피 완성된 효율은 같잖아요."

"맞습니다. '마법진'에서는 전혀 다르지 않아요."

하지만 문자와 그 문자를 보조하는 선들을 그려낼 때는 이러한 도구조차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시작합니다.

그럼 결국 거기서 새로운 도구를 연습하다가 고꾸라지는 마법사들이 아주 많죠.

왜냐면 그 사람들은 예전부터 마법은 펜으로만 사용해 왔으니까요.

마법에 새로운 형태가 필요하지만, 적응하기에는 너무 늦은 겁니다.

"유일하게 적응한 사람들은, 오히려 취미 활동인 그림을 열심히 그리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때부터 그림과 마법의 연관성이 대두되기 시작했죠."

"그건...."

"아마 니아 학생은 마법 위주로 공부하고, 붓을 사용하는 그림을 그린 경험이 적겠지요. 하지만 칼리 학생은 그런 그림을 많이 그려봤을 겁니다."

"...예."

실제로 니아가 입학할 때 그렸던 그림은 유화가 아니라 색으로 된 펜을 이용한 그림이었다.

그렇다고 그 그림이 별로였던 건 아니지만, 지금 벌어진 차이가 붓질의 연습 정도로 인한 것이라는 건 나름 이해하게 했다.

"그렇다고 여러분들에게 그림을 그리면 마법 실력이 좋아진다고 이야기하고 싶진 않습니다.

어디까지나 그림과 마법이 공유하는 건 기초적인 도구 사용법 정도니까요. 특히 칼리 학생?"

"네?"

"칼리 학생이 좀 특이한 경우기도 하거든요. 사실 붓을 좀 많이 썼다고 해도, 적응이 빠른 거지 단번에 이런 마법진을 그리는 경우는 처음 봤습니다."

"그건...."

"왜 제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꺼냈는지 아시겠나요?"

아뇨, 전혀 모르겠는데요.

뭐 붓으로 그린 마법진을 비롯한, 여러 도구를 배워야 한다는 건가?

그게 마법진 기초고?

"여러분들은 지금 제가 보여드린 '붓'으로 그리는 마법도 배워야 한다. 라는 상황에 집중하고 계실 텐데. 그러면 안 됩니다."

그럼 대체 뭘 말하고 싶은 건데.

내가 당황해하는 사이, 론도 교수님은 그림을 그려가면서 설명을 이어갔다.

"지금 예시는 붓이었지만, 사실 붓은 미리 연습하면 됩니다. 그런데 아예 그런 것이 아니라 처음 보는 물건이 나오면요?"

"적응하는 시간을 가져야죠."

"맞습니다. 다만 그 시간을 어떻게 해야 하죠?"

"줄여야죠...?"

어떠한 새로운 것이 나왔을 때, 그것을 처음부터 다시 배우는 것이 아니어야 한다는 거다.

최대한 빨리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체득할 수 있도록 쌓아놓는 기반이 진짜 기초라는 것.

평범하게 이론을 배우는 것이 기초가 아니라, 이런 실력 자체를 몸에 때려 박는 것 자체가 마법학의 기초라는 거다.

'허....'

이래서 이 세상의 화가들이 새로운 그림체에 익숙해지는 시간이 빨랐던 건가?

하여튼 다른 사람은 몰라도 론도 교수님이 주장하는 '마법학 기초'의 정의는 그러했다.

"기초라는 건 이론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 자체를 배우는 게 아닙니다. 그 더 아래에 여러분의 손과 본능에 쌓아두는 거죠. 저는 그걸 쌓는 방법을 알려드리는 거지, 마법을 가르쳐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기초를 쌓아야만, 다음부터 계속해서 변화하는 '좋은 마법'의 정의를 잘 따라갈 수 있다.

그 정의를 잘 따라가는 것이 '좋은 마법사'고, 그 좋은 마법사들을 많이 만들어내는 것이 이 강의의 목적이다.

론도 교수님의 논리는 그러했다.

"오늘 첫날이기도 하고, 강의는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이 강의는 책이 필요 없으니, 다음 강의에도 오늘처럼 몸만 오시면 되겠습니다."

1학년 첫날부터 애들 상식을 때려 부숴버리는 강의를 하는 교수라니.

내가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론도 교수님은 대단한 사람이었다.

그림만 잘 그리는 게 아니라, 교육자로서의 열의도 대단한 분이네.

"끄응, 그나저나 이렇게 일찍 끝나면 다음 강의까지 뭐 하냐."

"아카데미 구경이라도 더 해야지 뭐."

"그러자."

니아와 대화를 하고 같이 움직이곤 있는데, 방금 강의 때문인지 니아는 계속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하긴 나야 제대로 성공해서 덜하지만, 자신의 실력에서 믿고 있었던 부분이 박살이 난 니아에겐 충격적인 강의였을 거다.

아마 론도 교수님이 굳이 이런 식으로 강의를 하는 이유도 그걸 노리는 것일 테고.

"어, 저거 검술부지? 색 보니까 우리랑 같은 학년인 것 같은데."

"처음 보네."

"진짜 왜 그렇게 안 부딪히나 싶었는데, 드디어 보네."

대부분은 흰색 티셔츠에 숏팬츠를 입은 운동복 차림의 남자애들이었지만.

가끔 보이는 여자애들은 가슴골을 잘 드러내도록 달라붙은 크롭티와 노출도가 굉장히 높은 브루마를 입고 있어서 굉장히 눈을 호강하게 했다.

그리고 땀을 흘리면서 열심히 가검을 휘두르는 모습까지 생각한다면, 아름다움을 느낄 수밖에 없는 장면이다.

"여기도 첫날이라 금방 끝내나 보다."

검술부는 교수가 아니라 교관이라고 부른다고 했던가?

하여튼 교관에게 깍듯이 인사한 후, 검술부 1학년 아이들은 우르르 나오면서 식당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하긴 우리야 너무 일찍 끝나서 이렇게 돌아다니고 있었지만, 슬슬 점심 식사 시간이 되어가니까.

"어?"

그 순간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분홍색 포니테일 머리카락이 시야에 들어왔고.

혹시나 해서 확인한 귀는 엘프 특유의 커다란 크기를 자랑하고 있었고, 웃고 있는 입 안에서는 하프 오크 특유의 날카롭고 작은 송곳니가 드러난다.

심지어 크롭티가 달라붙은 커다란 유방이 위아래로 출렁이는 모습까지,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과 똑같은데...?

'저 미친년이 왜 여기 있지?'

저번에 전시관에서 난동을 부리고는 '시우'에게 전해줘야 하는 편지라면서 이상한 내용의 편지를 전해준 하프 오크였다.

러브레터인지 스토킹인지 모를 이상한 내용이었는데.

설마 내가 시우라는 걸 알고, 나를 스토킹하기 위해서 입학한 건 아니겠지...?

"어라? 당신은...?"

그 와중에 그냥 지나가면 좋았을 텐데, 내가 너무 바라본 탓인지 저쪽에서도 나를 알아본 모양이다.

일단 도망치자, 괜히 저 이상한 여자한테 잘 못 걸렸다가 아카데미 생활을 망칠지도 몰라.

"어?"

"역시, 맞네요."

이걸 빠꾸 하나 없이 달려와서 목덜미를 붙잡다니, 역시 미친년이 맞다.

근데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거 보면 날 스토킹해서 들어온 건 아니고, 그냥 우연히 만난 건가?

그나저나 일단 잡혔으니까 무섭긴 해도 상대는 해줘야 할 것 같았다.

"정말 오랜만이에요!"

"그, 네. 오랜만입니다."

"편지는 잘 전해주셨어요!? 혹시 뭐라고 하셨나요!? 제가 깜빡하고 제 주소를 쓰지 않아서 답변을 평생 못 듣는 줄 알았어요."

그게 실수였어?

하긴 여러모로 덜렁거리는 분위기의 사람이긴 하니까.

정신을 빨통에 넣고 다니다 보면 그런 실수를 할 수도 있겠지.

"편지 내용 자체가 이해가 안 가신다고 하시던데...."

"에에, 제가 검술로 강해지면. 그렇게 좋은 작품을 그려주는 작가님을 근접전에서 항상 지켜드리겠다는 기사의 각오였는데...!"

인생을 바치겠다던 이상한 소리가, 그렇게 들으니까 굉장히 그럴듯하게 들리잖아.

애초에 만화 때문에 기사로써 지켜주겠다는 결론이 나오는 것도 조금 이상하지만, 편지의 내용에 비하면 선녀가 따로 없었다.

스토커는 아니고 그냥 표현이 서투른 좀 모자란 사람이었구나.

"이것도 인연인데 같이 점심이나 먹을래요?"

"어.... 뭐, 그러죠."

딱히 거절할 명분도 없었고.

솔직히 오해가 풀리고 나니까, 대체 왜 그런 편지를 썼는지가 조금 궁금해졌다.

"아, 편지요. 설명하자면 긴데.... 일단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의 이야기는 저희 부모님의 이야기랑 굉장히 닮았거든요?"

닮았다고...?

설마 그딴 설정의 가족이 이 세상에 실존한다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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