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36화 (136/229)

〈 136화 〉 27권 ­ 발신자 불명(5)

* * *

그녀는 순간 책을 뒤집어 놓고.

가만히 눈을 감은 채로 감정을 추스르기 시작했다.

너무 뜬금없이 튀어나온 장면이었고, 그래서 더 너무나 무서운 장면이었다.

대체 왜 그 착하던 노조미가 그런 죽음을 맞이해야 하는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선택을 잘 못 했나?"

그녀가 가장 처음 하게 된 생각은 바로 그거였다.

이 만화책은 분명 이제까지 선택한 것에 맞춰서 이야기가 바뀌어왔다.

그렇다면 지금 이 상황이, 자신의 선택 때문이라고 볼 수 있었고....

"후우...."

오히려 그녀의 안에는 강한 죄책감 비슷한 것이 생겨나 있었다.

하필이면 지금 시작되는 저주의 발작 때문에, 아주 기분 나쁘게 절정을 하면서도.

이 작품도 분명 노조미를 구할 방법이 마련되어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다시 책을 펼친다.

"잠깐만, 저 편지...."

레터는 한참을 오열하고, 끝내 술까지 잔뜩 마셔서 취한 채로 주점에서 잠이 든다.

그랬던 그가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이상한 편지지와 봉투 하나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런데 그 편지지와 봉투는 레터가 본적이 있던 녀석이었고.

왠지 모를 기시감과 함께, 머리를 부여잡더니 훨씬 심각해진 표정으로 편지지를 바라보았다.

"뭐야, 편지를 쓴다고...?"

그리고 그 편지에 열심히 내용을 적기 시작하더니.

그 편지를 그대로 밀봉해서 집 앞에 내려놓는 순간, 그 편지가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 후에는 어떤 내용을 편지에 썼는지, 커다랗게 편지지를 띄워서 보여줬다.

"이 편지에는 확실히 특별한 힘이 깃들어 있다. 나는 '이 편지'라면 노조미를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확신하고 편지를 쓴다."

그 순간, 이 편지를 맨 처음에 받았다는 사실이 갑자기 떠오르면서.

사실 그 발신자 불명의 편지가, 미래의 레터가 보낸 것이라는 것을 알아차릴 수밖에 없었다.

즉, 이 편지로 레터는 노조미를 구하고자 했으리라.

과거의 자신에게 지금의 상황을 알리려고 했다.

"...하지만 정작 도착했던 건 아무것도 적히지 않은 빈 편지지였는데?"

일단 편지의 내용을 최대한 기억한 뒤, 다음 페이지로 넘겼더니.

그곳에는 '엔딩1: 과거를 바꾸기 위한 염원'이라는 문구와 함께.

책의 거의 끝부분의 페이지를 알려주며, 그곳에 있는 '엔딩1'의 스티커를 떼어내라고 적혀 있었다.

"...스티커?"

실제로 그 페이지를 열었더니, 그런 식으로 스티커가 달라붙어 있는 곳이 있었고.

천천히 '엔딩1'이 있는 부분을 떼어냈더니, 그곳에는 편지의 내용과 방금 그녀가 본 스토리가 간략하게 적혀 있었다.

심지어 같이 쇼핑하러 가기로 했던 날 아침의 화사한 노조미의 그림까지 들어가 있어, 보는 순간 모든 내용이 쭉 머릿속을 훑고 지나가는 듯했다.

"이곳은 결말을 수집하는 공간입니다. 현재 작품의 어느 곳을 보고 있는지와 관련 없이. 이 공간을 살피는 것은 문제가 없으나. 스티커의 경우 작품에서 떼어내는 것을 지시했을 경우만 떼어내 주세요."

결말을 수집한다?

즉, 그녀가 선택한 것으로 결말이 변화하게 되고.

그 각기 결말은 이곳에 기록되어, 언제든 확인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페이지를 넘겨보니, 이것 이외에도 꽤 많은 결말이 준비되어 있었다.

총 8개나 되는 결말이라니, 그녀는 저 중에 노조미를 구하는 결말이 분명히 있을 거라고 믿으며 작품을 맨 처음으로 되돌렸다.

"스티커를 떼어낸 다음엔, 처음부터 다시 작품을 즐기면 된다고 했으니까."

그리고 작품의 맨 처음에 편지가 등장하는 장면을 보며, 아까의 의문스럽던 마음은 사라지고 노조미를 구해야 한다는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 차올랐다.

저 편지가 미래의 자신이 보낸 것임을 전혀 알지 못하는 레터가 굉장히 답답해졌다.

아니, 왜 저 편지는 글자를 적었는데 다 사라진 거야?

"기시감!? 잠시만, 그래.... 처음에는 그냥 레터가 아파서 그렇다고 생각했어."

하지만 그게 레터가 과거로 돌아왔다는 증거라면?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했던 일은 거짓이 아니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 된다.

왠지 그것이 느껴져서, 그녀는 이제야 상황을 더 확실하게 이해하기 시작했다.

"노조미...."

생각해보면 처음에 노조미를 봤을 때 주인공은,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 이유를 몰라서, 웃으면서 넘겼던 부분이었는데.

지금은 그녀도 그 울음에 동참할 것만 같은 상태가 되었다.

"...구하면 되는 거야. 이번에는 노조미가 죽지 않는 선택지를 찾는 거야."

마지막에 그녀가 선택했던 선택지들을 비틀면 되지 않을까.

그때 장을 보러 가지 않았다면, 분명 화분으로 노조미가 죽는 일도 없었을 거다.

차라리 그날 다른 곳에 간다면....

"산?"

그래, 노조미가 그때 산행도 가고 싶다고 말했었고.

선택지에서도 고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녀는 오랜만에 노조미의 착하고 참한 모습을 보며, 반쯤 억지로 웃으면서 작품을 읽어나갔다.

하지만 그녀가 다른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노조미는 색다른 모습을 보여주며 자꾸 그녀의 마음을 파고들었고.

그녀는 레터와 함께 다시 노조미라는 여자애에게 푹 빠져들었다.

"역시, 이야기가 바뀌네."

원래라면 쇼핑을 하러 갔을 둘이, 이번에는 산에 가서 구경하는 것으로 일정이 바뀌었다.

그녀는 이제 노조미가 화분 때문에 죽지는 않으리라 생각하며 작품을 계속 읽어나갔지만.

자꾸 노조미를 따라다니는 듯한 이상한 어두움이 굉장히 신경이 쓰였다.

"이게 뭐지?"

뭔가 형체가 있는 건 아닌데, 이상할 정도로 노조미가 어둡게 느껴졌다.

분명히 더 밝을만한 위치에 서 있는데도, 그림자에 가려진 것처럼....

"안돼!"

그리고 이번에는 발을 헛디딘 노조미가 절벽 쪽으로 넘어지고 말았고.

그대로 노조미가 절벽으로 떨어져서 죽는 것을 보며, 그녀는 굉장히 아찔한 감각을 느꼈다.

결국 이번에도 방법이 바뀌었을 뿐, 결말은 그대로였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노조미를 죽이려고 하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을 '제츠'라는 이름의 저주라고 부르기로 했다."

저주.

즉, 노조미는 우연히 죽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의미했다.

'제츠'라는 이름의 저주에 살해당하는 것이기에, 장소를 바꾸더라도 노조미는 '제츠'에게 살해당했다.

[엔딩3: 저주를 지닌 소녀]

다른 엔딩을 맞이했지만, 여전히 노조미를 구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혹시 내가 고른 그 엔딩만 노조미가 죽는 것은 아닐까 기대했지만.

이번 엔딩도 마찬가지인 것을 봐서, 간단하게 노조미를 구할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았다.

"정신 차려. 계속 찾는 거야."

그녀는 작품의 뒤로 가서 스티커를 떼어 엔딩을 수집한 뒤.

다시 작품을 맨 처음부터 읽어가기 시작했다.

이제까지 해보지 않았던 선택지 위주로 골라가며, 새로운 노조미의 모습을 보고 기억한다.

빌어먹게도, 그녀의 울적한 마음을 노조미는 매번 녹여내며 자신의 사랑스러움을 어필했다.

"이번에는 절대로 집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설마 집 안에서 그녀가 죽을만한 이유가 있을까 싶었다.

그래도 이제까지 있었던 노조미의 사망은, 저주가 간단한 조작으로 노조미를 살해할 수 있을 만한 상황이었으니.

혹시 집이라면 그녀의 죽음을 미룰 수 있는 건 아닐까 싶었다.

"윽...!"

하지만 그 결말은 훨씬 더 처참했다.

이제까지 보았던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게 죽어, 온몸이 칼로 난도질 되어 있고.

얼굴에는 고통이 가득해 보이는 것을 보며, 그녀는 이 선택지를 골라온 것을 후회했다.

「기억한다. 나는 분명 이런 일들을 처음 겪고 있지 않다.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기억해. 기억해. 기억해. 노조미는 처음 죽은 것이 아닐 것이다. 왜 이렇게 되는 걸까. 왜? 왜? 왜?」

평소에 정신을 가다듬고 적어 내린 편지가 아니라.

거실에 있는 노조미의 시체를 그대로 방치한 채로 적는 광기에 물든 편지.

그리고 그렇게 편지를 적어 내리면서도, 레터는 한 가지 사실을 깨닫는다.

"아무리 내가 편지를 적어서 노조미를 구해야 한다고 적어도. 편지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 '알 수 없는 힘이 편지의 내용을 지우'고 있다."

'엔딩2: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절망'을 수집하며.

처음으로 그녀는 짧지만, 눈물을 흘렸다.

벌써 세 번째 엔딩을 보면서도, 여전히 노조미를 구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이렇게 과거로 돌아가도, 편지에 나와 있는 것처럼 편지에 적는 내용조차 전달할 수가 없었다.

무력했다.

"드디어, 같이 있는 선택을 찾았어."

그래서 그녀는 가장 괜찮은 방법을 찾았다.

노조미와 레터가 집 안에서 함께 할 수 있는 선택지다.

아예 침대에서 껴안고 있어서, 절대로 다른 무언가에게 당하지 않도록 하는 상황.

"아...."

하지만 몇 번이고 도전해서 겨우 찾아낸 그 엔딩에도 '제츠'라는 이름의 저주는 찾아왔고.

보라는 듯이 눈앞에서 노조미의 목을 조여왔다.

이유 없이 심장이 멎어 죽어가는 노조미는, 그 고통스러운 상황에서도 레터에게 사랑을 속삭였고.

그녀는 그 진득한 슬픔과 아름다움 속에서 '엔딩4: 정해진 운명'을 수집하고야 말았다.

"그녀를 죽이는 저주는, 정말 차가웠다. 만약 그녀를 따뜻하게 해서 저주를 '태워'버렸다면, 살려낼 수 있었을까?"

힘겹게 4번째 편지를 읽은 그녀는 한참 동안 감정을 추스르고 나서야 스티커를 떼어냈고.

역시 아무리 해도 결말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에 절망했다가, 그녀가 수집한 4개의 결말의 요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4개의 결말에 적힌 편지들의 내용에, 무언가 남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왜냐면 그 편지들은 레터가 어떻게든 과거의 자신에게 전달하려고 했던 노조미를 구할 힌트들이니까.

"잠시만, 만약 내가 생각한 게 맞으면...."

그녀는 곧바로 자신이 생각한 것을 실천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를 확인하자마자, 눈을 동그랗게 뜨며 작은 탄성을 내뱉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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