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1화 〉 18권 시간의 위를 걷는 사람들(5)
* * *
"칼리, 잠시만 기다려줘."
"...오르카?"
그때 갑자기 오르카가 전시관을 나가더니, 어디론가 향했고.
대체 말도 없이 어딜 갔나 싶었지만, 일단 같이 아카데미로 복귀해야 하는 터라.
나는 얌전히 그녀가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돌아온 오르카는 어디서 구했는지, 새하얀 상복을 입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머리카락 색에서 느껴지는 차이를 제외하면 영락없는 '하프'의 모습이었기에.
엄청나게 시선이 집중될 것 같은 분위기였다.
항상 묶고 다니던 포니테일조차 풀어버리고, 하프가 하고 다니는 생머리 스타일로 바꾸고.
액세서리 같은 것도 최대한 비슷하게 꾸며둔 것을 보면.
의도적으로 하프를 따라 하려고 했다는 것이 전해져왔다.
'아, 설마 얘....'
꽤나 귀여운 아이디어를 생각한 것 같아서, 작게 미소가 띄워졌다.
결국 책의 인물이 사망했을 뿐인데도, 마치 소중한 사람이 죽은 것처럼 다 같이 이렇게 추모해줬으니.
그럼 누군가는 그 추모를 받아줘야 하리라 생각했겠지.
그리고 오르카가 생각하기에 그 추모를 받아주기에 가장 적절한 것이, 마지막 그림에서 상복을 입고 있던 엘프나 하프였던 거고.
그럼 그중에서 하프라면, 오르카는 자신이 닮았으니까 대신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을 거다.
"너...."
"칼리가 저번 작품으로 알려줬잖아. 문신 하나로 만화의 등장인물이 될 수 있다고. 그럼 나라면 내 종족 하나로 하프쨩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어."
머리카락 색이 약간 다르긴 해도, 빛에 따라서 충분히 헷갈릴만한 색상이었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확실히 하프의 특성을 빼다 박은 느낌이다.
솔직히 근처에서 참고할 엘프와 오크의 혼혈이 오르카밖에 없는 만큼.
어른 모습의 하프는 오르카를 닮았을 수밖에 없긴 했다.
"조금 도와줄게."
오르카는 하프가 되어, 자연스럽게 형성된 이 추모의 분위기에서 상주 역할을 해내고 싶은 것이리라.
순간적으로 이거 셀프 패드립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지만, 오르카의 동심만 깨버리는 생각이라 빠르게 머리에서 지워버렸다.
하여튼 이렇게 귀여운 생각을 하는데 내가 안 도와줄 수가 없지.
'일단 조명에 마법을 섞어서 머리카락 색이 비슷하게 보이게 유도하고.'
오르카보다 하프의 머리카락이 더 옅으니, 머리카락 쪽에 비치는 광량을 늘려서 좀 밝은 톤으로 느껴지게 하는 거다.
그리고 오르카랑 다르게 머리카락 끝이 하얀 느낌으로 그라데이션이 되어 있는데.
이 부분은 어둠 마법으로 빛 반사를 줄이고 광량을 늘려서 아예 하얗게 만들어버린다.
"다녀와."
"고마워."
진짜 영락없는 하프의 모습이 된 오르카가, 천천히 전시관으로 걸어가서 놓여 있는 꽃들을 들어 올렸고.
방금까지 관람하던 사람이나, 꽃을 내려놓고 오크를 추모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집중되기 시작한다.
물론 내 그림은 데포르메가 강해서, 완전히 오르카와 하프가 닮았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오히려 그래서 하프의 외모를 특정하기 힘들어서, 더 오르카가 하프처럼 느껴지는 분위기에 따른 착시가 발생한다.
"감사합니다."
"...하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해서인지, 꽤나 얼빠진 목소리가 들려오고.
은근히 연기를 잘 이어가면서 받아주는 오르카 덕에, 분위기가 확 바뀌기 시작했다.
갑자기 만화의 등장인물이 현실에 나타났으니, 꿈이라도 꾸는 것처럼 느껴지겠지.
그것부터가 일부러 만들어진 꿈이지만.
"...다들 엄청나게 좋아하는구나."
오르카를 껴안고 우는 사람부터, 굉장히 슬픈 표정으로 바라보며 손을 꽉 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고.
그렇게 여러 사람의 오크에 대한 마음을 보고 있으니, 이게 내 작품이 일으킨 열풍이라는 것이 참 이상하게 느껴졌다.
처음에는 하프가 눈앞에 나타났다는 것에 신기하던 사람들이었는데.
생각보다 금방 그녀가 진짜 하프라도 되는 것처럼, 열심히 위로해주려는 모습은 굉장히 가슴이 따뜻해지는 장면이었다.
덕분에 오르카는 그 역할에 집중하는 것을 넘어.
잠시 울음을 터트리거나, 말문이 막힌 채로 억지웃음을 짓는 상황까지 벌어졌고.
나중에는 소문이 퍼졌는지 너무 많은 인원이 수도의 전시관에 모이면서, 우리는 급하게 전시관을 도망쳐 나올 수밖에 없었다.
"...기분은 좀 어때?"
"많이 나아졌어. 내가 하프는 아니지만, 그래도 내가 엄청나게 응원받은 기분."
그만큼 오르카가 자신과 하프가 닮아있다고 생각해서 그렇겠지.
나는 오르카의 머리랑 옷을 원래대로 갈아 입혀주고는, 그대로 안아서 아카데미로 돌아갔다.
못 걸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감정이 많이 복받친 모양이라.
계속 꼬옥 안아주면서 진정하게 해주기에는, 내가 그녀를 공주님 안기 만큼 좋은 것이 없었다.
"...아, 칼리! 오르카! 들었어? 지금 수도 전시관에 하프가 나타났다던데. 귀신이라는 소리부터, 사실 진짜로 하프네 가족은 살아 있다던가...!"
유리아는 우리가 동아리 방에 돌아오자마자, 굉장히 빠른 속도로 얻은 정보로 시끄럽게 굴었다.
저 정보는 또 어디서 들었길래 이렇게 빨리 알아서 난리인 거야?
그나저나 그녀는 그런 미지의 것을 되게 좋아하는지, 설명하고 있는 유리아의 바보 털이 강아지 꼬리처럼 신나게 흔들렸다.
아마 지금이라도 같이 나가서 실물을 보자는 거겠지만....
"혹시 이거 말하는 거야?"
내가 마법을 다시 켜고, 오르카의 머리카락을 묶고 있던 끈을 풀어버리자.
유리아의 표정이 꽤나 흔들리는 걸 볼 수 있었다.
쾌감 때문에 가버릴 때가 아니면 가벼운 미소 정도만 지을 정도로 표정 변화가 적은 유리아인데.
저 정도면 진짜로 놀란 거다.
"설마, 그 하프가 오르카였어?"
"에헤헤.... 왠지 다들 거기서 꽃을 내려놓으면서 오크의 죽음을 기리길래. 하프 오크로써 해야 할 것 같았거든."
"뭐야. 나는 진짜로 나온 줄 알았는데."
"나왔겠냐."
유리아는 꽤나 실망한 상태로 기숙사에 돌아갔고.
오늘은 로자리아도 바쁜 탓에, 동아리 방은 오르카와 나 둘만 남게 되었다.
평소에도 자주 있는 일인데 굳이 그렇게 생각하니까 조금 야하게 느껴지는 것 같....
그 순간 갑자기 문 쪽에서 노크 소리가 들렸고.
저번에 니아가 왔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라서 그런지, 오르카와 나는 둘 다 딱딱하게 굳어서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우리는 한참을 그러고 있다가, 밖에서 들리는 목소리를 듣고 나서야 정신이 들어서 문을 열었다.
"아, 론도 교수님."
"음, 둘밖에 없었나요? 하긴 로자리아는 한창 시간이 부족할 테니...."
"무슨 일로 오셨어요?"
"아, 뭔가 특별한 일이 있어서 온 건 아닙니다. 다만.... 칼리 학생이랑 이번 신작에 관해서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어서요."
"아하."
이 앞을 우연히 지나가다가, 내가 시우 화가의 제자인 것을 모르는 유일한 만화 동아리원인 유리아가 나가는 걸 확인했고.
이럴 때가 아니면 언제 나와 시우 화가의 작품에 대해서 떠들겠냐며 웃으셨다.
이번 작품이 많이 인상 깊으시었나 본데.
"사실 저도 바빠서, 만화를 다 읽고 이번 전시회까지 보는 것에 시간이 꽤 걸렸거든요. 아마 여러분이 전시관을 학교에 놓자고 하지 않았다면, 아직 보지도 못했을 겁니다."
"오늘 보셨군요."
"그리고 제가 봤다고 하자마자 통신구로 망할 할아범.... 아니, 스승님이 워낙 시끄러워서 고역이었네요."
"그러실 것 같긴 해요."
샤론 원로님이야 워낙 이런 걸로 이야기를 좋아하시는 성격이신데.
그중에서도 가장 이야기가 잘 맞는 편인 론도 교수님이 상대라면, 꽤나 기뻐서 폭주하실만하지.
솔직히 론도 교수님도 말은 저렇게 하시면서, 은근 샤론 원로님을 좋아하는 게 보인다.
"...솔직히 저는 이번 작품을 보고 느낀 것이 좀 많았습니다."
"느낀 거요?"
"결국, 엘프가 이렇게 인간 사회에 섞이는 건 멍청한 짓이 아닐까.... 뭐, 그런 거죠."
"너무 비약했어요."
론도 교수님은 희미하게 웃으시더니.
스승님이 자신보다 늙으셨고, 자신보다 먼저 돌아가시는 거야 그렇게 이상하게 느껴지는 일은 아니었지만.
아카데미 교수로 활동하면서 정말 많은 학생과 아는 사이가 되었는데.
결국 그 아이들이 죽는 것을 전부 지켜봐야 한다는 것이, 갑자기 현실처럼 확 와닿았다고 한다.
"확실히 이번 작품은, 인간 사회든 오크 사회든 수명이 짧은 사람을 소중하게 여기게 된 엘프들에게는 많은 생각이 들게 하겠네요."
"그렇죠. 칼리 학생의 스승이 엘프는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요. 이런 것에 대해서 많이 고민하지 않으면 이렇게 나오기가 힘들 텐데...."
나도 이번 작품이 잘 나왔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그게 내 순수한 실력이라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솔직히 우연히 들어맞은 것들이 너무 많았다.
오르카네 아버지가 저물어가는 수명 때문에 몸 상태가 좋지 않아졌고, 그로 인해서 쓰러진 탓에 얻은 소재기도 하고.
그 소재가 이미 준비하고 있던 작품이랑 정확하게 일치했던 것도 우연이다.
"항상 시우 화가는 나한테 많은 걸 생각하게 해요. 하지만 이렇게 정확히 내가 아픈 부분을 찌르실 줄은 몰랐네요."
"...일부러 그러셨겠어요."
"아, 교수님! 그럴 때는 작품의 걷는 길을 거꾸로 걸어보면 좋아요!"
"...거꾸로?"
오르카는 배시시 웃으면서, 내가 예전에 오르카를 위로하기 위해 해줬던 말을 교수님에게 말하기 시작했다.
그만둬 오르카, 그건 아무래도 내 흑역사를 낭독회 당하는 기분이라서 힘들어!
"그저 걷는 것만으로도 미래를 보러 갈 수 있었으니까. 반대로 걷는 것만으로도 과거로 돌아올 수 있었다는 거군요."
"맞아요. 실제로도 아직 일어난 일이 아니잖아요?"
미래에 불행이 예정되어 있다고 해서, 지금 환하게 웃을 수 있는 행복을 버릴 필요는 없다고.
오히려 그 어쩔 수 없는 것 때문에, 행복할 수 있을 것조차 포기하면 안 된다며.
내가 말했던 것보다 좀 더 발전된 느낌으로 설명을 해나갔다.
"그래서 굳이 첫 번째 그림을 아주 행복해 보이는 것으로 고른 걸 거예요."
그 시간이 끝난 것이 아쉬워할 수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 자체를 후회하면 안 되기에, 후회하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그림을 그려둔 것이라며.
나도 모르는 작품에 담긴 의미가, 오르카의 입에서 마구 탄생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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