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화 〉 27권 발신자 불명(4)
* * *
"와, 이건 좀 오랜만이네."
아득하게 늘어선 줄을 보면서, 여성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아무래도 예약이 가능한 후속작이 아니라, 완전 신작이라서 몰린 모양이었다.
물량은 최대한 많이 준비했다고 들어서 편하게 왔는데, 정작 그걸 기다려야 할 건 생각을 못 했다.
'다음에는 그냥 시우 화가 신작이면, 최대한 빨리 와서 기다려야겠다.'
차라리 그게 시간을 적게 쓰는 방법인 것 같았다.
그나저나 구매한 사람이 들고 가는 걸 보니까 꽤나 두꺼워 보이는데.
확실히 사전에 들었던 가격도 평소보다 조금 비쌌었지?
'좋아.'
화신혼례 이후에 신작이 나오는 데 시간이 걸린 만큼, 분량이 좀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실제로도 그런 모양이라서 오늘은 정말 행복하게 만화로 시간을 불태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흑...!?"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자궁 부근이 덜덜 떨리면서 쾌감이 쏟아졌고.
그녀는 최대한 주변 눈치를 보면서 자궁을 꾹꾹 눌러 가볍게 절정해 쾌감을 해소했다.
꽤나 익숙한 느낌이고, 그녀가 아니라도 비슷한 행동을 하는 사람이 여럿 존재했다.
"크, 큰일이네.... 이렇게 오래 기다리면 발작이 좀 잦을 텐데."
그녀는 자신의 자궁에 그려진, 마치 자궁이 성기를 통해 무언가를 빨아들이는 듯한 디자인의 흰색 문신을 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알베도를 구하기 위해 직접 자신의 몸에 유지하기로 했던 저주였다.
솔직히 불편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지만, 그녀는 그 불편함을 감수할 때마다 알베도의 희생이 떠올라서.
오히려 굉장히 기쁜 마음으로 저주를 받아들이는 중이었다.
'조심해야지, 자칫 잘못하다 꼬리가 빠질 뻔했잖아.'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주위를 둘러봤고.
열심히 줄을 서서 기다리는 사람 중 상당수가 꼬리를 흔들며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저 중에 진짜 수인도 있겠지만, 아마 대부분은 애널 플러그를 사용한 인간이리라.
방금 자궁으로 가버린 탓인지, 살짝 감도가 올라온 애널 때문에 힘이 풀릴 뻔했지만.
그녀는 어떻게든 버텨내면서 앞으로 나아갔다.
이러다가 공공장소에서 꼴사납게 일을 치르는 건 아닌가 싶었지만, 꼬리를 벗고 오기에는 이미 그녀의 뒤로 길게 늘어선 줄 때문에 늦어 있었다.
"벌써 뒤에 저만큼...?"
아무리 지금 줄이 줄어드는 속도가 빠르다지만.
저걸 처음부터 다시 기다린다니, 절대 안 된다고 생각한 그녀는 어떻게든 꼬리의 흔들림을 멈추고 몸을 진정시켰다.
유동성이라도 줄이니까 쾌감이 줄어들었고, 그녀는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계속 줄이 줄어들길 기다렸다.
"와아...."
문신의 저주와 꼬리의 애널 플러그 때문에, 생각보다 위험한 상황을 많이 맞이한 그녀는.
어떻게든 자신에게 도달한 차례를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줄을 기다리느라 심심하니까, 자꾸 쾌감에 신경이 가서 평소보다 위험하네....
"여기 있습니다. 네, 돈 확인했습니다. 이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판매는 최대한 빠르게 진행하고 있었고, 그녀는 자신이 힘들었던 기억을 떠올리며 최대한 그 속도에 협조했다.
다만 그렇게 받은 작품의 모습을 보면서, 평소와는 꽤나 다른 모습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평소와는 다르게 작품 겉이 포장되어 있었는데, 이 포장이 마치 '편지봉투'의 느낌이었기 때문이었다.
"아, 이쪽으로 나가시면 되고. 이번 신작의 등장인물인 노조미가 그려진 향초도 판매중이니, 함께 구매하셔도 괜찮습니다."
"...향초요?"
평소에 이런 추가 제품은 무엇인지 알려주지 않고 판매하는 것이 시우 화가의 특징이었는데.
그게 아닌 걸 보면, 이건 그냥 평범하게 그림이 그려진 추가 물품 같은 건가 보다.
그러니 굳이 구매하지 않아도 감동은 비슷하겠지만....
'사야지.'
그녀는 바로 그 '노조미 향초'를 구매해서 집으로 돌아갔다.
솔직히 나중에 노조미가 마음에 들면 구매해도 되는 거겠지만, 그래도 일단 시우 화가 작품이니까 좋아하게 될 거라 확신해서 구매한 거였다.
이제까지 그녀가 시우 화가의 작품에 나온 등장인물을 싫어한 적은 거의 없었으니까.
그나마 화신 시리즈의 신들 정도를 싫어하는데, 정작 그 신들은 외모가 표현된 적이 없었다.
"진짜 편지 봉투 느낌이네."
포장지는 뜯으면 다시는 복구할 수 없는 느낌으로 되어 있어서, 그녀는 조금 불평을 했다.
이거 하나하나가 작품인데, 손상이 무조건 가게 되어 있으면 어쩌자는 것인가.
그러다가, 그게 시우 화가의 의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잠시 멈칫했다.
"...일부러? 왜?"
그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이유를 알 수가 없어서, 일단 생각을 미루고 포장을 뜯었다.
그러자 내부에는 아까 양초를 사면서 봤던 노조미라는 여자애가, 마치 기도라도 하는 듯한 모습으로 누워있는 모습이 보였다.
왠지 화신강림의 표지인 '수백화'와 비슷한 느낌이기도 한데, 그것과는 다르게 옷을 다 입고 있었다.
"의외네. 시우 화가가 표지에 나오는 캐릭터의 옷을 이렇게 평범하게 입히다니."
평소에 워낙 노출의 아름다움이나 속옷의 아름다움, 나체의 아름다움, 섹스의 아름다움 등을 표현하려고 애쓰던 화가였으니.
이런 분위기의 표지가 튀어나오니까 조금 신선했다.
작품의 이름은 '발신자 불명'이라고 나와 있었는데.
포장지의 편지를 생각하면, 편지랑 관계가 있는 제목으로 보였다.
그녀는 작품을 읽기 전에, 아까 샀던 향초에 불을 붙이고는 몸을 풀었다.
"무슨 향인지는 모르겠지만, 작품 읽을 때 도움이 되는 걸로 넣어줬겠지?"
그리고 그녀는 향을 피우자마자 코를 찌르는 사과의 느낌에, 사과향인가 싶었다가.
특유의 상쾌함이 느껴진 덕에 캐모마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꽤나 마음이 편해지는 은은한 향에,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책을 펼쳤다.
"이 책은 '게임북'이라는 형태를 하고 있습니다? 절대로 책을 함부로 넘기지 마시고, 작품 내에서 해당하는 페이지로 이동하라고 나와 있으면 그 행동을 따르세요?"
저것이 무슨 소리인지 이해하지 못한 그녀가 눈살을 찌푸렸다.
게임북이 뭔지는 모르겠는데, 작품 내에서 페이지를 이동하라고 한다고?
심지어 그러한 명령이 나왔을 때는 절대로 그냥 다음 페이지를 열어서는 안 된다는 경고문이 붉게 적혀 있었다.
"평범한 만화책이 아닌가?"
게임북이라면, 게임과 책이라는 뜻인데.
게임이라는 건 체스 같은 것이나, 뭐 어디 운동 같은 걸 의미하는 단어다.
책으로 운동을 할 리는 없으니, 체스와 비슷한 건가?
확실한 건, 시우 화가가 또 뭔가를 만들어냈다는 거였다.
"편지?"
작품이 시작되자마자, 주인공인 레터가 편지 한 통을 받으면서 시작했다.
심지어 페이지 하나에 한 면은 편지통이 그려져 있고, 다른 면에는 편지지가 그려져 있을 정도로 커다랗게 그려놨는데....
정작 그 편지통에는 발신인이 없고, 들어있던 편지지에도 아무 내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뭐야, 왜 아무것도 없어?"
실제로 주인공도 비슷한 반응을 하면서 편지를 대충 던져두는데.
그 뒤로 왠지 머리를 부여잡으면서 작은 통증을 느낀다.
그리고 자꾸 이상한 느낌이 든다고 말하는데, 어디 건강이 좋지 않은 모양이었다.
"기시감?"
주인공은 이상하게 지금 일을 본 적이 있었다는 생각을 자주 했다.
다만 금방 주인공의 상태가 좋지 않다는 이야기들이 나오니, 그녀는 아무래도 그의 건강에 문제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람이 아프면 원래 저렇게 이상해지긴 하지.
"와, 노조미 엄청 착하네."
여러모로 힘들었던 주인공을, 노조미는 정말 헌신 것 보살펴준다.
심지어 같이 있는 게 즐겁다며 행복한 시간도 보내고.
보고 있는 눈이 달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둘의 사랑은 굉장히 달콤하게 시작되어갔다.
"아, 이게 아까 말했던 그 설명이었구나."
노조미가 내일 어디로 놀러 갈 거냐고 묻는 말에, 두 개의 답변이 적혀 있었고.
그 두 개의 답변 중 하나를 선택할 경우, 그 답변 옆에 적힌 페이지로 이동하라고 되어 있었다.
즉, 주인공의 답변을 고르는 것으로 다음에 봐야 하는 내용을 바꿀 수 있는 것이었다.
"와, 이런 것도 가능하구나...."
그녀는 이제까지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방식에 화들짝 놀랐다.
내가 선택한 대로 주인공이 다른 선택을 하는 만화책이라니.
역시 시우 화가의 아이디어는 대단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이 고른 페이지를 조심스럽게 펼쳐서 이동했다.
"일부러 책 끝에 페이지를 적어놨네. 내부를 보지 않게."
혹시 페이지를 펼치다 다른 페이지를 보면 안 되기 때문인지.
페이지만 확인할 수 있도록 배려가 잘 되어 있었다.
항상 시우 화가는 이런 디테일함을 처음 선보일 때도 다 챙긴다니까.
"하으, 노조미.... 너무 좋다."
어떤 선택을 하든, 행복하게 받아주고 즐겁게 놀아주는 노조미의 모습에. 그녀는 점점 사랑에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심지어 더 마음이 깊어진 둘은 미래를 약속하며 행복한 잠자리를 가지기도 하고.
아이가 생겼다는 것을 마법으로 확인하며 서로 기뻐하기도 한다.
말 그대로 두 사람의 행복한 인생을 그대로 살아가는 기분이었기에.
그녀는 정말 행복한 기분으로 작품에 빠져들어 갔다.
아니, 작품을 넘어서 노조미에 빠져들어 갔다.
이미 그녀의 안에서 노조미는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오늘은, 노조미랑...! 같이 장을 보러 가는 날!"
거의 신이 나서 즐겁게 만화를 보고 있던 그녀는.
갑자기 캐릭터들의 머리 위에서 떨어지는 화분의 모습에, 갑작스러운 불안감을 느꼈고.
바로 다음 페이지에 본능적으로 시선이 가는 순간 그 행동을 후회했다.
방금까지 함께 장을 보러 가고 있던 노조미가, 갑자기 떨어진 화분에 머리를 부딪혀 그대로 쓰러졌고.
대량의 피가 쏟아져나와 주변이 피로 난리가 나는 와중에.
주인공인 레터는 온몸을 피로 범벅을 하면서, 노조미를 껴안고 오열했다.
"거짓, 거짓말이지...?"
그녀는 방금 본 내용을 부정하면서 힘겹게 페이지를 넘겼지만, 그곳에는 정신이 완전히 부서진 채로 장례를 치르는 레터의 모습이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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