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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86화 (86/229)

〈 86화 〉 17권 ­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내일도 답답하다(5)

* * *

"잠시만요. 그게 무슨...."

"일단 지금은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셨다고는 들었는데, 정확하게 어떤 상태이신지는 나도 몰라."

"......."

순간적으로 당황한 오르카가 내가 처음 보는 표정을 지었다.

그나마 비슷한 건, 자신과 부모님이 핍박받았다고 이야기할 때 지었던 쓴 표정 정도.

그래도 그건 과거 이야기라서 웃으면서 넘길 수 있는 수준이라, 어느 정도 씁쓸해 보이는 정도로 넘어갔지만.

지금은 예상치 못한 나쁜 상황이라서 그런지 제대로 된 표정이 나왔다.

'...오르카가 저러니까 기분이 이상하네.'

물론 오르카가 진지한 부분에 대해서는 잘 고민하는 성격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아무래도 항상 밝고 힘찬 이미지를 유지하려고 하는 성격이다 보니, 저렇게 제대로 멘탈이 깨진 표정과 대비가 심하게 느껴졌다.

저러면 혼자 갔다가 괜히 문제가 생길 수도 있겠는데.

"윽...."

"괜찮아?"

"괘, 괜찮을 텐데...."

실제로도 다리가 덜덜 떨리면서 제대로 움직이지 않는 문제가 생긴 모양이다.

나는 좀 몸이 편찮으신 정도일 거라며, 큰 문제는 없으리라 위로해줬지만.

그걸 알고는 있지만, 아무래도 워낙 몸이 튼튼하셨던 분이라서 이런 일은 처음이라 당황했다고 한다.

하긴 오크가 어지간한 일로 빌빌거리는 일은 들어본 적 없긴 해.

"업혀."

"에...?"

"걷기 힘들잖아? 내가 업어서 데려가 줄게."

"하지만...."

"니아, 혹시 내가 같이 나가도 괜찮을까? 대충 동아리 활동 핑계 대면 괜찮을 것 같은데."

일단 내가 동아리의 부회장으로 등록이 되어 있는 만큼, 사유서만 그럴듯하게 적으면 외출을 하는 것에 문제는 없을 거다.

솔직히 이대로 그냥 보내기에는 오르카의 상태가 매우 좋지 않아 보였다.

물론 지금 다리를 움직이지 못하는 건, 일시적인 충격에 의한 거라서 금방 회복되겠지만.

그래도 최대한 빨리 가서 자신의 아버지가 멀쩡하다고 확인하는 편이 정신 건강에 좋을 테니까.

"핑계 대지 않아도, 내가 설명할게. 지금 혼자서 갈 상태는 아닌 것 같네."

"응, 고마워."

"아니야. 사실은 내가 서포트 해야 하는 건데, 아무래도 오르카는 네가 옆에 있는 편이 안정될 것 같네."

...뭐 그건 아무래도 그럴 수밖에 없지.

나 같아도 비슷한 상태이면 친한 사람이 도와주는 편이 나을 것 같다.

오르카는 괜찮다면서 걸을 수 있다고 바둥거렸지만, 나는 네가 그러면 오히려 내가 아프다면서 그러지 말라고 하는 식으로 제압했다.

어딜 걷지도 못하는 게 까불어.

"하지만, 이런 꼴이면 내가 지키는 게 아니라...."

"아직 기사도 아니면서 기어오르지 마. 아직 우리는 그냥 친구 사이고, 그럼 당연히 서로 지킬 수도 있는 거지."

"...응."

그리고 기사라고 해도, 내 사람인 만큼 내가 해줄 수 있는 선에서는 지켜주는 거야.

그래서 매번 기사로 주인의 개처럼 일한 후에, 나이가 들어서 뒤늦게 정치에 발을 들이는 기사 가문 사람들도 대우를 받는 거고.

뭐, 그거랑 이거는 조금 다를지도 모르겠지만.

워낙 커다란 가슴이라 덥다고 느껴질 정도로 잔뜩 등에 달라붙는데.

그 와중에 더 신경 쓰이는 건, 마치 나한테 녹아서 달라붙은 것처럼 붙어있는 오르카의 모습이었다.

얘가 진심으로 어리광부리니까, 오히려 평소보다 어른스러운 느낌으로 달라붙어서 머리가 복잡해지네.

"여기구나. 은근 엘프가 살 것 같은 집이긴 해."

"완전 시골구석 같지? 나는 그래서 예전부터 수도처럼 도시에서 사는 거 동경했는데, 오크랑 오크 하프의 취급 때문인지 거절당했어."

"그게 아니라 그냥 이런 걸 좋아하셨을지도 모르지?"

이런 건 결국 취향이라고 볼 수도 있는 부분이니까.

어차피 내부에는 생필품에 가까운 마법 도구는 다 갖춰져 있을 거 아니야?

솔직히 그다지 수도랑 먼 거리도 아니라서 살기 좋아 보이는데.

까놓고 말해서 내가 지내는 별장이랑 살아가는 난이도가 크게 다를 바 없어 보인다.

"예전에는 이렇게 도시에 가까운 집인 줄 몰랐거든."

"...어릴 때는 몰랐어?"

"응, 엄마가 마법으로 내가 못 나가게 이리저리 막아놓으셨대. 왠지 숲이 아무리 걸어도 비슷하게 생겼다 싶더라니...."

어린 오르카가 워낙 사고뭉치니까, 길을 잃지 않도록 혼자서 나가지 못 하게 해놨던 모양이다.

그러다가 성인이 되어서 그걸 해제하고 나니까 엄청나게 도시에 가까운 곳에 산다는 걸 알게 된 거지.

꽤나 허탈했겠는데.

"그래도 엄마가 나쁜 의도로 그런 건 아니라는 걸 알기도 하고. 성인 되고 난 뒤에 솔직하게 말해주셔서 화는 안 났어."

"그럴 때는 한 번 화도 내보고 그래도 괜찮은데."

"후후, 화는 안 냈지만 그걸 인질로 생일날 혼자서 수도 여행을 하겠다고 선언했었지."

그리고 그때가 딱 내가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를 선보였을 때였고.

자신이 하프 오크인 걸 알아보고 친절하게 다가와 주는 친구와 사람들을 만났다고 한다.

그게 계기가 되어서 편지까지 쓰고 나한테 달려들었던 거구나?

"심지어 아빠가 걱정하느라 어지간하면 나 혼자서 돌아다니지 말라고 할 것 같은 상황이었는데. 그렇게 분위기가 바뀐 이후로는 검술 수련하는 조건으로 마음대로 놀러 다녔어!"

물론 정작 그런 권한을 얻었음에도, 아카데미에 입학하기 위해 검술 연습을 하느라 놀지는 못했다고 한다.

그래도 이렇게 아카데미에 와서 동아리 친구들과 즐기고 있으면 굉장히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래, 역시 너는 그렇게 웃고 있는 편이 훨씬 낫다.

"후우...."

"괜찮을 거야."

"응."

그리고 한참을 문 앞에서 고민하던 오르카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고.

어떤 엘프 미녀 한 분이 무릎을 꿇은 채로 양팔을 위로 올리고 있는 모습이 드러났다.

그리고 한쪽 침대에는 좀 지쳐 보이는 오크 한 명이 등을 기대고 앉아 있는데, 워낙 몸이 우람한 탓에 꽤 큰 크기의 침대가 귀엽게 느껴질 정도였다.

"아빠...!"

"오르카?"

언제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냐는 듯, 오르카는 훌쩍 뛰어내리더니 자신의 아빠에게 뛰어가서 안겼다.

오, 저렇게 보니까 오르카가 엄청 쪼그매 보인다.

살짝 피곤해 보이긴 하지만, 그래도 역시 오크 특유의 압도적인 신체 피지컬이 눈에 들어와.

"그래, 우리 딸. 미안하다. 걱정하게 했네."

"괜찮아? 무슨 일이야. 응?"

"별거 아니야. 나도 슬슬 늙었다 보니, 예전 같지 않아서 몸이 허한가 봐."

아마 오르카의 아버지 연세가 대충 50대 후반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그럼 오크 입장에서는 꽤나 나이를 먹은 편에 속하기는 한다.

오크는 기본적으로 인간보다도 짧은 수명이라, 80세쯤이 평균 수명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인간이 요즘 100세를 가볍게 넘기는 추세라는 걸 고려하면 확실히 짧다.

몇백 년을 사는 엘프랑은 당연히 엄청난 차이가 있고.

"아...."

오르카도 거기까지 생각이 닿았는지, 표정이 굳어졌다.

당장 자신의 아버지가 노년을 걱정해야 하는 시기가 와버렸다는 건, 확실히 마음이 아픈 일일 거다.

하여튼 이번 원인은 뭔가 병 같은 것이 아니라, 나이가 들어서 쇠약해지신 것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미안해 여보!"

"당신은 거기서 손 조금만 더 들고 있어."

"...흐잉"

"엄마는 또 왜 저러고 있어요?"

"애초에 쓰러진 원인의 절반은 저 여편네 때문이니까 그렇지. 조치가 조금만 늦었어도 위험했다는 이야기 못 들었어? 힘들다는 데도 그걸 기어코 쥐어짜니까 내가.... 아, 손님이 있었지. 미안하네. 워낙 오랜만에 딸을 만났더니 신이 난 모양이야."

"아닙니다. 신경 쓰지 마십쇼. 오히려 보기 좋습니다."

그러니까, 나이를 먹어서 쇠약해진 몸 상태를 생각하지 않고.

오르카네 어머니가 열심히 착정하고 쥐어짠 결과물이 이번 사태라는 거구나.

오, 정말 쓰러진 원인이 오르카네 집안다워서 어질어질한데....

"그나저나 누구시니? 혹시 아카데미에서 사귄 남자친구? 후후, 딸아이가 실례가 많...."

"손 제대로 올려."

"히잉...."

오르카한테 들었을 때는 어지간하면 아버지가 어머니한테 꼼짝 못 한다는 느낌이었는데.

아마 상황이 상황인 만큼, 진짜로 화나셔서 이런 분위기로 반전된 모양이었나.

왠지 어머님은 감당하기 어려운 느낌이라서 오히려 다행이라는 느낌은 있네.

"같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고, 동아리 활동도 같이하는 칼리 흐 글라디스라고 합니다."

"허어, 글라디스 가문의.... 부족한 딸아이지만 잘 부탁하네."

"아, 검술부 아닙니다. 마법부에요. 지금 오르카는 1학년 검술부 성적 톱이고요."

"칼리는 마법부 톱이야!"

"그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글라디스 가문이 마법부라니, 참 살면서 여러 일 많이 겪어."

범해달라고 쫓아다니는 미친 엘프랑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겠다고 난리 쳤을 때부터 인생이 뭔가 이상해진 기분이라고 말씀하시는데.

확실히 나도 요즘 이 세상이 이상하다고 느끼고 있다.

어떻게 현실에 실제로 그런 커플이 존재할 수가 있는 거지?

"아무튼, 너무 걱정하지 마. 처음에는 너무 아파서 진짜 죽는 줄 알았는데. 치료받고 나니까 괜찮더라."

"그래도...."

"아카데미 열심히 다녀서 꿈을 이룬다고 했잖아? 멋진 기사가 된 모습 보여주겠다며?"

"...응!"

근데 오늘 왠지 그 황당한 커플이 이룩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정을 직관하는 느낌이었다.

살짝 개그 같은 면이 있지만, 그러면서도 이 훈훈한 분위기가 참 좋아.

특별히 소재라고 부를 것은 아니지만, 이 따뜻한 분위기만큼은 작품을 그리면서 많은 도움이 될 것 같다.

"후, 그만 되었으니까 손 내리고. 손님도 왔으니까 뭐라도 좀 내와 줘. 그리고 이상한 소리는 제발 하지 말고. 당신이 그러니까 맨날 오르카가 그게 평범한 건 줄 알잖아."

"평범한 거 아니야?"

"어, 그러니까 절대로 밖에서 엄마처럼 행동하면 안 된다?"

"어...."

그 말을 들은 오르카는 자기 아버지의 눈길을 슬쩍 피하면서 내 쪽을 바라봤다.

그, 이미 따님은 저한테 고백과 동시에 덮치기 딥쓰롯 펠라를 해버렸는데요.

이미 늦었습니다 아버님....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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