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34화 (134/229)

〈 134화 〉 27권 ­ 발신자 불명(3)

* * *

"난장판이네. 뭘 그렇게 늘어놨어?"

"아, 니아 왔어? 미안. 이번엔 아무래도 생각할 게 좀 많아서."

처음 하는 게임북 작업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일단 선택지에 따라서 루트가 갈리는 것부터 여러모로 난이도를 올려서, 기존에 이런 선택지를 복잡하게 짜두던 미연시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만 그게 아니더라도 트리거 값을 오로지 선택지에 의존해야 하는 게임북 특성상, 컴퓨터 게임보다 선택지가 짜기 어렵기도 했고.

예를 들어 컴퓨터 게임의 경우 X라는 값을 1만큼 올려주는 선택지를 여러 개 두고, X값에 따라서 게임의 루트를 바꿀 수 있다.

하지만 게임북에서 그런 짓거리를 했다간 몰입이 다 개박살 날 확률이 높으니, 그런 짓을 하려면 그것에 맞는 준비를 많이 하던가 아예 쓰지 말아야 하고.

그러다 보니 기본적으로 모든 선택지마다 다른 페이지로 이동시키고, 다시 그 선택지에서 추가 선택지로 이동하는 식으로 정신없는 루트의 가지를 연결해야 했다.

그리고 같은 파트를 공유할 때는 어느 쪽에서 보고 왔어도 어색하지 않도록 잘 만들어야 하는데.

게임이면 이걸 선택지 봤던 걸 조건으로 걸어서 일부만 바꾸면 되는데.

이게 안 되니까 구성할 때 답답한 경우가 많았다.

"와, 어려울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돌겠네...."

"너도 되게 열심히 하는구나. 하긴, 네 작품은 원래부터 치밀한 걸로 유명했으니까."

그건 대부분 착각이고, 지구 쪽 선배들이 닦아둔 길을 그대로 써먹었을 뿐인데?

사실 생각해보면 그 길을 여기서 써먹으려고 활용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좀 빡센 일이긴 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이미 다 만들어진 개념인 게임북을 활용하려니까 머리가 터지는 거였고.

"되게 고민이 많아 보여."

"어떻게든 고생을 해서, 절반 정도는 왔다고 생각하는데. 여기서 어떻게 넘어가야 하는지 모르겠어."

일단 가장 중요한 배드엔딩들은 전부 완성했고, 주인공의 선택에 따라 그 엔딩들에 어떻게 분기할지는 다 만들었다.

그럼 이제 여기서 추가 루트를 파서 해피엔딩으로 진입할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그 진입 방법을 어떻게 넣을지가 가장 큰 문제였다.

"무조건 모든 엔딩을 봐야 넘어갔으면 좋겠는데. 아니, 다는 아니어도 몇 가지 정도는...."

이게 좀 악랄한 짓이긴 한데, 단일 엔딩 후에 바로 눈치채서 해피엔딩을 노리는 것보다는.

약간 여러 시도를 하면서 실패하는 감각을 주고 싶었다.

아직 이런 작품에 질리지 않은 독자 풀일 때인 지금에나 할 수 있는 짓이니까.

바로 써먹어서 몰입감 올리는 데 사용하는 게 맞지.

"잘은 모르겠는데. 그러니까 여러 가지를 보게 의도하고 싶다는 거야?"

"응, 예를 들어 아주 짧은 만화가 몇 개 있는데. 그 만화 중 상당수를 봐야만, 어떤 만화를 읽게 유도하고 싶거든. 대신 그전까진 찾지 못하게."

처음에는 엔딩을 볼 때마다 보상 같은 걸 줘서.

그걸 다 조합하면 정답이 나오도록 하려고 했는데.

그건 아무래도 좀 몰입감을 해치는 것 같아서 별로였다.

진짜로 엔딩을 봐야만 넘어간다고 강요하는 것 같잖아.

'그걸 좀 자연스럽게 하고 싶은데....'

"그럼, 뭔가 힌트를 숨겨 놓으면 되는 거 아니야?"

"힌트?"

"뭐, 그 만화책이 어디에 있다든가. 만화책이 어떻게 생겼다든가."

아마 니아는 내가 한 만화책이 여러 개일 때의 예시를 듣고 한 말이겠지만.

정작 나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그게 딱 해결책으로 들려서 화들짝 놀랐다.

힌트를 숨겨 놓아서, 그걸 통해서 루트를 돌파한다?

'약간 방탈출의 퍼즐처럼 한다는 거지?'

이제까지 나는 계속 어떤 페이지로 가야 한다는 걸 알려야 한다는 생각만 계속했었는데.

이 부분을 퍼즐로 만들어서, 퍼즐을 풀어내면 페이지가 나오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그러면 퍼즐을 푸는 부분에서, 조건을 찾아내는 느낌을 충분히 만들어 줄 수 있어서 분위기를 깨지 않을 것 같다.

퍼즐이라니까 거창한 것처럼 보이지만.

예를 들어서 특정 페이지를 어떤 조건에 맞게 접으면, 기존에 그려진 부분들이 우연히 겹쳐지면서 페이지 수가 나온다던가.

여러모로 고민을 해보면 괜찮은 녀석을 만들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힌트들을 엔딩에 나눠서 숨기면, 전체를 다 봐야 하는 게 아니면서 대부분을 봐야 해결할 수 있기도 하고.'

엔딩을 본다고 무조건 해결이 가능한 것은 아니기에, 좀 더 중복 엔딩도 보면서 고민을 할 수 있고.

결과적으로 이 퍼즐을 풀어가면서 주인공의 해피엔딩을 위한 싸움을 함께 하는 느낌을 줄 수 있을터다.

'그럼 가능하면 그 퍼즐은 편지쪽에 활용을 해봐야겠네.'

이 작품의 컨셉이 결국 미래에서 오는 편지라면.

그 편지라는 컨셉을 퍼즐에도 활용하는 편이 딱 적절할 것 같다.

모든 엔딩에서 등장하는 것이 편지라는 점에서, 퀴즈를 푸는 통일성도 주기 좋고.

여러모로 분위기에 딱 맞네.

"고마워! 와, 진짜 오래 고민했는데. 이게 이렇게 해결이 나네."

"어, 어...."

내가 니아를 안으면서 그렇게 말했더니, 그녀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그걸 받아줬다.

그 와중에 벌써 어떤 느낌으로 퍼즐을 구성할지 느낌이 오고 있었기에.

그 부분은 정리해놓고 좀 바깥에 나가서 가능한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오케이."

나는 완성된 원고와 잔뜩 쌓여 있는 자료들을 보며 기지개를 켰다.

퍼즐 때문에 추가로 책에 처리할 일이 늘어나긴 했지만.

저번에 나가서 알아보니까, 그 정도는 충분히 책에 처리를 할 수 있었다.

단가도 딱히 엄청나게 추가되는 건 아니라서, 공정 부분만 잘 점검하면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퍼즐은 최대한 편지라는 컨셉을 살리면서, 자연스럽게 각성 루트에 진입할 수 있게 했고.

각성 루트에서도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배드엔딩인 것이 악랄하긴 해도.

기본적으로 각성 루트 주인공의 캐릭터 변화 때문에, 꽤나 즐겁게 즐길 수 있는 녀석이 나왔다.

마지막에 해피엔딩을 찾으면 강력한 안도감과 행복감이 찾아오겠지.

"후, 그리고 솔직히 루프 시스템 보완 가능했던 게 마음에 들긴 했지."

사실 가장 중요하게 생각했던 부분이 이 루프 시스템을 기존에 내가 아는 게임북에서 보완하는 거였는데.

왜냐면 엔딩을 수집하고 그걸 이용하는 것이 미연시에서 아주 중요한 컨텐츠기 때문이다.

그런데 게임북에서 엔딩을 여러 개 보는 것만으로는, 그 감각을 느끼기가 어렵다는 게 문제였다.

이게 게임이면 이미 본 엔딩은 획득한 것으로 취급해서.

수집품으로 전시가 되게 되어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걸 게임북에서 구현하고 싶다는 것이, 내 초창기 생각이었고.

그 방법을 찾으려는 고민을 꽤나 많이 했다.

"오, 이게 샘플이에요?"

"네. 확인하시겠어요?"

그래서 그걸 가능한 방법을 찾으려고, 기존에 자궁 문신 스티커를 만들던 마법사를 찾았고.

그 마법사와 이야기를 한 끝에, 좀 특별한 용지 위에서 깔끔하게 떼어지는 스티커를 만들 수 있었다.

대신 한 번이라도 떼어낸 뒤에는 금방 접착력을 잃는 단점이 있지만 상관없었다.

"엔딩을 보면, 해당하는 엔딩 번호의 스티커를 떼어내는 거니까."

그럼 스티커 아래에 그려져 있던 엔딩 수집품이 드러나는 방식이다.

이렇게 하면 뒤쪽 엔딩 수집파트를 보고 엔딩을 스포당하지 않을 수도 있으면서.

자신이 본 엔딩들 말고도 다른 엔딩이 있으니, 독자가 루프를 포기하지 않는 원동력 역할도 할 수 있다.

이 부분에 있어서는 진짜 그럴듯하게 디자인해서.

아마 게임북이지만 진짜 미연시를 보는 듯한 분위기를 잘 연출했다고 생각한다.

솔직히 이 정도면 오랜만에 자신감이 생길 정도로 괜찮은 퀄리티야.

"와, 진짜 엄청나게 복잡하긴 하네요."

"그래도 생산비용이 어떻게든 맞아서 다행이네요."

"그 편지 부분 때문에 공정을 좀 바꿔야 해서 좀 고생이긴 했지만.... 사실 어쩔 수 없잖아요? 그렇게 공정 바꿔도 될 정도로 시우 화가님 신작은 많이 생산되니까요."

솔직히 이건 내 이름값 덕분에 가능했던 부분도 있는지라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아마 내가 이름값이 없었으면 일부 페이지 특수 인쇄를 위한 추가 공정 때문에 가격을 추가하던 해야 했을 거다.

하지만 그거로 큰 가격 차이가 안 날 정도로 대량 생산이 가능해서, 나는 그 부분을 피해간 거지.

'사실 이미 대박 나서 돈을 잔뜩 번지라, 그냥 가격 추가해도 수익 포기하면 되긴 해.'

오늘따라 왠지 이제까지 해온 성공이 감사하게 느껴지긴 하네.

아니, 생각해보니까 책 후반부에 붙인 엔딩 수집 요소 때문에 비용 추가되니까.

사실상 지금 가격 괜찮아졌어도 수익은 거의 없지 않나?

"그럴걸요?"

"음, 뭐 근데 스승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셔서요."

"원래 그런 거 신경 안 쓰는 분이시잖아요."

솔직히 돈을 벌어두면, 컴퓨터 만드는 데 엄청나게 도움이 될 것 같긴 한데.

그렇다고 작품 가격을 올려서 돈을 벌기보다는 그냥 굿즈 같은 거로 수익을 버는 게 나을 것 같더라고.

작품 자체는 싸게 해서 최대한 많은 사람한테 보여주는 게 더 내 성깔에 맞았다.

"와, 근데 진짜 두껍긴 하네요."

거의 온종일 대화를 나누고 이것저것 테스트를 한 끝에, 드디어 첫 샘플이 나왔는데.

그렇게 열심히 내용을 줄이려고 했음에도, 마녀 아카데미와 거의 비슷한 두께가 되어 있었다.

솔직히 압박이 심하긴 하네.

"음, 아직 조금 더 마감을 잡아야겠는데요. 아무래도 후반부 마감은 완벽하지 않네요."

"그러게요. 그래도 작품 자체는 잘 나온 것 같아요."

튼튼하기도 하고, 굵은 것 치고는 원하는 곳을 펼쳐서 보기도 편한 편이었다.

혹시나 해서 퍼즐을 실제로 풀어보거나, 스티커를 떼어서 엔딩을 수집해보면서 문제가 있나 확인했지만.

전혀 문제가 없었다.

"이대로 가면 되겠네요."

그리고 마감을 조금 수정한 샘플을 한참 동안 확인한 결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이번 작품의 작업을 완전히 종료했다.

이제 남은 건 발매 후 반응을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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