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89화 (89/229)

〈 89화 〉 18권 ­ 시간의 위를 걷는 사람들(3)

* * *

자신이 예약된 시간에 전시관으로 향하면서, 여성은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으로 두근거리는 심장을 조금이나마 말리려고 했다.

항상 그렇지만, 그녀는 예약한 작품을 받는 날만 되면 기존에 받았던 감동이 다시 머릿속에 차올라서.

흥분되는 심장을 제어할 수가 없었다.

"후, 드디어...."

설마 후속작이 나오리라곤 생각하지도 못했던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의 다음 권이 나온다니.

처음 소식을 들었을 때는 정말 깜짝 놀라기도 했고, 그때 그 만화를 보면서 느꼈던 여러 감정이 스쳐 지나가서 묘한 감동을 일으켰다.

화신 시리즈의 다음 권이 아니라는 점은 아쉽지만, 그래도 충분히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사실 그게 아니라 완전 새로운 신작이었더라도 그녀는 기대하지 않았을까?

그럴 만도 한 것이, 시우 화가의 작품은 이제까지 그녀에게 실망을 준 적이 없었으니까.

특히 저번 작품과 함께 팔기 시작한 자궁 문신 스티커는, 요즘도 꼭 챙겨서 붙이고 다니는 그녀가 좋아하는 패션 아이템 중 하나였다.

'와, 스티커 붙이고 있는 사람 엄청 많네.'

아무래도 그림 자체가 여성 비율이 높은 마법사의 취미고.

그게 아니더라도 책 같은 걸 남성이 읽는 경우는 적은 만큼, 대기하는 사람 대다수가 여성이었고.

그중에서도 시우 화가님의 작품을 하루라도 빨리 보고 싶어서 예약하는 사람이 많다 보니, 일부러 배를 노출하는 복장을 하고 자궁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사람이 비율이 높은 거겠지.

"이 정도면 침식도 무서워서 도망칠 정도의 화신체 수 아니려나?"

그녀는 혼잣말로 농담을 하다가, 자신의 차례가 되었다는 것을 알아차렸고.

기쁜 마음으로 작품의 실물을 영접하러 이동했다.

과연 이번 작품의 표지는 어떤 느낌이려나?

내용은?

솔직히 작품을 예약할 때는, 엘프가 혼잣말하면서 이리저리 괴롭히던 곰인형이 낡은 채로 그려져 있을 뿐이었고.

그게 이 시리즈의 후속작이라는 것만 알려줄 뿐이지, 자세한 내용은 아무것도 없었으니까.

그녀는 굉장히 기대하면서 책을 받았고, 그러자마자 살짝 나이를 먹은 듯한 오크와 엘프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왔다.

'헉, 귀여워....'

그리고 그 후속타로 그녀를 매료한 것은, 둘 사이에서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자그마한 엘프 아이였다.

입에 작은 송곳니가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 보이는 걸 보면, 아마 전작에서 태어났던 엘프와 오크의 아이인 하프가 자라난 것이겠지.

저번 작품 마지막에 쪼그맣던 그 시절부터 이어지는 하프의 귀여움이 장난이 아닌 작품일 것 같았다.

"그리고 사전 예약 보상은 이건데요."

"아, 넵."

당연히 화신 시리즈처럼 자그마한 엽서 느낌일 줄 알았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길쭉한 것이, 무슨 배의 승차권에서나 쓸법한 디자인이었다.

아니, 그걸 넘어서 그림뿐만 아니라 다른 디자인이 섞여서 영락없는 티켓의 모습이었다.

"티켓...?"

"맞습니다. 이 입장권을 보유하고 계시면, 사전 공개되는 특별 전시회장에 미리 들어가서 보실 수 있답니다."

전시회장이라니, 생각하지도 못한 이야기가 나와서 당황스러웠다.

사전 공개라는 거 보니까, 아직 알려지지 않은 작품 같은데.

대체 누구의....

"설마 시우 화가님의 작품이에요!?"

"맞습니다. 이번 신작이랑도 관련이 있는 작품이니, 내용을 모두 읽은 후에 꼭 보러 와주세요."

물론 지니고 있으면 사전 공개 기간 내내 여러 번 찾아가면서 재관람이 가능하다고 했다.

그나저나 분명 나는 이번에 추가로 판매한다던 추가 상품도 구매했는데.

그건 보이질 않네.

"그리고 추가 상품 구매하셨죠?"

"아, 넵."

"추가 상품 구매하신 분들은 이 티켓에 도장을 찍지 않고 드리고 있습니다. 나중에 관람하러 오셔서 도장 찍고 받아 가시면 되겠습니다."

"어, 바로 주는 게 아니네요?"

"추가 상품이 그곳에 전시된 작품의 사본이라서 그렇습니다."

미친.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욕을 내뱉었다.

그러니까 사본 말고 제대로 된 것으로 첫 관람을 하고, 그 후에 사본을 받아 가라는 거구나.

여러모로 시우 화가님은 이런 부분에서 배려가 많다니까.

"감사합니다."

사실 사람이 몰리기 전에 당장이라도 그 작품부터 관람하고 싶었지만.

꼭 만화를 읽고 나서 오라고 했던 것이 떠올랐기에.

한숨을 내쉬면서 근처에 있는 숙소를 잡을 수밖에 없....

"아니, 진짜요?"

하지만 그녀랑 똑같은 생각한 사람이 아주 많았던 탓에.

수도에 남아있던 숙소는 전부 다 동이 나버린 상태였고.

그녀는 어쩔 수 없이 자리가 비어있는 카페 하나를 겨우 잡아서 거기서 만화를 읽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점은 내부에 있던 사람들이 대부분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내일도 답답하다'를 읽고 있었다는 점일까?

평소보다 훨씬 더 조용한 카페의 분위기 속에, 만화를 읽는 여자들이 가득했다.

그녀는 다들 생각하는 게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웃으면서, 자신도 만화책을 펼쳤다.

'어디 보자....'

하프가 태어난 이후, 아직 갓난아기인 하프를 돌보는 엘프와 오크의 모습이 눈에 확 들어온다.

아기한테 모유 수유를 하는 탓에 가슴에 멍이 들어가며 고생하는 엘프나, 듬직하게 그런 그녀를 돕는 듬직한 오크의 모습.

그녀는 그 귀여운 가정의 모습에 자신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렸다.

'나도 어렸을 때는 저랬으려나?'

그녀의 어머니는 굳이 자신의 모유를 딸에게 먹이고 싶다며 열심히 모유를 먹이다가.

고생이란 고생은 다 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으니.

아마 비슷한 느낌이 들지 않았을까 싶었다.

특히 고백받을 때 말고는 당황한 표정이라고는 전혀 내지 않던 엘프가.

아기를 키우기 시작하자마자 온갖 것에 당황하고 놀라고 피곤해하니.

그 부분에서 참 어머니라는 존재가 고생이라는 걸 깨닫게 된다.

'...얼마 뒤에 엄마 생일이었던 것 같은데. 찾아뵈어야겠네.'

일 때문에 바쁘다고 선물만 보내려고 했었는데.

이걸 보니까 그렇게 넘어가면 진짜 나쁜 딸내미인 것 같았다.

거리가 좀 멀긴 해도, 휴가 있던 거 다 꼬라박으면 어떻게든 되겠지.

"이히, 히히.... 진짜 다들 넘 귀엽따...."

분명 전작에서 보던 그 장난스럽게 잠자리를 가지려 유혹하고.

그것에 부끄러워하는 풋풋한 분위기는 많이 약해졌지만.

이렇게 왁자지껄한 가족의 분위기도 되게 좋은 느낌이야.

정신없이 페이지를 넘기면서 보다 보니, 정신을 차렸을 때는 꽤나 많은 내용을 읽어내렸고.

순간 언제부터 이렇게 하프가 불쑥 커져 버렸는지 알 수 없어서 당황했다.

조금씩 조금씩 성장한다는 느낌은 있었는데, 지금은 어른이 다 되어버렸네.

'오, 이건 진짜 오랜만이다.'

그리고 딸이 성인이 되자마자 유혹하면서 장난치기 시작하는 엘프와.

그걸 못 이기면서 받아주는 오크의 정사 장면은, 야하다기보다는 오히려 훈훈하게 느껴졌고.

그리고 성인이 되어도 철이 없는 하프의 모습이 여전히 귀여웠다.

'하프, 완전히 미녀가 되어 버렸네.'

엄마를 똑 닮아서 예쁘장한 얼굴에, 오크를 묘하게 닮은 분위기.

그러면서 작게 나 있는 송곳니 같은 것이 참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만화를 읽었을 뿐인데, 대리로 아이 하나를 키운 것 같은 만족감이 들었고.

그녀는 왠지 자신도 남자를 찾아서 결혼하고 아이를 키우고 싶다는 욕망이 오랜만에 피어올랐다.

"어라?"

그런데 왠지 선이 칙칙하지 않나.

이제까지는 항상 그림이 둥글둥글한 것이 따뜻한 기분을 줬는데.

무슨 일이 있을 때 사용하는 조금 거친 질감이 느껴져서 불안해졌다.

생각해보면 이 만화는 아직 오크랑 하프 오크의 차별이 있던 시절이지?

그녀는 혹시 그런 이야기가 나오나 싶어서 조심스럽게 페이지를 넘겼는데.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튀어나왔다.

'잠시만, 잠시만....'

쇠약해진 오크가 건강에서 이상을 토로하는 것이 보이자.

그녀는 이제까지 항상 강함을 상징하던 오크의 모습과 대비되어서 깜짝 놀랐다.

그리고 만화에서 '수명'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순간 뒤통수를 한 대 맞은 것 같았다.

생각해보면 엘프나 오크는 인간과 수명이 다르다고 알려진 종족이다.

서로의 하프를 가질 수 있으니, 모두 사람으로 취급받긴 하지만.

실제로는 살아가는 길이조차 다른 것이 현실이었다.

인간보다 훨씬 더 긴 삶을 살아가는 엘프가.

그 인간보다도 짧은 삶을 사는 오크와 함께 살아간다는 건.

결국은 엘프 관점에서 굉장히 빠른 헤어짐을 불러일으키는 일이라는 걸.

모두가 행복한 생활 속에서 잊고 있었던 거다.

그 비정한 현실이, 결국 눈앞에 도달한 순간에서야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오크는 조금 건강이 나빠졌을 뿐 아직 멀쩡하기도 했고, 되게 행복한 가정의 모습을 보이며 끝이 났지만.

하프를 안고 몰래 울고 있었던 엘프의 모습은 뇌리에 박혀서 사라질 생각을 하지 않았다.

"숨이 턱 막히네...."

가슴이 꽉 막혀 있는 기분이 느껴진다.

방금까지 그 가정의 삶과 함께하며 웃어왔기 때문인지, 그것과 대비되는 미래의 정해진 엔딩은.

생각보다 많이 나를 힘들게 만들었다.

"후우.... 진짜, 특별히 무슨 일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결말이 상상되는 느낌이라 그런지 자꾸 감정이 올라올 것 같았다.

그렇게 울음을 꾹 참으면서 카페에서 일어나는데, 그제야 아까 사전예약 보상으로 받은 티켓이 눈에 들어온다.

"이건 좀 무섭네...."

분명히 이번 신작이랑 관련이 있는 작품이라고 했는데.

왠지 방금 내용에 이어지는 작품일 것 같아서 보기 무서워졌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보지 않고 넘어가는 것이 더 찝찝해서, 두렵더라도 부딪혀야 하는 부분이겠지만.

"저, 혹시 이번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아, 사전 전시회장이요? 이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내부 인원수 제한이 있어서 조금만 기다려주세요."

줄이 짧아질 때마다 점점 두근거리는 심장 소리가 머리까지 퍼져나가고.

그녀는 한껏 긴장된 상태로 전시관 안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입구는 커다란 액자에 담긴 작품의 정면이 아니라 측면에 있었는지, 꽤 옆쪽에서 작품의 내용이 보이기 시작했다.

"휴우...."

긴장하던 그녀의 눈에 들어온 것은 평범하게 세 가족이 함께 웃고 있는 그림이었고.

그걸 보자마자 그녀는 다행이라면서 모든 긴장을 풀고 편한 마음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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