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화 〉 15권 화신잉태(1)
* * *
"하으, 역시 이렇게 밖을 돌아다닐 때가 좋아."
"작년에는 대체 어떤 삶을 살았던 거야...."
"진짜 이 아카데미는 동아리 없으면 너무한다니까?"
확실히 제대로 된 이유가 없으면 밖에 못 나간다는 건 빡세긴 했다.
무슨 기숙사제 입시학원도 아니고 나가는 것도 마음대로 못하냐고.
뭐, 우리야 동아리장이 나가고 싶어서 근질근질한 타입이니까 생각보다 자주 나오는 중이지만.
"뭐야, 원고 제출하러 나온 거 아니었어?"
"아, 저기 그때 그 맛있는 카페 쪽이다.
"배고프지 않아? 일단 먹고 시작하고 싶은데."
"...리아도 참."
"나는 찬성!"
"나도 상관없어."
이럴 때 보면 참 성격이 다르다 싶다.
나도 저렇게 뭐 먹으면서 노는 건 좋아하지만, 일단 만화 출시일을 앞당기고 싶어서 원고부터 제출했을 텐데.
리아는 일단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드니까 거기부터 들렀다 가자는 느낌이구나.
하긴 거기가 전시관보다 가깝긴 하지.
"나는 딸기 크림 케이크."
"로자리아는 딸기 참 좋아한단 말이야. 음, 나는 그럼 초코로 할까...?"
"어, 크레페!"
오르카는 초대형 스페셜 크레페를 주문했고, 유리아는 뜬금없이 피자를 골랐다.
여기 올 때마다 생각하는 거지만, 귀족 상대로 하는 비싼 카페라 그런지 제대로란 말이지.
지구에서의 유명 카페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퀄리티라서 감탄이 나온다.
"하움...."
"후, 역시 수요일마다 공강 맞는 거 되게 좋네. 다음 학기도 이런 식으로 생각해서 하루 비울까?"
"그게 좋겠다. 오르카, 그렇게 우걱우걱 먹으면 맛있긴 한데, 입에 다 묻잖아. 숙녀가 그러면 교양 없다는 소리 듣는다?"
"우리 엄마는 맨날 이러던데? 그래서 아빠보고 닦아달라거나, 가끔은 키스해달라고 해."
이걸 탈룰라를 걸어버리네.
로자리아는 조금 당황한 듯하더니, 그건 밖에 아니라 집이라서 그렇게 해도 괜찮은 거라고 했고.
나는 새삼스레 느껴지는 오르카의 가정환경이 대단하다고 느끼고 있었는데....
"흐음, 오르카. 근데 그건 너희 어머니가 너희 아빠랑 섹스하고 싶어서...."
"유리아!"
얘는 그런 말을 할 때 빠꾸라는 게 없나!?
정작 오르카는 그것에 악의가 없다는 걸 알아서인지, 여전히 싱글벙글 웃으면서 크레페를 먹고 있었지만.
진짜 방금 그 발언은 아직도 머리가 어지럽네.
"왜, 사실이잖아."
"표현이 좀 그렇잖아...."
"그럼 입술에 묻은 크림을 혓바닥으로 닦아내도록 유도해서 키스로 시작한 진한 섹스를...."
"섹스에서 벗어나!"
"섹스 맞지 않아? 엄마 맨날 아빠랑 섹스하고 싶어 하는데."
제일 복병은 사실 피해자인 줄 알았던 오르카가 아닐까?
로자리아와 나는 빠꾸라고는 전혀 없는 둘의 성격에 어처구니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오르카 쟤는 자기가 성인 된 다음에서야 부모님이 봉인을 풀었다더니.
그때부터 입학 사이의 짧은 시간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옴뇸뇸...."
"그 와중에 잘 먹는 모습은 보기 좋네. 피자 맛있냐?"
"응. 칼리도 먹을래?"
"아니. 느끼할 것 같아."
지금처럼 씁쓸한 커피에 달달한 초코케이크 정도가 적당하다고 생각해.
뭐, 좀 상큼한 과일 음료라도 마시고 있었으면 한입 얻어먹을 텐데.
괜히 먹으면 지금 느끼던 힐링 되는 기분이 깨질 것 같아.
"나도 빨리 로자리아 작품 보고 싶은데."
"말했잖아. 완성본이 나올 때까지는 비밀이라고."
"치.... 칼리는 보여줬으면서."
"내가 본 것도 최종본은 아니야. 그래서 나도 기다리고 있고."
나야말로 리아가 어떻게 그 내용을 개선했을지 궁금하거든?
어련히 잘했으니까 그렇게 자신하면서 보여주지 않는 거겠지만.
살짝 불안하긴 하다.
"아, 칼리는 그림 안 그려? 맨날 서류 작업만 하는 것 같아서."
"나? 나는.... 하긴 해야 하는데."
대외적으로는 아무 작품도 내지 않고 있는 거라서 골치 아프네.
안 그래도 전작도 원고 제출할 때 몰래 하느라 여러모로 애먹었었다.
유리아가 저런 질문을 하는 것 보면, 다행히 들키지는 않은 것 같긴 한데....
"너무 강요하진 말자. 어차피 그런 느낌으로 하기로 한 동아리니까."
"아, 강요하려던 건 아니었어. 저번에 본 그림 귀엽다고 생각했거든."
"...생각해볼게."
솔직히 SD로 그릴 작품이 딱히 떠오르는 게 없다.
왜냐면 내 성격과 취향상 평범한 일상물은 잘 못 그리거든.
최소 로자리아처럼 LD가 섞이는 작품이 좋은데, 그게 안 되니까 여러모로 아쉽다.
"응, 아직 생각나는 아이디어가 없는 게 큰 것 같아. 그리게 되면 보여줄게."
우리는 그렇게 자연스레 카페에서 잡담을 마친 뒤, 로자리아의 작품을 원고를 제출하러 전시관으로 향했다.
역시 여기는 평일인데도 사람이 엄청나게 많네.
로자리아가 작품 샘플을 비롯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우리는 최근에 뭔가 새로 나온 작품이 있나 싶어서 전시관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오, 유리아 작품은 더 올라갔네. 하긴 그만큼 좋은 작품이긴 해."
아카데미에 부탁해서 기존 포트폴리오 작품도 전시했더니, 나란히 최상위 전시관에 걸려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분명히 채색 방법이 서로 확연하게 다른데도, 같은 작가고 같은 캐릭터를 그렸다는 걸 알 수 있는 이 특별한 매력이 참 좋아.
망가진 것 같으면서도 매혹적인 아름다움이 최고지.
"맞아. 유리아 그림 엄청 예뻐!"
"고마워."
그것 이외에 눈에 띄는 건 오히려 만화 쪽이었다.
이번에는 이상할 정도로 얇은 만화책이 많이 올라왔네.
대신 좀 널찍하니 크면서 표지까지 단색으로 뽑아낸 저퀄리티였다.
'단가를 낮추는데, 여기서 가격까지 줄여서 엄청나게 싸게 만들었구나.'
마치 잡지처럼 생긴 만화들은, 내가 '행복은 가슴에서 우러나오는 것입니다'에서 에피소드 하나에 사용한 분량 정도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대부분은 짧은 이야기로 확실한 느낌을 전해줄 수 있는 야한 것들이 대부분이었고.
그래서인지 마치 야한 동인지 시장을 보는 것 같아서 묘한 감성을 불러일으켰다.
이러다 여기서도 얇은 책이라고 하면 야한 책이라고 알아먹는 문화가 생기는 거 아니야?
"오, 느낌 있네."
샘플로 몇 개 정도는 아카데미 만화관에 배치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단편의 야한 만화인데도, 그럭저럭 괜찮은 스토리인 것들이 많았다.
생각해보면 모든 건 이렇게 짧은 것부터 천천히 성장해야 하는데.
이 세상에서는 내가 장편 만화부터 선보였으니, 바로 길게 그리려고 해서 이상한 작품이 더 많았구나.
'애초에 예상도 못 했던 부분이니까 어쩔 수 없는 거긴 한데.'
마찬가지로 예상하지 못한 이유로 해결되었으니까 괜찮은 건가?
하여튼 이번에 새로 나온 작품 중에서 눈에 들어오는 것은 대부분 그 정도였고.
조금 차이가 나는 거라면, 이전에는 거의 없던 미친 폭유 작품이 대량으로 늘어났다는 거다.
아주 보기 좋은 현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와, 유리아 같은 가슴이 나오는 그림이 엄청나게 늘었어."
"개인적으로는 오르카 정도가 딱 적당하다고 보는데."
"에? 왜? 크면 클수록 대단한 거 아니야?"
"불편해. 가슴 밑에 땀 차서 덥기도 하고."
그나마 아카데미 제복이 밑가슴이 드러나서 다행이지.
그게 아니면 마력으로 시원하게 해주는 브래지어라도 입었어야 했을 거라며 불평했다.
하긴 아카데미 제복처럼 훤히 드러난 걸 입어도, 저번에 보니까 땀이 뚝뚝 떨어지던데.
폭유가 좀 더워 보이긴 하더라.
"자위할 때 자기 입으로 젖꼭지 빨긴 해야 하잖아? 그러려면 오르카 정도 크기는 되는 편이 편하지? 그래서 딱 그 정도가 좋을 것 같아."
"오호...."
얘들은 어떻게 여기서까지 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걸까.
가끔은 좀 존경스럽게 느껴지기도 한다.
너희들이 최고야.
"아, 끝났어?"
"응, 이건 너희한테 주는 선물."
"어? 와아!"
'핑크빛 혼자만의 일기장'의 샘플을 4권을 만들어달라고 부탁한 모양이다.
0쇄라고 적힌 몇 개 없는 녀석일 테니, 엄청난 레어리티가 높은 작품이 아닐까?
뭐, 어차피 아직 이 세상에서 판본까지 신경 쓰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만.
"아, 잠시만. 나 펜 망가진 게 많아서 슬슬 보충해야 해."
"아, 그럼 그쪽 샵도 들렀다가 가자."
나도 오랜만에 뭐 새로 나온 것이 있나 싶어서 둘러볼 겸, 다 같이 그림 도구 판매점에 들어갔다.
유리아는 오르카한테 도구들에 관해서 설명해주면서 같이 시간을 보내고 있었고, 로자리아는 원했던 것이 있었던 만큼 빠르게 그쪽으로 향했다.
음, 새로 나온 스크린톤이나 스크린톤 펜은 특별한 게 없네.
'대부분은 조금만 컨트롤하면 기존 것들로 되는 거고.... 뭐, 굳이 아카데미 짐을 늘릴 필요는 없으니까.'
이 정도면 이번에는 굳이 구매하지 않고 넘어가도 괜찮을 것 같았다.
그것 이외에는 뭔가 특별한 것이 있나 싶어서 찾아보는데.
그림 사본 비슷한 느낌의 무언가를 발견했다.
"이건 또 뭐야?"
가격은 그림 사본보다 살짝 비싼 느낌인데.
일반적인 그림보다 뭉개진 색감이 나오는 걸 봐서, 디테일한 그림이면 보기 싫게 나올 것 같았다.
이건 가격도 비싼데 퀄리티가 왜 이런....
"오?"
뭔가 했더니, 붙일 수 있는 스티커 비슷한 거였나보다.
아 물론 기존 그림도 풀 발라서 붙이면 되는 거긴 한데.
이건 뒷면까지 프린팅한 색이 칠해진 느낌이라, 유리 같은 곳에 붙이면 분위기가 괜찮아 보일 것 같네.
아무래도 아직은 퀄리티가 떨어져서 제대로 활용하기는 무리인 듯한 기술이지만.
이런 기술이 나중에 발전하면, 내가 아는 그런 완벽한 스티커 쪽 기술로 발전하는 거겠지.
혹시나 해서 하나 구매해서 붙여 봤더니, 내가 아는 스티커랑 다르게 접착력이 워낙 강해서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일반 종이랑 재질이 달라서 방수도 되는 모양인데....
"아, 여기 이 액체로 녹여서 떼어내는 거구나."
그걸 바르니까 엄청 쉽게 사라져서 큰 문제는 없었다.
이러면 좀 활용도가 있지 않을까 생각하다가, 문득 떠오르는 예정 작품이 하나 있어서 고민에 빠졌다.
그 작품 굿즈 만들기에는 이게 재료로 딱 맞지 않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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