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5화 〉 15권 화신잉태(4)
* * *
"에헤헤...."
일단 오르카가 몸 상태가 단정하도록 만들긴 했는데.
결국 브래지어를 안 입으면 별 차이가 없는 것 같기도 하다.
자위 때문에 흥분해서 크게 부풀어 오른 유두가 다 보이잖아.
"...브래지어는?"
"불편해서. 입을까?"
"아, 아니야. 굳이 그렇게까지 하란 건 아니야. 불편하면 안 입어도 괜찮아."
그냥 좀 눈길이 가긴 하는데, 쉬러 온 동아리 방에서 그것까지 제약하고 싶진 않았다.
뭐 일부러 저러는 것도 아니고, 솔직히 브래지어 입고 있으면 불편한 건 사실일 테니까.
까놓고 말해서 옷 때문에 그렇지 유리아랑 로자리아도 지금 브래지어 안 입고 있잖아.
"오르카 그럴 때는.... 잠시만. 이거로 살짝 가려."
"아하."
어디선가 담요를 가지고 온 로자리아가, 오르카의 가슴을 가려줬다.
미니스커트 입은 다리를 가려주는 게 아니라 가슴을 가려주는 담요라니.
솔직히 좀 신선한 장면이었다.
'생각해보면 저런 굿즈도 만들고 싶네.'
담요에 일러스트 박아서 파는 거 국룰이지.
다키마쿠라 같은 베개류도 괜찮고, 아니면 뭐 아크릴 스탠드 같은 것도 있고.
근데 대부분은 현재 인쇄 기술로는 힘들다는 게 문제다.
아, 그나마 아크릴 스탠드 식의 제품은 되겠네.
"짠."
"어, 뭐야. 이게 신작이야? 아니 근데 전혀 뭔 그림인지 모르겠는데."
일단 여자 캐릭터가 그려져 있다는 건 알겠는데.
그 이상은 두 개의 색으로 각기 그린 듯한 그림이 난장판으로 섞여 있어서 그런지 제대로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무슨 현대 미술 같은 모습이라서 눈만 엄청 어지러워.
"잠시 불 끄고 커튼 좀 칠게요."
아, 뭔가 특별한 관람법이 있는 작품인가?
유리아가 워낙 특이한 아이디어를 많이 내는 터라, 이번에는 좀 기대하면서 상황을 지켜봤다.
커튼을 친 이후에는 유리아가 마법진을 그려서 마법을 그리기 시작했다.
"어?"
그리고 마법이 발동하자, 온 세상이 푸른색으로 바뀌면서 그림에 있던 일부 색이 사라져버렸고.
오히려 흑백 그림 하나만 있는 것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걸 노리고 그림을 그렇게 그린 거였구나?
"신기하네. 그나저나 그림의 느낌이 기존이랑 많이 달라."
"이상해?"
"아니, 전혀."
이번 그림도 지난 그림과 이어지는 같은 캐릭터였다.
모든 것을 잃은 얼굴로 섹스하던 그 캐릭터가, 여기서는 굉장히 평범한 얼굴로 미소 짓고 있었다.
와, 되게 평범한 미소인데도 기존 작품이 떠올라서 그런지 굉장히 가슴이 아파진다.
쟤가 저렇게 웃을 수 있는 캐릭터였구나.
"자, 여기서 마법을 바꾸면."
유리아는 마법진을 새로 그리더니, 방금 마법을 취소하고 새로 마법을 발동했고.
파란색 빛이 아니라 빨간색 빛이 시야를 채운다.
그러자 방금까지 보고 있던 그림의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면서, 이게 맞나 싶을 정도로 다른 광경이 눈에 확 들어왔다.
바뀐 그림은 기존 작품처럼 캐릭터가 모든 걸 잃고 망가진 상태로 잔뜩 범해진 느낌이었다.
신체에 잔뜩 흐르는 정액의 모습이 굉장히 무심하게 느껴져서 역겨움까지 올라오는, 여전히 퇴폐적인 유리아 작품 특유의 감각이 남아있는 그림이네.
"와...."
"이런 방법은 어떻게 생각했어?"
"저번에 론도 교수님이, 이런 식으로 활용하는 마법도 있다면서 알려주셨잖아."
"어, 그때 색이 다른 빛 만드는 마법 알려주셨지?"
"밤에 연습하는데, 보이는 색이 다르더라고."
거기서 착안을 한 모양이다.
되게 당연한 과학적 원리를 이용한 거긴 한데.
그걸 이 시대에 마법 배우다가 생각했다는 점이 진짜 놀랍네.
여러모로 천재적인 발상을 많이 해내는 애라니까.
"흠, 근데 이거 빛을 비춰야 하면 전시관 하나를 통째로 빌려야 하는 거잖아?"
"암막으로 들어가서 보는 것도 가능하니까 그럴 필요는 없을걸. 아, 그것 자체가 번거롭구나?"
"맞아요. 그게 고민이에요. 마법으로도 암막을 치는 것도 가능한데, 그래도 결국 암막처럼 주변이 검게 변하잖아요."
무조건 작품을 감상하려면 특정 암막 공간 안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문제라는 거네.
그래서 그 해결법을 찾고 있다고 했다.
확실히 그런 암막이면 어그로를 잘 끌긴 하는데, 이렇게 갑자기 딱 그림이 바뀌는 것에 대한 쾌감을 주기에는 부족하긴 하다.
이건 아무래도 전조 없이 갑자기 그림이 바뀌어야 깜짝 놀라는데.
"음...?"
나는 거기까지 생각하다가, 이런 종류의 그림을 굉장히 많이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잘 생각해보니까 이게 조명이 아니라 배경색으로 비슷하게 하던 게 있었다.
인터넷에서 클릭하면 바뀌는 그림이라고 유행했던 거.
투명도가 있는 PNG 파일로 흑색과 백색 단색으로 그림을 그려서 겹쳐 놓는데.
이러면 배경이 백색이면 백색은 같은 색이라 보이지 않고, 흑색으로 그린 그림만 정상적인 회색조가 되어 첫 번째 흑백 그림이 나온다.
반대로 배경이 흑색이면 흑색은 보이지 않게 되고, 백색으로 그린 그림만 정상적인 회색조가 되어 두 번째 흑백 그림이 나온다.
이게 휴대폰에서는 클릭 전에는 배경이 흰색이고, 클릭해서 확대하면 검은색인 경우가 많았고.
그걸 이용해서 하나의 그림에 두 개의 그림을 넣는 것이 유행했었다.
그거랑 이 조명을 이용해서 하나의 그림을 여러 개로 보는 게 비슷하지 않나?
"유리아. 이건 내 아이디어인데."
얇으면서 튼튼한 유리판을 준비해서, 그 위에 내가 설명한 방식대로 그림을 그리고.
뒷면에 배경으로 넣는 흰색과 검은색을 바꾸면 비슷한 효과를 줄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해줬고.
간단하게 종이를 오려서 비슷하게 시험해줬더니, 금방 이해한 유리아가 고개를 끄덕이면서 가능할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런 생각은 전혀 못 했어. 처음에 불빛을 비추는 거에서 착안해서 그런지,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만 생각했는데...."
"그치? 이거 괜찮지 않아?"
"응, 그렇게 해볼래."
그리고 생각해보니까 어둠 문자를 그려서 유리 뒷면에서 빛이 반사되지 않게 만들면.
그게 곧 완벽한 검은색이 되는 거잖아?
그래서 아예 그것까지 작품에 기능으로 넣으면 더 완벽하겠다 싶었다.
"그건 내가 도와줄 수 있을 것 같긴 하네. 기록 마법은 여기서 나만 사용할 줄 아니까."
"부탁할 게 리아야."
"왜 그걸 네가 부탁하는데?"
"부탁할게요. 로자리아 선배."
"그래. 그러니까, 유리 뒤쪽에서 빛이 돌아오지 않게 만들면 된다는 거지?"
"엉, 그림은 건드리지 않으면서."
뭔가 동아리가 다 달라붙어서 이렇게 작품 하나를 개선하는 느낌이 나쁘지 않다.
근데 이렇게 되면 그림 자체를 다시 그려야 하는 거 아닌가 싶어서 유리아한테 물었는데.
유리아는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냐는 듯한 표정을 했다.
"이것도 몇 번 실패해서 나온 거고. 별로 만족스럽지도 않아서. 당연히 새로 그려야지."
그런가?
나는 이 정도면 충분히 예쁘게 나온 그림이라고 생각했는데.
기존에 어마어마하게 예쁜 그림만 그려서 그런지, 이거로는 만족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 그리고. 이렇게 되면. 이거 우리 동아리 이름으로 내도 괜찮아?"
"화가 이름에 그라베다 아카데미 만화 동아리라고 적자는 소리야?"
"응."
"하지만, 이건 네 작품인데?"
"아니야. 칼리가 아니었으면 어차피 내가 원하는 걸 그대로 표현하지는 못했을 거잖아?"
그림보다 그 아이디어가 훨씬 중요하다면서, 유리아는 무조건 내 이름을 넣겠다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못하는 기록 마법 작업을 로자리아가 해주면 로자리아까지 작업에 참여하니까 동아리를 이름으로 넣자는 거다.
"동아리 이름에 년도 적고, 각기 역할도 함께 적어두면 문제없긴 하겠네."
"네, 그러면 될 것 같아요."
유리아가 괜찮다면야 나는 상관없긴 한데.
근데 그러면 저기서 홀로 슬퍼하는 오르카는 어떻게 할 건데?
"오르카는.... 아, 그럼 내 조수는 어때? 내가 작업하는 동안 내가 필요하다고 하는 걸 다 가져다주는 거야."
"할래! 할래, 할래!"
그거 그냥 셔틀 아니냐?
그래도 유리아 작품에 이름을 올리는 대가로, 작품 만드는 동안 셔틀 하는 정도면 괜찮은 거래긴 하네.
오르카는 자기가 뭐라도 동참한다는 것 자체를 기뻐하는 것 같기도 하고.
뭐, 본인이 좋아하면 된 거겠지.
"후, 이름이 올라가면 가볍게 못 하는데. 리아야, 조금 복잡한 설정도 괜찮지?"
"...너무 어려운 것만 아니면?"
"오케이."
그럼 나도 일단 참가한 셈이니까, 그림이 변화할 때의 연출은 좀 제대로 해봐야겠다.
그래봐야 별 건 아니고, 어떤 주기에 어떤 느낌으로 그림이 바뀔지를 결정하는 정도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것만으로도 이번 작품이 주는 감동에 큰 영향을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갑자기 유리아가 가져온 그림 하나로 시작된 기획이었지만, 우리는 생각보다 진지하게 이 프로젝트에 힘을 싣기 시작했고.
그 덕분에 내가 오늘 동아리 방에서 못 잤던 잠을 자려던 계획도 물 건너가 버리고 말았다.
다들 야한 것만 잔뜩 관심 있는 것 같아도, 이럴 때 보면 그림에 진심이라서 멋지다니까.
솔직히 외출의 핑계를 위해 만들어진 동아리지만, 지금만큼은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렇게 협업하는 재미도 참 오랜만이야.
"...다녀왔어."
"되게 졸려 보이네."
"갑자기 일이 생겨서 계획했던 것처럼 자는 게 불가능했거든."
그 대신 마음이 따뜻해지긴 했지만.
그래도 졸린 건 어쩔 수 없는지, 한계까지 도달한 잠이 눈꺼풀을 짓누르기 시작했다.
오늘은 아까 작업하던 그림의 마무리를 하고 자야 하는데....
"설마 안 자려고?"
"할 게 조금 남아서...."
"차라리 내가 일찍 깨워줄 테니까, 그때 일어나서 해."
"...진짜?"
"어."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잠들었지만.
니아가 나를 약속대로 미리 새벽에 깨우는 일은 없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