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5화 〉 17권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내일도 답답하다(4)
* * *
"또 시작이네."
"아, 니아 먼저 자. 나는 하고 싶은 게 생기면 어쩔 수 없다니까."
"건강부터 챙겨야지. 나도 그렇게 하던 때가 있었는데, 오히려 능률만 줄더라."
그런가.
그래도 요즘에는 오르카랑 로자리아한테 들켜 버려서, 유리아가 없을 때는 동아리 방에서 작업이 가능해서 좀 나을 거다.
일단은 이렇게 해보다가 나중에 힘들면 그때 결단을 내리면 되는 거잖아?
'정 힘들면 유리아한테도 밝히면 되니까.'
아직은 굳이 밝힐 이유가 없기도 하고, 최대한 퍼지지 않았으면 좋겠기에 다물고 있지만.
유리아까지 내가 시우라는 사실을 알면, 최소 동아리 방에서는 편하게 작업할 수 있게 된다.
그럼 지금처럼 새벽에 작업하는 시간은 더 줄일 수 있겠지.
'후우, 니아도 잠들었으니까 슬슬 신작 설정을 더 고민해봐야 하는데.'
사실 여러 장르의 작품을 고민해보고 있는데.
지금 하고 싶은 건,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의 후속작이었다.
그럭저럭 제목을 바꾸기도 괜찮아서, 신작의 이름은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내일도 답답하다'로 정해놨다.
'전작의 마지막이 하프가 태어나는 부분이었나?'
'엘프'와 '오크' 사이에서 태어난 딸아이 '하프'의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상 코미디.
정도가 이번에 내가 기획하고 있는 작품의 정체였다.
전작이 야한 장면이 자주 나오긴 해도, 기본적으로는 순애 러브 코미디에 가까운 작품이었으니.
이번에 야한 것보다는 더 장난스럽고 따뜻한 분위기에 집중하고.
가능하면 조금 진지한 이야기도 해보면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매번 야한 이야기만 한다고 좋은 건 아니니까.
'...어쩌면 현실 표절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겠네.'
그런데 이게 워낙 내 설정이랑 오르카네 집안이 비슷하다 보니까.
아무래도 이야기를 듣다 보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어있다.
아니 오르카가 성인이 될 때까진 자제했다는 사람들이, 그 전부터 옷 위로 자지 만지는 거로 성희롱하거나 딥키스를 하는 둥 할 거 다 했던데.
처음에 들었을 땐 대체 뭘 자제한 건가 싶었다.
'...그래서 성인이 된 이후를 물었다가 정신 나갈 뻔했지.'
딸이 방으로 들어왔는데 여전히 떡치고 있어서, 섹스하는 부모님과 대화를 나눴다는 썰은 내 인생에서 가장 황당한 이야기일 거다.
솔직히 고삐 풀리자마자 거기까지 달려갔다는 게 너무 당황스러웠다.
'대충 하프의 나이가 커가는 걸 기반으로 에피소드를 짤 테니까, 하프가 성인이 되려면 중반 아니면 후반쯤이 되겠네.'
그때 이런 느낌의 에피소드를 잘 쓰면 웃기게 잘 표현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그대로 쓰지는 않고, 고삐를 풀고 달린다는 점 정도만 채용할 생각이다.
아무래도 분위기랑 내용은 어쩔 수 없이 비슷하게 느껴지겠지만, 그건 이미 전작에서부터 이어져 온 거라서 바꿀 수가 없다.
여기서 현실 피하겠다고 너무 바꾸면 전작의 캐릭터 성격들이 박살 나거든.
"후우...."
"칼리, 안녕!"
"어, 오르카 안녕."
어제는 그렇게 적당히만 구상하다가 잠자리에 들었는데.
생각해보니까 오늘은 오르카랑 동아리 방 시간이 길게 겹치는 날이었다.
저번에 신작을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의 후속작일 것 같다고 말해줘서인지, 오자마자 나에게 신작에 관해서 묻는 것이 귀여웠다.
"어차피 아직 구상 단계라니까. 막 스토리가 팍팍 나오고 그런 건 없어."
"히잉...."
"아, 그래도 대충 나온 에피소드는 있어."
야한 것에는 항상 강력했지만, 아기를 키우고 다루는 것에는 한참 어설픈 초보 엄마 엘프와.
원래부터 좀 잘 당황하고 허둥거리는 초보 아빠 오크의 우당탕 육아일기 에피소드.
이건 오르카도 기억에 없던 시절이라 비슷한 이야기도 말해주지 않았기에, 표절 시비가 일어나지 않을 거라고 자신하는 파트였다.
"그리고 이제 하프는 좀 개구쟁이여야지. 어릴 때는 엄마 아빠가 난리를 치지만, 조금 커서 적응되었다 싶으면 하프가 사건을 일으키고 부모님이 수습하느라 고생하는 내용을 그릴 거야."
"오.... 맞아, 맨날 엄마랑 아빠가 나 어릴 때 엄청 사고뭉치였다고 했어."
너는 어릴 때가 아니라 현재 진행형으로 사고뭉치잖아.
하여튼 이러한 여러 가정에서 공감할만한 이야기를 하면 재밌게 보는 사람이 많지 않을까 싶었다.
물론 대부분의 귀족 집안은 사용인을 써서 아이를 키우지만, 그렇다고 아기랑 동떨어져 있는 게 아니라 힘든 것만 맡기는 것이라서 추억 자체는 남아 있는 경우가 많다.
"뭐, 기본적으로는 그렇게 시간이 흘러가면서 바뀌는 모습을 그리고 싶은 거라. 사건들 자체에 집중하진 않을 거야."
피식거리면서 웃다 보면, 어느새 하프가 훌쩍 커서 성인이 되어있는 느낌.
최대한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하프가 자라나는 가정의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이 목표였다.
그리고 내가 이번에 이런 작품을 그리고 싶다고 생각했던 건, 오르카의 영향이 크다.
오르카가 워낙 특이한 애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대체 어쩌다 저런 애가 되었을까 고민하게 되고.
그러다 보니까 요즘 엘프랑 오크랑 관련된 소재가 자주 떠오른단 말이지.
물론 오르카 같은 말괄량이 딸인 '하프'가 엮인 것들로.
"그럼 하프가 사랑을 찾아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섹스하는 내용도 나와?"
"아니, 그건 아닐 것 같아. 가족 이야기가 중점이 되는 거니까."
물론 하프가 사랑에 빠지고, 그것에 아빠인 오크가 고통받는 것도 재밌긴 하겠는데.
뭔가 새로 캐릭터 등장시키면서까지 하프를 누군가에게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음, 그건 싫으니까 갈등은 꿈이라던가 이런 거로 하는 편이 좋으려나.
'진지한 이야기를 갑자기 넣으려니까 턱 막히네. 소재가 없어.'
정 안되면 그런 것 없이, 순수하게 힐링 개그로만 가도 되긴 하니까 상관없긴 한데.
아무래도 저번 책에서 하프가 태어나는 훈훈한 마무리가 되었던 것처럼.
이번에도 뭔가 여운을 남기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 그렇다.
"아, 그리고. 너한테 참고해서 괜찮나 싶긴 한데, 하프가 성인이 된 다음에 폭주해서 야한 짓 하는 엘프랑 오크 이야기 넣을 것 같아."
"정말 우리 집 이야기가 들어가는 거야?"
"좋아할 일일까.... 그대로 쓰는 건 아니고, 아이디어만 참고할 거야."
"그대로 쓰면 안 되는 거야?"
"내 양심이 허락하지 않아서."
오르카는 써도 된다고 하는 걸 넘어서, 오히려 쓰면 좋겠다고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사랑하는 사람의 부모님이 떡치는 이야기를 그대로 박아다 쓰기에는 좀 그래.
이게 현실 표절을 떠나서 하필이면 부모님 이야기잖아....
조심스러워질 수밖에 없어.
"아, 맞아. 그 이야기 하니까 생각났어. 저번에 론도 교수님이 그린 그림 보여줬잖아. 이름은 기억 안 나는데, 그 엘프한테 오크가 꼬추 들이민 그림."
'백광'같은 명작을 그런 식으로 기억하고 있는 네가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심지어 틀리진 않았다는 점이 매우 사람을 꼴 받게 만든다.
전쟁 중에 오크가 엘프를 범하기 위해 극대 쥬지를 배에 꾹 들이미는 그림이니까 그 설명도 맞긴 하지.
"그거 보고 엄마가 감동하더니, 바로 사서 액자에 걸어놨다가. 아빠가 싫어해서 창고에 박혔어. 아빠가 부끄러워하면서 이런 거 말고 나만 봐달라고 해서 깜짝 놀랐다니까?"
"그런 면이 있으셨어?"
"응, 그 뒤로 같이 방에 들어가서 온종일 섹스하더니. 아빠 얼굴만 반죽음이 되어서 나왔어."
왜 그 집안은 항상 기승전 섹스로 끝나는 건데?
확실히 사랑하는 여자가 가상의 오크가 가진 극대 자지 그림 보고 헤으응 거리는 건 질투할 수도 있긴 하겠네.
그런 아버지 밑에서 자랐는데, 정작 내가 여러 여자랑 사귄다는데 그 여자들이 자기랑 친하니까 '오히려 좋아'를 박아버리는 오르카는 대체....
그 와중에 정작 마무리가 착정 당하는 거라는 점이 저 이야기의 웃음 포인트라고 생각한다.
아마 그날 오르카네 어머니는 그까짓 가상의 오크는 기억에서 깨끗하게 지울 정도로 행복하시지 않았을까?
반대로 오르카의 아버지는 워낙 기를 빨려서 고생 좀 하셨을 거고.
"너희 집안 이야기를 듣다 보면 항상 감탄이 절로 나온다니까."
"그래? 나는 평범하다고 생각하는데."
네가 맨날 보고 자랐으니까 평범하다고 생각하지.
내가 보기엔 그 정도로 특이한 가정은 일부러 찾아도 찾기 힘들 거야.
"부모님 보고 싶지 않아? 물론 엄청 오래된 건 아니지만, 맨날 같이 살다가 갑자기 떨어진 거잖아."
"조금? 그래도 엄마랑 아빠가 보고 싶을 때는 이거 보면 나아져."
내 만화를 무슨 가족 사진첩처럼 쓰지 마....
그렇게 태클을 걸고 싶었지만, 방금 그 질문에 진지하게 울적해져 있는 모양새라서 참았다.
하긴 오르카네 집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애한테 뭘 보여주는 거야 싶은 에피소드도 있지만, 오르카를 사랑하는 것이 진하게 전해지는 가슴 따뜻한 에피소드도 많았으니.
그 사랑을 직통으로 받던 오르카는 집이 그리울 만도 하다.
솔직히 변태적인 분위기가 이상할 정도로 녹아든 가정이라는 점만 빼면, 이상적인 가정의 모습이잖아.
"응?"
그때 갑자기 평소처럼 벌컥 문이 열리는 것이 아니라, 조심스럽게 노크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우리 동아리원이 저런 예의 있는 행동을 할 리가 없으니까 손님인 것 같다고 생각하는 순간.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온 탓에 누가 온 것인지 파악할 수 있었다.
"계시나요?"
"니아?"
니아가 무슨 일로 만화부 부실까지 찾아온 건지 모르겠다.
나를 찾으러 왔나 싶어서 나가봤는데, 혹시 오르카가 있냐고 물어봐서 당황했다.
설마 학생회 일로 온 건가?
"...나?"
"오르카, 진정하면서 들어."
"......?"
"너희 아버지가 쓰러지셨어. 지금 요양 중이라는데, 네가 병문안 가야 할 것 같아서 소식 전해주러 온 거야."
그리고 니아가 가져온 소식은 내가 예상하기 시작한 것들보다 훨씬 더 무거운 내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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