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88화 (88/229)

〈 88화 〉 18권 ­ 시간의 위를 걷는 사람들(2)

* * *

"생각보다 반응이 괜찮네."

오랜만에 시간이 남은 김에, 저번에 올려놨던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내일도 답답하다'의 예약 현황을 구경하고 있었는데.

별생각 없이 지나치다가, 뭔가 기시감을 느끼더니 달려와서 '어, 어?'하며 놀라고.

그 뒤에 바로 예약을 진행하는 모습이 되게 귀엽고, 또 뿌듯하게 느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에 사전 예약 보상에 들어가는 그림으로 잡은, 저 낡아 있는 곰 인형 그림은 생각을 잘한 것 같네.

자연스럽게 이번 작품의 주제를 관통하면서, 전작을 단번에 알아차리게 해준다니.

사전 예약을 홍보하는 그림으로써의 역할로 제격이었다.

'하긴, 워낙 불쌍할 정도로 자주 나오던 거니까.'

저 곰 인형은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에서 엘프가 혼자 있을 때 가지고 노는 곰 인형이 낡은 것을 표현한 것인데.

오크와 이어지기 이전에도 가지고 놀면서 이런저런 화풀이 대상이나, 혼잣말을 위한 대화 대상으로 쓰이던 인형이기에.

은근히 만화를 본 사람들에게는 친숙하게 느껴질 거다.

그 인형을 이번에는 낡은 상태로 하프가 가지고 놀게 된다거나.

그런 식으로 전작에서 이어지는 에피소드가 있는데, 그 에피소드를 통해 착안한 것이 이 낡은 곰 인형의 그림이었다.

솔직히 사람들이나 풍경이 잔뜩 그려진 그림들 사이에 아주 낡은 곰 인형 하나가 떡하니 있으니,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한데.

그 눈길이 간 것이 자신이 아는 작품의 후속편이면 구매욕을 자극하게 되거든.

"의외로 이번에도 굿즈를 그냥 쿨하게 구매하는 사람이 많았고."

뭔가 믿음을 받는 기분이라 행복해지네.

그게 뭐든지 간에 이 작품이랑 관계된 거라면 사고 싶다는 거잖아.

그 면에서 작품에 대해서 인정받고 있다는 뜻이기도 해서 웃음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하여튼 저렇게 곰 인형으로 사전 예약을 진행한 뒤.

사전 예약을 통해서 건넬, 사전 예약 한정 상품은.

저 곰 인형이 그려진 일종의 관람 티켓이었다.

'그 전시 부분이 문제긴 하지.'

일단 작품에 대한 것은, 드디어 내용을 전부 마무리 함으로써 원고를 제출하는 방향으로 갔는데.

제일 큰 문제는 원고만 완성되고, 방금 말한 그 티켓을 사용해서 관람할 전시의 준비가 더디다는 거다.

이게 머릿속으로 생각한 거랑 그 결과물은 되게 다르네....

"아, 여기 계셨네요. 샘플 나왔습니다."

"넵, 감사합니다."

전시관을 열심히 구경하고 있는데, 드디어 기다리고 있던 목소리가 나타났다.

오늘은 평소보다 샘플의 인쇄에 시간이 오래 걸린다 싶었더니.

여러모로 준비한 것들이 많은지, 이것저것 싸 들고 온 것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진심으로 힘을 보태기 위해 나서주는 것 같아서 기쁘네.

"이게 완성된 책이고요. 이게 표지, 마지막으로 티켓이에요. 티켓은 말씀하신 것처럼 도장을 찍어야 완성되는 형태입니다."

아, 티켓은 그런 형태로 해달라고 했지.

내가 워낙 초안 디자인에 공을 들여서인지, 티켓 자체의 디자인은 흠잡을 것 없이 깔끔했다.

아무래도 굿즈의 느낌이 강한 만큼, 진짜 티켓이랑 다르게 훨씬 두꺼우면서 반질반질한 고급 재질로 한 것이 단번에 전해져오네.

이 정도면 굉장히 마음에 드네.

그리고 도장의 디자인도 내가 생각한 것대로 나와서.

도장이 찍힌 티켓의 마무리 디자인까지 완벽했다.

이 도장은 사전 예약만 한 사람은 바로바로 찍어주고.

사전 예약에 굿즈까지 구매한 사람은 찍어주지 않은 상태로 지급한다.

그리고 추후에 관람을 한 후에, 그 관람한 작품의 자그마한 사본 굿즈를 전해주면서 도장을 찍는다.

그렇게 굿즈를 후지급하는 것을 판별하는 용도로 사용할 예정이었다.

"책은 항상 그렇지만 완벽하네요. 불량이 없어서 신기할 정도예요."

"다행이네요. 그나저나 이번 사전 예약 그림도 그렇고, 표지 그림도 그렇고. 되게 귀여워서 좋네요. 보고 있기만 해도 마음이 치유되는 것 같아요."

"아하하.... 티켓도 완벽하네요. 이러면 결국 가장 중요한 전시 부분이 문제인데...."

"그러게요. 하, 어렵긴 하네요."

일단 가장 걱정이었던, 사전 예약자만 대상으로 하는 관람을 허락해주냐에 대한 거였는데.

전시관이라는 따로 별도의 방까지 써야 하는 기획을 그대로 받아줘서 다행이었다.

원래라면 형평성이 어쩌고 하여 거절할 내용인데, 사전에 미리 보는 용도라서 나중에 전체 공개한다는 조건에 허락을 받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내가 가능하면 해보고 싶다고 했던 전국 전시도 진행해주기로 했다.

애초부터 원본을 게시하지 않고, 처음부터 커다란 크기의 사본만으로 전시를 시행하는 거지.

전국 어디에서 관람하든 똑같은 작품을 볼 수 있게 하는 거다.

사실 이렇게 해서 기획만 본다면 완벽하다고 나도 나에게 감탄하고.

심지어 이야기를 들은 직원도 고개를 절로 끄덕일 정도였으니.

원래라면 아무런 문제 없이 스무스하게 굴러가야겠지만....

'처음 하는 게 다 시행착오가 심할 수밖에 없긴 해.'

이 세상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전시하는 것이기도 하고.

심지어 애초부터 이 전시 방법의 태생적인 한계 때문에, 사람이 보는 각도 하나로 작품이 워낙 달라진다.

그래서 실제 전시에서 알맞은 좋은 각도와 펼침 상태를 찾아내기가 쉽지 않았다.

"그럼 거기서는...."

"네, 그게 좋을 것 같고...."

우리는 한참을 어떤 각도로 보이게 놓아야 적당한 모습이 되는지를 고민하고.

또 그 각도에서 볼 때, 작품이 마치 계단처럼 접혀있는 것으로 느껴지는 게 아니라, 완벽하게 완성된 평면의 그림처럼 보이게 하려고.

그림을 접는 수준을 세세하게 바꿔 가는 것까지.

정말 다양한 것들을 해결할 아이디어를 쥐어짜면서 전시품의 퀄리티를 올리기 위해 노력했다.

그렇게 작품의 세부 퀄리티 업 작업이 끝나면.

남는 것은 자연스럽게 그 작품을 전시하는 공간과의 연계였다.

아무래도 특정 각도에서 바라보아야 작품이 제대로 보이는 만큼.

주변 공간을 통해서 그 각도에서 그림을 보도록 의도해야 했다.

"여기 발바닥 모양을 바닥에 넣으면. 자연스럽게 그렇게 의도될 것 같은데요. 네."

또한 그림이 보여주는 형태가 하나가 아니라 두 개인 만큼.

자연스럽게 다음 그림이 보이는 위치로 이동해서, 이동한 자리에서의 관람 각도도 보도록 유도해야 하고.

여러모로 작품 외의 것에서 고려할 것이 많았다.

굿즈야 애초에 일부러 그 각도를 찾아가면서 보는 장난감 같은 느낌이라지만.

전시는 최초로 이 그림을 보는 순간인 만큼, 확실하게 관람자들이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았으니까.

그래도 대충 이 정도면 될 것 같은데....

"근데 이렇게 다 잡아도. 다른 지역에서 이상하게 하면 끝이라는 게 조금 아쉽네요...."

"그게 조금 복병이긴 하죠. 아, 아니면 그건 어때요?"

아예 암실에 아무것도 없는 것을 기준으로 설계도를 그리고.

그곳에 조명부터 비롯해서 모든 물건의 배치를 테스트를 성공한 것을 기준으로 만들어 보내주는 거지.

그럼 최대한 비슷하게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은데.

"마지막으로 다 사진을 찍게 해서, 사진을 보고 최종 검수까지 하면 좀 나을 것 같아요."

"아, 사진도 있네요. 왜 생각을 못 했지."

아직 나온 지 얼마 안 되었으니, 그것에 자연스럽게 생각이 닿는 게 더 특이하지.

나야 항상 카메라가 있던 세상에 대한 기억이 있으니까 그렇고.

하여튼 완벽하지는 않아도 대충 해결 방법이 조금씩은 나와서 다행이었다.

"그럼 일단 이야기 나온 걸 기반으로, 테스트 전시관을 마련해 볼게요. 완성되면 그라베다 아카데미 쪽으로 전해드리면 되는 거죠?"

"네, 그럼 제가 나와서 도와드릴게요."

"고생이시네요. 자기 작품도 아니고 스승님 작품인데."

"괜찮습니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아하하...."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시간이 좀 지체된 것을 보고, 조금 급한 마음으로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아직은 시간이 좀 남았지만, 괜히 지체하면 지각할 거고.

굳이 지각하지 않을 정도의 시간이 있는데 여유 부리다 그렇게 될 생각은 없었다.

"후, 아슬아슬했다."

"아, 칼리."

"늦었네?"

딱 맞춰서 왔는데도 늦었다는 소리를 듣네.

물론 어감부터 그걸 질책한다기보단, 보고 싶었는데 왜 이제 오냐는 듯한 따뜻한 분위기였지만 말이다.

...아니지 오히려 그게 더 무서운 일이 아닌가 싶기도 하고?

"아직 시간 남았잖아. 다들 배고프지? 빨리 주문 하자."

"나는 이거!"

당연히 아카데미에 다니는 내가 아무런 조건 없이 나와서 일을 할 수 있을 리가 없고.

동아리 활동이라는 명목으로 다 같이 나와서, 그다음에 세부적인 활동으로 개별이 나뉘어 행동하는 방식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래도 결국은 같이 돌아가긴 해야 하니까, 이렇게 약속을 잡아서 밥이든 간식이든 함께 먹는 자리를 가진 다음에 돌아가는 거지.

"해야 한다는 건 다 했어?"

"어. 아마도. 로자리아 너는?"

"오랜만에 쇼핑 좀 잔뜩 했지. 짠!"

"오...."

비슷한 봉투가 나머지 둘한테도 잔뜩 있는 걸 보면.

왠지 다들 로자리아한테 끌려가서 같이 어울려진 모양이었다.

유리아는 역시나 그냥 봐서는 알 수 없는 표정이라, 즐거웠는지 바로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었고.

오르카는 되게 즐거워하는 걸 보면, 꽤 재밌게 잘 논 것도 같은데.

"아, 맞다. 그래서 칼리 나는 언제 보여줄 거야?"

그 와중에 신나게 식사하던 오르카가, 유리아가 들리지 않을 정도로 조용하게 물어봤지만.

나는 무조건 출시되면 당일에 찾아보라면서 보여주지 않겠다는 뜻을 고수했다.

"히잉...."

"괜히 보여줬다가 유출되면 큰일이거든. 이해해줄 수 있지?"

"응..."

그나저나 오르카가 이번 신작을 봤을 때 반응이 어떨지가 조금 걱정이었다.

설마 내가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슬퍼하는 건 아니겠지...?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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