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3화 〉 21권 니아르(2)
* * *
"칼리, 일어나. 지금도 안 일어나면 점심도 굶어야 한다?"
"끄응.... 우리 그렇게 오래 잤나?"
하긴 오늘이 마지막 제출이라고, 어제까지 둘이서 늦은 시간까지 마법진 그리기를 연습했으니.
이 정도면 정상적인 기상 시간이라고 봐도 무방할 거다.
내 옆자리에 누워서, 나를 빤히 바라보며 웃고 있는 니아를 보니까 왠지 두근거리네.
'이제 슬슬 익숙해질 때도 된 것 같은데.'
최근 들어 니아가 내 침대로 기어들어 오는 경우가 잦아졌고.
그 덕분에 나를 그냥 깨우는 것에서, 같은 침대에서 자다가 깨워주는 것으로 일과가 바뀌었다.
애초에 니아가 일찍 일어나서 미리 준비하던 것 자체가, 나에게 자신이 여자라는 걸 들키지 않기 위해서였으니.
이제는 그냥 옷도 안 입은 알몸 상태로 껴안으면서 깨워도 상관없다는 거겠지.
"자꾸 그렇게 옷도 안 입고, 아침부터 사람 유혹하면. 점심이고 뭐고 너를 잡아먹을지도 몰라."
"그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물론 우리는 저녁까지 쫄쫄 굶어야겠지만."
처음에는 저런 말을 하면 좀 부끄러워하는 티라도 냈던 것 같은데.
이젠 전혀 통할 생각을 하지 않는다.
얼마 지나지도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이 관계에 저 정도로 적응할 줄은 몰랐다.
솔직히 배고프더라도 가끔은 그렇게 하루를 낭비하는 게 괜찮은 느낌이긴 한데.
오늘은 하필이면 론도 교수님에게 검사를 맡을 수 있는 마지막 날이고.
그런 만큼 점심을 제대로 먹고 가서, 어제 연습했던 결과를 보여야 했다.
"너도 참 고생이다."
"뭐가?"
"매번 그런 거 입으면 답답하잖아."
"말했잖아. 은근 편하다고. 난 남자애들이 더 불편할 거 같은데."
"...어?"
"자지 말이야, 그렇게 커질 때마다 옷 안에서 엄청나게 눌리지 않아?"
그건 그렇지...?
그렇다고 팬티에다가 공간 확장 마법을 걸어두는 것이 더 불편하지 않을까?
애초에 발기된 상태를 생각하면서 설계한 옷은 아닐 것 같긴 한데, 하여튼 그렇다고 발기를 그대로 드러나는 들러붙는 소재로 옷을 만들면 그것대로 옷 역할을 못 하겠는데.
내가 여자가 다 까고 다니는 건 괜찮아도, 남자가 그러고 다니는 건 못 보겠다....
"아, 그래도. 칼리가 주체하지 못하고 자지가 커져서, 옷 라인 따라서 자지가 뱀처럼 꿈틀거리면서 기다랗게 달라붙어 있는 건 좋아. 보고 있으면 좀 흥분되더라."
"야, 야!"
시발 어쩌다가 우리 황태자님이 저딴 발언을 서슴지 않는 캐릭터가 되었을까.
물론 쟤도 마법부인 만큼, 내 만화를 다 챙겨보고 있다는 사실이야 알았지만.
고삐가 풀린 이후에 저렇게 야한 소리를 당당하게 지껄이게 될 줄은 몰랐다.
'시발 생각해보니까 쟤한테는 그러고 싶었던 걸지도 모르겠네.'
우리 주변에 있는 여자애들은 대부분 자기들끼리 야한 대화 존나게 하고 돌아다녀서.
몇 없는 남학생들은 그걸 그대로 가감 없이 듣고 다니느라 힘겨운 점도 있는데.
여자인 걸 숨기고 다니던 니아에겐, 그것 자체가 부러운 광경이었을 수 있겠네.
그러니까 남자더라도 진실을 아는 사람이 생겼으니, 그거랑 비슷한 대화를 하고 싶어 하는 것일 테다.
"학생회 일은 다 마무리된 거 맞지?"
"아직 선배들은 바쁘지만, 1학년한테 시킬 부분은 아니라더라."
슬슬 학기가 종료되기 직전이다 보니, 전체적으로 많이 생활이 널널해졌다.
종강된 강의도 많고, 동아리 프로젝트도 새로 시작하기엔 애매한 시기라서 쉬는 느낌이 강하지.
"잘 먹었습니다."
"바로 갈 거야?"
"연습할 필요는 없지?"
"몰라, 틀리고 재도전 된다며."
어차피 망해서 인정 못 받더라도 A는 확정인데, 너무 걱정할 필요 없다.
그냥 이대로 하라는 것만 하는 게 꼴 받아서 니아랑 머리 싸매고 준비했을 뿐이지.
솔직히 나는 마법을 배우고 싶은 거지, 성적에 엄청나게 신경을 쓰지는 않으니까.
물론 성적을 아예 신경 쓰지 않는 건 아니다.
그냥 성적에 목숨 걸면서 무조건 챙기려는 게 아니라는 거지.
솔직히 성적 챙겨둬서 나쁠 건 없으니까.
"생각보다 줄은 짧네."
"마지막이라 몰릴 줄 알았는데, 생각해보면 한 번만 성공하면 되는 거잖아. 대부분은 끝내고 오늘은 다 공강으로 해놓고 놀겠지."
하긴.
이상한 거 추가로 하겠다고, 그거 연습하느라 늦은 애들은 우리밖에 없을 거다.
나머지는 대부분 실수가 잦아서 아직 대기하는 것일 테고.
"아, 칼리 학생과 니아 학생이군요. 솔직히 언제 오나 기다렸습니다. 혹시 성적이 이미 높아서 오지 않는 건 아닐까 해서...."
"굳이 기다리실 필요까지야...."
"저는 아직 칼리 학생이 강의 첫날에 보여준 마법진을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답니다."
"제발 좀 잊으세요."
슬슬 그 이야기 계속 듣는 것도 쪽팔립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는, 니아와 함께 서로를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고.
동시에 마법진을 그리면서 시연을 시작했다.
다만, 평범하게 원을 그리는 것이 아니었다.
양손에 비슷한 마력을 담아서 원을 양쪽에서 반원을 그려, 그 끝이 만나게 하는 식으로 원을 완성한다.
점 문자의 원리를 그대로 이용한 것으로, 교수님이 언급하지 않았던 마법진을 그리는 시간까지 단축하는 방법이었다.
"...호오?"
그 뒤에는 교수님에게 배운 것처럼 손마다 다른 마력을 깃들여서 마법 문자를 써 내렸다.
가끔 실패할 때가 있었는데, 어제 연습을 많이 하고 잠든 탓인지.
지금은 나와 니아 모두가 완벽하게 마법을 발동시키는 것에 성공했다.
"...혹시 논문 읽으셨나요?"
"아뇨. 논문에 혹시 이 마법진 그리는 법도 실려 있나요?"
"있습니다만.... 굳이 말씀드리지는 않았습니다. 괜히 헷갈릴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그 필요성을 바로 알아차리고, 그 부분까지 추가해서 해내다니. 여러분들답네요."
"듀얼 캐스팅인데, 시간 단축이 안 되는 구간이 있으면 손해니까요."
애초에 화력이나 안정성을 포기하고 속도에만 집중한 것이 듀얼 캐스팅의 이점인데.
당연히 마법진도 최대한 빨리 그려서 시간을 단축해야지.
마력의 비율이 같으면 같은 선으로 취급된다면, 마법진도 비슷하게 그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진행한 방법이었다.
"항상 저를 놀라게 하시네요. 이것 때문에 늦었던 거군요?"
"네, 맞습니다."
"성공으로 기록했고, 성적에 반영하겠습니다. 그리고 저를 놀라게 해주신 대가로 이거라도 선물로 드려야겠네요."
"...이건 뭐죠?"
"이번에 제가 제출했다던 듀얼 캐스팅의 논문 사본입니다. 두 세트가 남아 있었으니 딱 맞는군요."
...그냥 안 받으면 안 될까요.
다른 것도 아니고 원본 논문이면 겁나 머리 아플 것 같은데.
일단 거절하기도 애매해서 받아오긴 했는데, 이걸 어떻게 해야 한담.
"진짜로 있네."
그나마 궁금했던 건, 우리가 했던 마법진을 빨리 그리는 방법이었는데.
우리가 그냥 반원을 그려서 진행한 것과 다르게, 논문의 한 축을 차지할 정도로 엄청나게 긴 내용이 수록되어 있었다.
대충 초반에 설명 자체는 우리가 한 것과 똑같은 예시가 적혀 있었지만....
"아, 최대한 마법진 수준을 회복시키는 것 때문에 길구나...."
"그거 해결이 되는 거였어?"
"그런가 봐."
마법진을 완벽하게 원으로 그리는 건, 그래야 마력의 효율이 최대가 되기 때문이다.
근데 이건 어디까지나 개념적인 의미의 완벽한 원이지, 그냥 모양이 원이라고 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방금 우리처럼 반원을 두 개 붙여서 그리면 효율이 갑자기 하락하거든.
그런데도 최대한 빨리 발동한다는 이점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필요하다는 주장만 하고 온 거였는데.
양손으로 원을 그리면서도 그걸 해결할 방법이 존재하나 보다.
시발, 딱 보니까 이거 읽어서 추가로 공부하라고 던져준 거네.
"공부를 더 해 왔더니, 다시 공부할 걸 던져주는 무자비한 교수님이라니까."
"뭐, 여름 방학에 할 과제라고 생각하면 되겠지."
"응, 절대로 안 해."
방학에는 만화 그리는 것에 집중할 생각이고.
그나마 남는 시간에는 학기 중에 놀지 못한 만큼, 편하게 힐링을 하고 싶었단 말이야.
다음 학기에 시간 남으면 보거나 해야겠다.
물론 이 기술이 내가 원하는 컴퓨터 제작 등에 필요한, 기록 마법과 관련된 주요 기술이었다?
그런 거였다면 바로 열심히 공부에 들어갔지.
솔직히 전투용 마법은 그다지 관심사가 아니라서 이러는 거다.
그나마 마법이니까 이런 발상 자체가 재밌다면서 즐겼던 거지, 효율 높이겠다고 추가 보충 공부까지 할 생각은 없어.
"칼리는 내일 돌아간다고 했었나?"
"응, 동아리 쫑파티를 내일 하기로 했거든. 니아는 오늘이지?"
"...아쉽네, 조금 더 같이 있고 싶은데."
"어쩔 수 없지."
그래도 저녁까지는 같이 있다가, 기사들이 데리러 오는 거였으니까.
그때까지는 다른 애들 말고 니아랑 같이 있을 생각이었다.
물론 상황은 봐야겠지만, 만약 가능하다면 방학에도 같이 만나기로 했기도 하고.
방학 끝나면 다시 매일 기숙사에 강의에 실컷 들러붙어 있을 테니, 너무 아쉬워할 것도 없지.
"읏차. 요즘 기숙사에서 브래지어 벗고 살았더니, 당연히 버티던 게 너무 불편하게 느껴지네."
"뭐, 여러모로 복잡한 사건이었지만. 덕분에 이득 본 부분이긴 하잖아?"
"내가 너무 풀어지는 것만 제외하면 말이지?"
하긴 최근에 니아답지 않게 굉장히 풀려있는 느낌이 들긴 했다.
기숙사 내에서 옷을 벗고 다니는 거야 그렇다 치고.
평소였으면 자는 시간과 일어나는 시간 같은 걸 칼같이 지키던 애가, 내 옆에서 늦잠도 같이 자는 데다.
항상 쿨해 보이던 분위기랑 다르게 귀엽게 애교를 부리기도 한다.
근데 오히려 그러니까 더 인간미 있게 느껴져서 호감이야.
솔직히 이전까지의 니아는 좀 그런 부분에서 딱딱한 구석이 자주 느껴져서 애늙은이 같았거든.
물론 지금도 바깥에 나가서 남장하고 있으면 비슷한 분위기지만.
'그게 더 좋긴 하네.'
나만 볼 수 있는 내 여자의 모습이라니.
솔직히 그것도 남자한테 참을 수 없는 우월감을 주는 요소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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