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95화 (95/229)

〈 95화 〉 19권 ­ 싸우지 말고 섹스해(4)

* * *

"다들 오랜만입니다. 일주일 만이네요."

일주일 만에 뵙는 론도 교수님은 굉장히 밝은 느낌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까지는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내일도 답답하다'의 추가 전시 작품인, '시간을 걷는 길'을 본 이후로 표정이 좀 어두우셨었다.

그래도 일정인 기말고사까지는 잘 끝내고 일주일 동안 휴가를 가신다더니.

제대로 마음을 정리하신 모양이다.

"사실 제가 그러면 안 되는 건데, 시우 화가님의 새로운 작품을 보고 많이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소중한 제자인 여러분들이 제 수명과는 다른 삶을 살아가기에, 저는 아마도 여러분들의 죽음을 목도할 수밖에 없겠지요. 사실 엘프는 항상 그런 축복이자 저주를 짊어지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내가 그걸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교직을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닐까. 많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니 내가 작품 하나 그렸다가 엘프 인생 하나 이상하게 만들 뻔했잖아?

물론 어디까지나 그 작품을 보고 어떤 생각을 하고 고찰을 하는지는 자신의 자유라고 생각하긴 하는데.

뭔가 저런 걸 보면 가끔 무섭다는 생각이 들긴 하네.

왠지 작품을 그릴 때 조금 더 진지하게 고민할 필요가 있다는 걸, 이번 작품을 하면서 많이 느낀다.

오르카 때문에 조심한다고, 여러모로 생각은 물론이고 조사도 많이 하고 그린 작품인데.

그런데도 오르카의 반응이나 론도 교수님의 반응을 보면, 왠지 생각이 더 깊어진다.

"그런데 저번에 만화 동아리에 놀러 갔는데, 거기 오르카라는 검술부 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학생에게 들은 말이 있습니다."

그 작품을 굳이 한 방향으로 걸어가며 관람할 필요는 없다는 거죠.

그래서 한 번 직접 가서 과거로 돌아가서, 과연 그때의 그림이 어땠는지를 봤습니다.

정말 아름답고, 3명 다 굉장히 행복해 보였습니다.

"그 작품은 2개의 그림이 하나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두 번째 그림에 너무 충격을 받아서 앞 그림은 잊어버린 거죠."

"이미 그 과거의 맺은 관계들 자체가 정말 아름답고 행복했는데, 그걸 몰랐습니다."

지금 여러분과 함께하는 이 시간을 아름답게 보내는 것이, 진짜 제가 해야 할 일이고.

그게 교수로서 가져야 하는 마음가짐이라는 걸 뒤늦게 알았습니다.

작품에는 다 있었는데, 알아차리지 못한 제가 멍청했죠.

'아니, 그런 것까지 생각하진 않았는데...?'

어디까지나 오르카를 달래는 방법으로 생각했던 거지.

굳이 뭐 그거에 엄청난 의미를 담을 생각은 없었다.

그래도 최종적으로 꽤 밝은 결말에 도착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이번 학년은 저에게 아주 특별한 학년입니다. 제가 마법 기초학 수업을 시작하고, 처음으로 첫 시험에서 F가 나오지 않은 학년이거든요."

"원래는 F가 꼭 나와서, 기말고사를 일찍 보는 거거든요. 최대한 F를 받는 학생을 줄이려고, 보충 강의를 하기 위해서요."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학생들도 없고, 남은 기간에 뭘 해야 하나 싶었습니다.

처음에는 그냥 아무 학생도 F가 없으니 다 함께 쉬거나 작품 관람이나 하자고 하려 했는데, 솔직히 올해부터는 작품 관람은 다들 아카데미 내에서 잘하고 있지요.

제가 굳이 통솔해서 나갈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그 만화관 만들자고 지랄했던 사람이 댁이잖아.'

왠지 자연스럽게 기말고사는 끝났어도 강의는 하겠다고 하는 분위기라서, 나도 모르게 태클을 걸었다.

아니 근데 방금 그 훈훈한 분위기에서 나오는 결론이 왜 강의를 더 열심히 하자는 거지?

설마 이 꽃밭이 공부로 가득 찬 교수는, 학생들이랑 즐긴다는 게 공부를 말하는 거였어?

"원래라면 교육 과정에는 없는 내용이 하나 있습니다. 이걸 여러분의 마법 기초학 공부를 테스트할 겸, 같이 공부하고 싶습니다."

...이런 미친.

물론 론도 교수님의 강의는 질도 좋고, 거기서 얻어가는 것도 많은 강의지만.

이제 슬슬 이 강의가 빠지면서 널널해진 시간에, 새로운 작품 준비를 하려고 했는데.

이러면 일정이 다 꼬여버린다.

'자업자득인 건지, 아니면 오르카를 원망해야 하는 건지....'

여러모로 복잡한 마음이 드는 가운데, 론도 교수님은 그대로 강의를 시작하려고 했고.

몇몇 학생들 사이에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기말고사를 끝내고도 강의를 들어야 한다는 건 아무래도 여러 생각이 들 수밖에 없지.

"아, 그리고 이번 강의를 마지막에 시험을 치르긴 할 생각입니다. 목표가 있는 게 좋으니까요."

"네!?"

나는 이번에는 진짜로 당황해서 소리를 질렀다.

그럼 시험을 한 번 더 친다는 거잖아.

이런 미친.

"아, 그래도 걱정하지는 마세요. 성적에 가산점은 붙지만, 기존 점수보다 떨어지진 않습니다. 아카데미 측이랑 이야기해서, A와 B를 추가로 받을 수 있도록 처리를 했습니다."

조금 개선되긴 했지만, 그거 그냥 최상위권 학생들을 제외하면 성적에 반영된다는 뜻이잖아요.

물론 손해 볼 것이 없는 건 사실이지만, 아무래도 열심히 할 수밖에 없어진다.

그러라고 있는 시험이니까 당연하겠지만.

"여러분들도 이제 아시겠지만, 완전히 새로운 도구로 그림을 그리는 것이 마법 기초학에서 가장 많이 연습한 부분이었습니다. 사실 시험이라고 해봐야 여러 방식으로 마법진을 그리는 거였으니, 평가 방식에 적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죠."

그 여러 가지 방식으로 갑자기 색이 잘 묻어나는 과일들 따위를 가져와서 마법진을 완벽한 원을 그리라고 한 교수님이 할 말은 아닌 것 같은데요.

매년 어처구니없는 걸 가져온다고 듣긴 했지만, 갑자기 과일을 가져오시는 엉뚱함은 정말 예측하기 어려웠다.

근데 그거보다 더 평가 방식에 적당하다고?

"아, 과일은 아무도 예상 못 했습니까? 죄송합니다. 생각보다 적절했었나 보네요. 하여튼 이번에도 적절한 주제입니다. 왜냐면 최근에 제가 발표한 논문의 내용이거든요."

저, 교수님이 최근에 발표한 논문 내용같이 어려운 걸 1학년한테 가르쳐도 되는 겁니까?

가끔 보면 진짜 황당한 소리를 진지하게 하는 론도 교수님이 무서웠다.

이게 인간과 엘프의 차이인 건지, 아니면 그냥 론도 교수님이 이상한 건지....

근데 사실 저게 연륜이라고 볼 수도 있는 게, 저러시면서 진행한 건 대부분 성공적으로 해내셨다.

솔직히 나도 기말고사를 빨리 봐서 일단 F를 주고, 그다음에 보충 강의로 탈출하게 해주겠다는 걸 처음 들었을 때는 이해를 못 했지만.

지금은 충분히 기말고사를 당겨서 봐도 괜찮다고 인지하고 있으니까.

"돌겠네...."

"칼리는 싫어? 나는 솔직히 론도 교수님 강의면 더 들으면 좋은데."

"좋은데 싫어."

일단 론도 교수님의 강의를 심화 과정으로 듣는다는 것 자체는 마음에 드는데.

아무래도 학생이라 그런지 시험을 더 본다니까 스트레스가 벌써 생기고.

심지어 한동안 작품에 많이 집중도 못 한다는 사실이 아쉬웠다.

이러면 원래 생각했던 것처럼 방학 시작 전에 거의 다 완성해서, 방학 중에 하나 더 작업한다는 계획은 포기해야 하거든.

"뭐, 다들 너무 긴장하지는 마세요. 기초적인 부분만 맛보기로 알려드릴 거고, 제대로 공부하고 싶으신 분들은 제 논문 공개되어 있으니까 그거 토대로 따로 공부 하시면 됩니다."

"아, 다행이라고 말하면서 한숨 쉬신 분 누구죠? 저도 그 정도 생각은 하고 강의를 짜고 있습니다? 상처받아요?"

그거 아마 한 사람이 아닐걸요.

일단 나도 방금 그 말을 듣고 꽤나 안도하는 느낌이 들었거든요.

하여튼 방금 그 말로 조금 분위기가 장난스럽게 변했고, 그걸 신호로 교수님이 이번 강의의 내용에 대해서 천천히 풀어내기 시작했다.

"여러분들도 이제 점 문자에 관해서는 다 공부하셨을 겁니다. 마법 문자를 이루는 5개의 점 중 4개만을 지나는 문자는, 이렇게 비슷한 마력으로 지나지 않은 곳에 점을 찍으면 다른 문자가 되죠."

그렇다면 왜 비슷한 마력을 불러와야 하는가.

굳이 같은 문자가 아니면 이런 번거로운 작업을 하지 않아도 무사히 작동하는데?

그것에서부터 시작된 프로젝트가 바로 '듀얼 캐스팅'입니다.

"자, 지금부터 제가 발동하는 마법을 잘 보시기 바랍니다."

론도 교수님이 평범하게 원을 그려내서 마법진을 구성한 다음.

평소처럼 마법진을 그린다 싶었는데, 갑자기 양손을 드시더니 양손이 서로 다른 마법 문자를 그리기 시작했다.

신기할 정도로 양쪽 손에 깃드는 마법 문자의 느낌이 확연하게 다르게 정제되어 있어서인지, 아무런 충돌 없이 깔끔하게 그려졌고.

평소보다 훨씬 빠르게 그려진 마법진이 빛을 발하면서 발동했다.

"...미친?"

"마력을 세세하게 다뤄야 하므로 무조건 손가락으로 그려야 해서, 집중도가 다른 마법에 비해서 굉장히 많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아무래도 도구의 도움을 받을 수 없으니 퀄리티가 떨어집니다만, 그만큼 빠른 속도로 마법을 그릴 수 있습니다."

되게 별것 아닌 것처럼 설명하고 있지만.

당장 저걸 배우는 순간 마법 모의전이나 검술부와 마법부의 대련 시스템을 바꿀 필요가 생길 정도로, 엄청나게 획기적인 방식이었다.

마법을 보조하는 도구를 포기하면, 최대 속도가 2배에 가까워지니까.

물론 말이 2배지 저걸 마치 다른 손처럼 완벽하게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거다.

"이걸 저처럼 제대로 된 속도로 하라고 하지는 않겠습니다. 솔직히 저도 몇 달 걸렸거든요."

"그러니 그냥 양손으로 동시에 그려서 성공만 하시면 가산점을 드리겠습니다. 그게 제가 이번 학기 여러분에게 드리는 마지막 시험입니다."

시작부터 시험이 뭔지를 알려주고, 그 시험을 어떻게 해야 돌파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 알려주는 론도 교수님 특유의 교육 방식은 그대로였다.

근데 처음 본 과일로 완벽한 원을 그리라던 사람이, 여름 방학까지 남은 기간을 두고 그 안에 해결하라고 한다고?

대체 저게 얼마나 어렵길래 저러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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