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90화 (90/229)

〈 90화 〉 18권 ­ 시간의 위를 걷는 사람들(4)

* * *

전시관은 쭉 걸어가면서 관람을 하는 식인지, 바리케이드가 둥글게 처져 있어서 그 형태를 따라 걷는 느낌으로 되어 있었다.

그 모양을 따라서 발바닥 모양이 바닥에 그려져 있으니 확실하겠지.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바닥을 살피다가, 왠지 자신이 서있는 장소에 커다란 발바닥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왜 여기가 이렇게 강조되어 있지?"

마치 여기서 작품을 관람하라는 듯한 느낌이고.

다들 그녀와 비슷하게 판단했는지, 일단은 이동하지 않고 옹기종기 모여서 작품을 보기 시작했다.

근데 왜 정면이 아니라 이렇게 측면에서 작품을 보게 유도하는 걸까.

그런 의문을 가지면서 그녀가 발걸음을 옮기는 순간이었다.

갑자기 그림이 일그러진다 싶더니, 세로로 이상하게 나누어지면서 이상한 형태로 바뀌었고.

그녀는 전시품이 두 개의 그림을 잘라서 뒤섞은 듯한 모습이 되어가자, 깜짝 놀라서 발걸음을 멈췄다.

"뭐야.... 그냥 그림이 아니었구나?"

그 순간 방금까지 얌전했던 그녀의 심장이 쿵쾅쿵쾅 뛰면서 불안감이 엄습했고.

아까까지는 별로 특색 없어 보였던 발바닥과 주변 소품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파릇파릇하고 깨끗해 보이는데, 앞으로 가면 갈수록 오랜 시간에 찌든 듯한 모습이 일부러 연출되어있다.

마치, 자신이 걸어가고 있는 발걸음에 맞춰서 빠른 속도로 시간이 흘러가는 것만 같다.

가속된 시간 위를 걸어가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하는 전시관의 형태에, 그녀는 말문이 막힌 채로 발자국 모양을 따라갔다.

어느새 작품이 있던 곳보다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는 바닥에 시선이 집중되고.

정신이 들었을 때는 그 시간이 모두 흘러, 아까처럼 커다란 발자국이지만 훨씬 낡아버린 상태의 발자국에 도달한다.

"...윽."

그녀는 분명 이런 작품일 것을 예상하였음에도.

실제로 그 결과를 확인하는 순간, 터져 나오는 탄식을 참지 못해서 입 밖으로 내뱉고 말았다.

아까까지 보이던 단란한 3인 가정의 모습은 그곳에 더는 없었다.

분명히 같은 그림일 텐데, 여기까지 걸어온 순간 전혀 다른 내용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 걸음이, 시간이 너무나 야속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오크...."

오크의 무덤 앞에서 슬픔을 견디고 있는 엘프와 하프의 모습이 눈을 넘어 뇌리에 박히고.

울컥 쏟아지는 감정이 몸 전체를 떨리게 만든다.

만화에 나오는 등장인물일 뿐인데, 그녀는 마치 그녀의 지인이라도 죽은 것처럼 마음이 절절하게 아파져 왔다.

그렇게 그녀는 잘 떨어지지 않는 발로 전시관을 떠나려다가, 방금 마지막으로 작품을 구경하던 장소가 꽤나 넓은 것을 발견했고.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는지, 자신이 예약한 사본을 받을 생각도 하지 않고 전시관을 빠져나갔다.

그리고는 무언가를 사 들고 다시 전시관으로 돌아왔다.

'...내가 느끼는 이 슬픔이 작가님에게, 어쩌면 그걸 넘어서 작품 안에 있던 등장인물들에 전해지기를.'

그녀는 그렇게 마음속으로 기도하며, 자신이 느낀 감정을 짙게 모아서 아무것도 없을 차디찬 바닥에 내려놓았다.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그래도 조금 의외였어. 아직 발매 전인데 칼리가 우리한테 작품을 미리 보여줄 줄이야."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

아무래도 우리 학교에서는 마음껏 외출할 수가 없는 환경이고.

그렇다 보니까 당장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내일도 답답하다'의 사전예약 특전인 사전 전시회를 볼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이야기를 나눈 끝에, 우리 학교에도 그 전시회를 여는 것으로 했는데.

'아무래도 인력이 부족해서 첫 며칠은 우리가 감당해야 하거든.'

초기에는 예약된 물건을 전해주는 것만으로도 학교 측의 일손이 빠듯한데.

이게 안정화될 때까지는 우리가 이 전시회를 감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걸 관리하려면 스포 당하기 전에 봐야 하니, 미리 작품을 보여준 것이었다.

'그래도 의외로 마지막 장면은 잘 버텼네.'

혹시 오르카가 그 장면을 버티기 힘들어하는 건 아닐까 싶었는데.

오르카네 아버지가 겪은 사건보다는 강하지 않은 사건이라 그런지.

살짝 슬픈 표정을 보인 것 말고는 문제없이 보는 걸 확인했다.

물론 가장 큰 문제는 지금부터 같이 보러 갈 전시회인데....

이게 이 작품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의 마무리라고 판단해서 선택하긴 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작가인 내 시점에서나 그렇지, 비슷한 상황을 겪는 오르카에게는 엄청난 데미지를 줄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저렇게 보고 싶다면서 노래를 부르면서 기대하는데 말릴 수도 없고....

"오르카, 내 손 잡아."

"응? 응!"

아무런 의심 없이 밝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니까 뭔가 마음이 쿡쿡 쑤셔왔다.

일단 혹시 모를 일이 있을까 봐 손부터 꽉 잡고 내부로 향하는데.

오르카는 아무것도 모르고 첫 번째 그림을 보면서 역시 하프가 자기랑 닮았다면서 배시시 웃었다.

"어...?"

"......."

하지만 그녀도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한 후부터는 뭔가 이상함을 느꼈는지 말수가 적어지기 시작했고.

마침내 그림이 완전히 바뀌는 곳에 도달해서는, 완전히 입을 닫고 작품만 뚫어져라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나를 잡은 손에 힘을 넣으며 애원하듯 말했다.

"칼리, 아니지? 이거...."

"미안."

"...흡, 흐읍. 아, 빠. 흡...."

물론 그녀도 이게 작품일 뿐이고, 자신의 가족과는 전혀 별개인 이야기라는 걸 알고 있겠지만.

이미 저번 사건에서 눈치채고 만 미래를 다시 한번 상기시키는 역할로는 충분했고.

결국은 참지 못하고 눈물을 터트리고 말았다.

"흐아아앙...!"

"오르카...."

물론 이렇게 될 것이라는 걸 몰랐던 건 아니지만, 그래도 역시 저렇게 힘들어하는 오르카를 보는 건 괴로웠다.

확실히 작품 자체는 마음에 들었고, 그 흐름 또한 컨셉에 잘 맞는 내용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될 걸 알면서도 굳이 그렇게 해야 했냐고 자책하게 되네.

"미안해, 오르카. 내가, 미안해."

"사과하지 마. 사과하지 마.... 칼리가 잘못한 거 아니잖아. 그냥, 어쩔 수 없는 거잖아...."

어쩔 수 없다는 게 더 아픈 거니까 그렇지.

나는 차라리 이럴 줄 알았으면, 차라리 이런 엔딩을 내지 않았던 것이 좋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결국, 이 엔딩이 떠오른 시점부터, 다른 엔딩이 생각나지 않았던 걸 보면.

그렇게 내용을 미뤘다 한들 비슷한 형태로 마무리되지 않았을까 싶었다.

만화에 한해서는, 그런 타협을 할 줄 모르는 멍청한 인간이 바로 나니까.

"있지, 오르카. 조금만 이렇게 반대로 걸어볼까?"

"응...?"

"자, 이쪽으로."

방금 우리가 걸어온 길을 반대로 움직여, 아직 오크가 죽기 전의 그림으로 되돌아온다.

그리고 오르카를 꼬옥 안아주며, 아직은 오르카는 여기에 있는 거라고 말했다.

저기까지 가려면 한참 남았으니까 벌써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오르카가 겪게 될 그건, 다른 가족들보다 조금 빠르긴 하지만. 결국은 모든 가정이 겪어야 할 일이야."

"...응."

사실은 굳이 엘프랑 오크가 아니어도 통용되는 이야기였다.

엘프랑 오크기 때문에 더 두드러질 뿐이지, 태어난 시간이 다른 부모와 자식은 언젠가 경험할 일이니까.

어차피 후회하고 슬프겠지만, 그런 감정을 조금이나마 덜 수 있도록.

아직 저 시간에 도달하지 않은 사람들이 돌아갈 시간을 가질 수 있도록.

그런 기회라고 생각하면 조금이나마 마음이 편하지 않을까.

"그렇게 볼 수도 있는 거 아닐까?"

"아직, 나한테는 시간이 있다는 거지...."

"응, 그러니까 방학이 되면 너희 아버지랑 잔뜩 놀고, 잔뜩 추억을 쌓는 거야."

나는 이미 장래 때문에 잔뜩 싸워서 그런 관계가 되기는 어려울 것 같지만.

오르카는 여전히 아빠랑 사이가 좋잖아.

그럼 가능하지 않을까?

"응...."

그제야 다시 오르카가 웃음을 지었다.

사실 작품이랑 관계없이, 만약 오르카가 이 작품으로 슬퍼하면 어떻게 위로할지 고민해가며 짜 맞춘 설명이었지만.

그래도 그럭저럭 오르카에게 위로는 되었던 모양이다.

"너무 힘들면 이건 우리 셋이서 할 테니까. 오르카는 굳이 오지 않아도 괜찮아."

"아니야. 보고 싶어. 다들 어떻게 반응해주는지."

"그래."

그리고 우리는 전시회를 운영하면서, 정말 다양한 학생들이 이 작품에 반응하는 걸 실시간으로 보게 되었다.

당연히 이 그림을 그린 나에게 화를 내거나 욕을 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크의 상황에 함께 슬퍼하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으며.

말없이 조용히 고통스러워하는 이도 있었다.

오히려 그렇게 이 상황에 공감하고 아파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이.

오르카에게는 위안이 많이 되었는지,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보면 볼수록 오르카는 다시 밝은 모습을 되찾아갔다.

그리고 저 작품을 그린 나도 굉장히 만족하는 중이었고.

"...어라? 저 꽃은 뭐야?"

"꽃? 어?"

처음에는 누군가가 실수로 떨어트렸나 싶었지만.

그 장소가 하필이면 작품의 두 번째 형태를 관람하는 장소, 즉 오크가 죽은 것이 보이는 곳이었고.

이 세상에도 지구처럼 꽃을 통해서 애도를 표하는 문화가 있었다.

"꽃이라.... 왠지 이렇게 향기를 맡으니까 위로받는 기분이네."

"그러라고 놓고 간 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쯤에 학교의 전시관 관리는 일손이 넉넉해져 우리 손을 떠나게 되었고.

그 후에 학교를 나가서 바깥 전시관까지 본 후에야.

이게 비단 우리 학교에서만 벌어지고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전시관 한편에 수북하게 쌓여있는 꽃들이 눈에 들어오고.

심지어 저걸 꾸준히 치워서 양을 조절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고 굉장히 놀랐다.

거의 이곳에 왔던 사람들은, 다시 돌아가서 꽃을 사오는 편이라고 했다.

"...뭐 전시관 측에서 준비하거나 한 건 아니죠?"

"네. 어느 날 어떤 분이 내려놓으신 걸 기점으로. 자연스럽게 너도나도 꽃을 가져오기 시작해서...."

그리고 이 꽃을 내려놓는 애도 열풍이, 수도뿐만 아니라 전국의 전시관에서 이어지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정말 말로 표현하기 힘든 미묘하고 이상야릇한 감정이 찾아왔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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