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26권 거룩한 희생의 절정(4)
* * *
"진짜 어지럽네."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 않아?"
"아니, 어디까지나 만화잖아...."
"그렇다고 달라지는 건 별로 없어."
그 말을 들으니까 또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생각해보면 캐릭터 하나 뽑아서 내 것으로 하겠다고, 식비 줄여가면서 뽑기 돌리는 거랑 그다지 차이 있는 행동은 아닌가?
아니 근데 평생 갈지도 모르는 저주는 조금 다르잖아.
"그만큼 모두한테 알베도가 소중하다는 거지."
"그건 고마운데...."
자신들을 더 아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아니면 하필 그런 방식으로 몰입할 시스템을 만들어 놓은 내가 나쁜 건가.
아니, 근데 지금 상황 보면 배드엔딩 찍었으면 아주 나를 잡아다가 손도끼로 때려죽였을 것 같은데?
사실 이 정도면 꽤 괜찮은 선택지를 골라서 살아남았던 게 아닐까.
"뭐, 다들 생각이 저 상태라면 막을 방법은 없다고 봐야겠지. 내가 무슨 교단도 아니고, 저런 제한을 하는 게 가능한 위치는 아니니까."
그게 아니라도 그렇게 억압하는 식으로 뭔가를 진압하는 것 자체가 내 취향이 아니었다.
차라리 후속작을 내서 다들 자기 몸은 좀 아끼라는 말을 하고 말지.
그런다고 들을지는 모르겠지만.
하여튼 다들 폭주해서 자궁 문신을 마구 붙이고 다니기를 펼치는 건, 내가 막을 수 있는 파트가 아니었다.
그럼 이 상황을 그나마 빨리 해결하는 건, 이미 붙이고 다니면서 생긴 영구적인 부작용을 해제하는 방법을 찾는 거다.
나중에 그만두고 싶어졌을 때, 그들이 그만둘 수 있게 하는 것이 제일 중요한 일이니까.
"흐음, 그럼 내 몸으로 실험하는 거야?"
"실험이라고 하니까 좀 위험한 거 하는 것 같잖아."
일단 이 부분에 대해서는 생각나는 게 있으면 유리아로 테스트해 보면 될 것 같고.
그전까지는 계속 정보를 수집하면서, 해결 방법에 도움이 될만한 내용을 찾아내는 것이 중요할 것 같았다.
그래서 일단 새로 뭐라도 자료를 얻으러 가려고, 동아리 방을 나가려는 순간이었다.
"누구세요?"
"아, 접니다."
"론도 교수님?"
"칼리 학생? 역시 이곳에 있었군요."
"네?"
갑자기 론도 교수님이 동아리 방에 찾아오더니, 나를 납치해갔다.
솔직히 이번 작품 때문에 이런 반응을 보인다는 사실이, 벌써 피부로 느껴졌기에.
나는 그냥 얌전히 그녀의 손길을 따라서 론도 교수님의 연구실로 끌려갔다.
"아, 원로님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네. 후, 자네가 아카데미에 들어간 이후로 얼굴 보기가 훨씬 힘들어졌어."
"그거야 뭐.... 대신 론도 교수님이랑은 주기적으로 만나고 있어서요."
"이 녀석이 만나면 뭐 해. 내가 만나야지."
제가 왜 원로님이랑 만나야 하는 건데요.
그나저나 로자리아랑 나에 대한 관계도 이제 알고 계실 것 같은데.
의외로 그 부분에 대해서는 터치하지 않으시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셨다.
"이번에 자네 스승이 출판한 화신혼례, 아니 그 이전에 그 스티커부터. 그것으로 인해 실제로 문신을 이용한 저주를 사람 몸에 깃들일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 아는가?"
"...예, 최근에 보고 받았습니다."
"역시 알고 있었군. 그거, 자네 스승이 일부러 그렇게 한 건가?"
"아니지 않을까요? 저한테는 그런 말 전혀 없으셨는데."
"에잉, 자네 스승은 제자도 믿지 않는 건가. 요즘엔 마법도 아카데미에서 배울 텐데, 제자한테 일만 잔뜩 시키고 말이야."
"스승님이랑 좀 비슷한 성격인가 봅니다."
"내가 언제?"
"자주 그러셨잖아요."
은근히 쌓인 것이 많으셨는지, 기회가 되자마자 궁시렁거리며 불만을 내뱉는 론도 교수님과.
자신은 그런 적이 없다고 주장하는 샤론 원로님의 모습이 참 다정다감하다.
오랜만에 느끼는 건데도 친근감 넘치는 장면이라 좋네.
"하여튼, 그것 때문에 지금 아카데미랑 아카데미는 다 뒤집혔어. 교수들이 아마 시우 화가를 찾으면 가만두지 않을 테지."
"왜, 왜요?"
"왜긴 왜야, 이게 어떻게 가능한 거냐고 질문 퍼부어야 하니 그렇지."
"......."
대체 이런 형식으로 마법을 구현하는 것은 처음 본다며.
그리고 대체 왜 지금 와서 발동하기 시작했는지도 의문이라던가, 사실상 이번 일을 내가 일부러 꾸몄다고 믿는 모양이었다.
아니, 근데 진짜로 나도 모르는 일인데!?
"참 웃기는 양반이야. 그냥 연구해서 얻은 내용을 논문으로 제출하면 될 것을. 마치 우리 전체를 학생이라는 듯, 이런 식으로 알려주고...."
"그래서, 오랜만에 스승님도 불타오를만한 주제가 생겨서 기쁘신 거 아니고요?"
"뭐, 항상 마법에서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하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그림도 만화도, 그런 부분이 재밌는 게지."
간단히 말해서, 혹시 내가 뭔가 알고 있는 건 없나 싶어서 불러본 거였다.
일단 내가 모른다는 사실을 안 이후로는, 내가 알만한 작품에 대한 칭찬 같은 이야기로 넘어가긴 했지만.
마지막에 다시 이 주제로 돌아오는 걸 보면, 역시 이 부분이 가장 중요했다.
"자네도 혹시 스승이 말해주는 게 있으면 말해주게나. 아니면 자네가 슬쩍 해서 논문으로 발표해 버리던가."
"네!?"
"농이네. 농."
"이상한 소리 그만하시죠. 결국 칼리 학생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거잖아요. 뭔가를 무조건 알 거라더니, 바쁜 칼리 학생 시간만 잡아먹었잖아요."
"흐음, 아무리 그래도 뭔가 귀띔은 해줬으리라 생각했지."
하여튼 마법사 대부분은 이번 사건을 '대마법사 시우'의 과제라고 여기고 있는 모양이었다.
시발 나는 그런 생각은커녕, 이런 일이 일어날 것도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니까?
진짜 만화만 그렸는데 어쩌다가 이런 상황이 된 것인지 모르겠다.
"아, 그나마 제가 아는 건 있는데. 이 스티커에 뭐 대단한 마법적 효과는 없을 거라는 사실이에요."
"그래?"
"스승님이 주신 디자인만 사용했을 뿐, 스티커 재질이나 뭐 이런 건 제가 알아서 다 한 거라서요. 관여하신 적이 없습니다."
"...그럼 문양이 중요한 건가."
"일단 스티커 말고, 물감으로 몸에 칠해볼까요? 그래도 동작하면 확신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래, 그건 일단 해보는 거로 하고."
그래서 지금 엄청나게 많은 마법사가, 이 현상이 왜 발생하는지를 연구하기 시작한 모양이다.
그리고 그건 제국 최고의 마법사 중 하나인 샤론 원로님도 눈독을 들일 만큼 신기한 현상이었고.
그것 때문에 이 난리가 나고 있나 본데....
'즉, 평범한 일은 아닌 게 맞아.'
이게 만약에 일반적인 마법 시스템으로 증명이 가능한 상황이면, 이런 반응도 없었을 거다.
그래도 이게 무슨 진짜 저주나 이런 게 아니라, 새로운 마법으로 여겨지는 게 다행인 건가?
진짜 이쪽 마법사들은 기본적으로 마인드가 다 열려 있어서 신기하다니까.
"그렇게 이번 일이 평범하지 않은 건가요?"
"아무것도 없이 그냥 문신만 그렸는데, 체내의 마력을 가져다가 알아서 발동하는 마법인 셈이잖아? 자네도 알겠지만, 기록 마법조차 마력으로 그려내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게 말이 된다고 생각하나?"
"말이 안 되죠...."
"그리고 그 스티커의 모양은, 기존 마법 문자와도 전혀 연관이 없어. 심지어 그대로 마력으로 그림을 그리면, 그건 또 효과가 없더군. 기존과 완전히 다른 형태의 마법이지."
"근데 진짜 원리가 뭘까요? 문신이 그려진 사람이 마력이 있어야만 발동하는 모양인데, 그럼 그 사람들의 마력으로 마법진을 그리게 유도하는 건가? 그게 가능할까요?"
거의 무서울 정도로 이번 일에 관해서 토론을 나누는 것을 보고.
이 정도면 내가 건드리지 않아도 알아서 마법사들이 찾아내서 규명해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럼 나는 일단 원인의 해명보다는 꺼버릴 방법에 더 집중하면 되겠네.
"혹시 발동한 문신을 꺼버릴 방법은 예상 가는 게 있으세요? 보니까 한 번 발동하면 영구적으로 남는 모양이던데."
"그게 확실히 문제 중 하나야. 아직 찾지 못한 모양이던데.... 일단 본체의 마력을 통제하면 점점 흐려지다가 사라지긴 하는 모양인데. 마력이 돌아오면 되살아나서 의미가 없고."
나도 저 생각은 했었는데, 역시나 효과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오늘 이야기를 들으면서 다시 한번 느낀 건데, 확실히 이번 상황이 기존 마법과는 돌아가는 시스템이 매우 달랐다.
특히 샤론 원로님이 가장 이상하다고 했던 것이, 왜 과거에 '화신혼례'가 출간되기 전에는 비슷한 현상이 일어나지 않았냐는 거다.
"그 부분이 가장 어렵긴 하죠. 무슨 병도 아니고 잠복기가 있는 건지.... 아니면 뭔가 트리거 같은 것이 있는 거 아닐까요?"
"트리거라, 평범하게 생각하면 만화를 보고 나면 활성화가 가능한 몸이 된다는 건데.... 하지만 만화를 본 사람과 보지 않은 사람 모두가 같은 결과였다면서?"
"그렇죠."
나는 그렇게 원로님과 교수님 사이에 껴서 한참을 마법 토론에 끼워져 있다가.
한참이 지나서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솔직히 지치는 일이긴 했는데, 나도 이번 사태에 대한 정보가 필요했던지라.
생각보다 유익한 시간이라서 짜증이 나거나 하지는 않았다.
조금 지쳐서 그렇지.
'근데 마법사들은 다들 이걸 해결해야 한다는 것보다는, 이유를 규명해야 한다는 것에 너무 시선이 집중되어 있어.'
그럼 그나마 내가 해볼 수 있는 건, 원인의 규명보다는 당장 문제의 해결만 생각하고 고민하는 거다.
그런 느낌으로 한참을 고민하면서, 뭔가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는지를 생각했는데.
그러다가 하나 떠오른 것이, 이상할 정도로 이번 사건이 만화의 설정을 충실하게 따른다는 점이었다.
'설마 지금 밝혀진 내용 말고, 다른 부분들도 만화의 설정을 따라가는 거 아니야?'
그럼 지금 내가 원하는 것이 문신의 제거니까, 만화에서 문신을 제거한 경우를 참고하면...?
나는 그 순간, 혹시 가능한 것은 아닐까 싶은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