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2화 〉 29권 너만을 위한 그리고 영원을 향한(1)
* * *
"야, 야. 홑몸도 아닌데 뛰지 마."
"히히, 하지만 드디어 아카데미에서 해방되었다고 생각하니까 좋은 걸 어떻게 해. 이제 매일매일 칼리랑 같이 잘 수 있잖아?"
"그래, 그렇게 할 테니까. 천천히 걸어. 여기 팔짱 끼자."
"응!"
로자리아는 드디어 방학이라는 사실이 기쁜지, 엄청 신이 나 있었다.
역시 오늘이 가장 좋은 타이밍이 맞긴 한 모양이네.
지난 여름 방학에 로자리아가 이런 느낌이라서, 올해도 그렇지 않을까 싶었는데.
역시나 비슷한 분위기였다.
"오, 이거 봐 칼리! 진짜로 나왔어!"
"그러게. 꽤나 많네. 일단 다 사갈까?"
"응!"
별장에 가기 전에, 전시관에 와서 신작 만화를 살펴보는 중이었는데.
이번에 발신자 불명을 따라서 게임북의 형태로 나온 작품들이 몇 있다고 해서, 수도를 들리는 김에 사 가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근데 이거 예상했던 것보다 많은 작품이 게임북으로 나왔네?
아직 시간이 그렇게 오래 지나지 않아서, 몇 없으리라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까 대부분의 신작은 간단하게나마 게임북의 형태를 채용하려고 한 것이 보였다.
대충 훑어보니까 방금 그 작품은 엔딩이 하나지만, 중간 이벤트만 선택지로 바뀌는 식 같고....
'이런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속도는 참 빠르다니까.'
그리고 그중에서는 발신자 불명과 마찬가지로 엄청난 두께의 진심 게임북도 있었다.
끝부분을 펼치니까 마찬가지로 엔딩 수집이 있었으니, 이건 해보는 맛이 꽤나 있겠네.
솔직히 예전이었으면 만화의 스토리에 기대를 하지 못하는 작품이 많았지만, 1년 만에 꽤나 많은 성장이 있었기에.
이런 종류의 작품도 꽤나 기대를 하고 접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도 게임북이나 만들어 볼까."
"핑크빛 일기장 시리즈로? 아니면 아예 신작?"
"고민 중이야. 핑크빛 일기장은 후속작을 이미 다 짜놔서, 그걸 갑자기 게임북으로 돌리기도 애매해."
"그럼 그 작품부터 해야지."
로자리아의 작품인 핑크빛 일기장 시리즈에 관한 이야기였다.
분명 마지막에는 작품의 메인 빌런이었던 '크림'이 완전히 혼쭐이 나고.
결국은 빌고 또 빌어서 친구 사이는 어떻게든 유지하지만, 그 죄로 딸기의 노예 정도의 바닥에 가까운 자리를 차지하는 결말이었는데.
의외로 크림은 그 위치에 만족하고, 딸기의 옆에만 있어도 괜찮다는 듯 행복해 보였지.
최근에 다시 읽어봤기 때문에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나저나 후속작이면 드디어 제대로 우유가 싸우던 메인 빌런과의 다툼이 되는 건가?
"그렇겠지? 일단 지금 짜둔 것부터 방학에 다 그리고, 그다음에 고민해야겠다."
우리는 게임북 이외에도 괜찮아 보이는 작품 몇 개를 더 골라서 구매하고.
방학 동안 우리의 시간을 보낼 별장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을 여는 순간, 평소와는 굉장히 다른 분위기 집 내부가 드러났다.
"어, 어라!? 칼리 여기 원래 이랬나?"
"이쪽으로 올래?"
"어?"
나는 로자리아에게 어떤 이벤트와 선물을 줘야 하는지 굉장히 고민했다.
이건 어쩌면 뒤늦게 그녀에게 하는 프러포즈인 만큼, 더 그녀가 원하는 것을 맞춰서 해주고 싶었기에.
그래서 그녀의 작품인 핑크빛 일기장 시리즈도 읽고, 이제까지 그녀와 있었던 일들도 엄청나게 기억을 뒤져가며 고민했다.
그러다가 내렸던 결론이 바로 로자리아가 좋아하는 것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런 내 옆에 본인이 있다는 것을 가장 소중하게 여겼고, 그런 상황이 깨질 불안감을 지우기 위해 '자신만이 가지는 특별함'과 '영원함'이라는 것에 집착했다.
이 부분은 로자리아의 평소 행동이나 말은 물론이고, 그녀의 만화에도 잔뜩 드러나 있었다.
고백하려는 상대가 가장 좋아하는 게 나라니.
그것 자체는 굉장히 기쁜 일이지만, 그만큼 어떤 선물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굉장히 고민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내가 준비한 이 이벤트고.
나는 미리 만들어둔 마법의 마법진을 그려냈고.
마법이 발동하자, 자그마한 불빛이 마치 길처럼 이어져서 우리가 가야 할 앞날을 밝혔다.
그리고 그러자 벽에 있던 그림들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거 칼리 그림체지?"
"응. 네가 그린 것보다는 덜 귀엽지만, 최대한 너랑 내가 지냈던 일들을 그려봤어."
어릴 때부터 함께 했던 그녀와의 시간을 돌이킬 수 있게.
길게 늘여놓은 벽을 따라서 나는 그녀와 함께 과거의 우리가 지낸 시간을 걸었다.
아직 검술이고 뭐고 아무것도 모르던 순수한 시절의 따뜻하고 행복하던 둘의 추억부터.
검술을 해야 한다는 압박에 검만 휘두르던 내 곁에 유일하게 있어 주던 그녀의 모습과.
츤데레 기질을 버리고 메가데레로 변하던 시절과 나에게 마법을 가르쳐주던 시절.
그리고 지금 나의 아기를 배에 가지고 함께 하는 모습까지.
"네가 나에게 준 것들이고. 절대로 다른 사람은 대신할 수 없는 너와 나만의 추억들이야."
"칼리...."
나는 방금까지 우리가 걸어오면서 봤던 그림들을 모아 엮어둔 책을 건네줬다.
이것이 내가 그녀에게 주려는 '그녀의 특별함'을 담은 선물이다.
다른 곳에 발매조차 하지 않는, 오로지 로자리아만을 위해서 그린 그림으로 이루어진 우리들의 이야기를 담은 그림들이다.
'이것 때문에 최근에 잠을 거의 못 잤지....'
디데이는 방학이 시작하는 시점이 가장 좋을 것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제로 오늘 로자리아가 기분이 좋은 걸 봐서, 그건 괜찮은 선택이었다고 본다.
근데 문제는 이걸 해주기로 했을 때는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거다.
결국 밤을 새우면서 그림을 그리는 것에만 모든 것을 투자해서 만들어낸 결과물이었다.
솔직히 방학 이틀 전까지는 잠을 워낙 안 자서 니아가 미친놈이냐고 억지로 자게 하려고 했었다.
그래도 오늘을 망치면 안 되기 때문에 최대한 빨리 준비를 끝내고 어제는 푹 잤다.
하여튼 이 작업에도 시간을 투자하기에 바빠서, 발신자 불명의 추가 향초 일러스트 작업은 미뤄버렸다.
그건 이제 방학 때 천천히 시간 내서 작업하면 되겠지.
사실 저 만화만 준비했으면 그렇게 빡세게 하지 않아도 되었겠지만, 하나 더 준비한 게 있었다.
다른 선물에 대해서는 고민한 것이 두 가지였는데.
어떻게 하면 그녀가 좋아한다는 나를 제대로 선물로써 가공해 줄 수 있는 걸까 하는 고민과.
로자리아가 원하는 '영원함'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나는 아까 그 마법진의 다음 발동 조건을 건드렸고.
그러자 우리가 걸어온 길이 강하게 불타오르며 주위를 새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그 불길에 로자리아의 시선이 가는 사이, 왼손의 장갑을 벗은 뒤에 미리 준비해놨던 장소에 몰래 약지를 묶었다.
"로자리아, 내 모든 걸 너에게 준다고는 말하지 못할지도 몰라. 나는 욕심쟁이니까."
하지만 내 안에서 너는 너무나 중요한 사람이고.
그렇기에 영원히 너를 나에게서 지울 수 있는 날은 오지 않을 거야.
따라서 내 몸에는 영원히 너의 흔적이 남을 것이고, 만약 네가 죽더라도 사라지지 않겠지.
"어?"
화르륵!
그 순간 불길은 더 강해져서 내 약지를 묶고 있던 천조차 순식간에 불태워 없애버렸고.
그 자리에는 내 손만 얌전하게 남아있었다.
평소와 똑같은 것 같지만, 분명히 이 손에는 차이점이 있었다.
"...딸기?"
"딸기를 베이스로 해서 디자인한 반지.... 모양의 문신이야. 로자리아를 생각하면서 내 몸에 손가락에 그렸어. 문신이니까 평생 지울 수 없어."
문신을 통해서 지울 수 없는 도장으로 내 몸에 박는다.
내 일부는 분명히 로자리아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몸에 박아둔다.
그것이 내가 그녀에게 나를 선물하는 방법이었다.
"그리고 이거."
나는 손바닥을 펼쳐서, 똑같은 문양이 그려진 금반지를 로자리아에게 건네줬다.
금은 당연히 절대로 변형이 되지 않는 금속으로, 영원을 상징하는 거고.
그 금에 변형 방지 연금 처리까지 해서, 그려진 문양도 잘 지워지지 않을 거다.
"이게 내가 너에게 주는 나야. 리아야."
"반지...."
아직 놀란 상태를 벗어나지 못한 로자리아가, 천천히 반지를 받아 가서 약지에 끼우기 시작했다.
내가 미리 사이즈를 맞춰놨기 때문에, 별문제 없이 딱 들어맞았고.
그녀는 바로 내 손도 가져가더니, 그려진 문양을 비교하면서 엄청나게 기쁜 표정이 되어갔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속으로 안도했고.
최대한 마음을 진정시키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실 많이 고민했어. 내가 너한테 뭘 해줄 수 있을까. 이제까지 받은 건 엄청나게 많고. 힘들게 한 것도 많은데. 정작 내가 해준 건 없잖아."
"칼리...."
"늦었지만, 사랑해 로자리아."
"...응!"
그대로 로자리아는 나에게 안겨서 울먹이기 시작했고.
나는 울지 말라고 했다가, 이렇게 작정하고 울려놓고 그런 소리 한다고 한 대 맞았다.
...하긴 나도 이렇게 갑자기 뭘 받으면 울컥할 것 같긴 한데.
"이거 그리는데 아프지 않았어?"
"조금 아프긴 했는데, 뭐, 로자리아한테 주는 선물이라고 생각하면 별거 아닌 정도지."
오히려 뭘 줘야 할지 고민일 때가 더 힘들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뭘 해야 할지 확신한 이후에는 딱히 어려운 것이 없었다.
오히려 이게 먹히지 않았을 때가 걱정되는 게 더 문제였다.
"칼리, 그거 알아?"
"뭐가...?"
"요즘 들어갈수록 옛날 칼리로 돌아오고 있다는 거."
"...옛날? 내가 어땠더라?"
"자기가 그림도 그려놓고 몰라?"
"몰라, 얼핏 기억나는 걸 쥐어짜서 그렸단 말이야. 너무 옛날인걸."
로자리아는 내 말을 듣고 막 웃더니.
그런 게 있다면서, 결국은 나에게 아무것도 알려주지 않고 이야기를 끝냈다.
대체 그녀가 뭘 말하려고 했던 건지 전혀 예상이 가질 않았다.
"그냥, 반했던 방법에 또다시 반하게 하면 반칙이라고 하고 싶을 뿐이야."
"...칭찬으로 받으면 되는 거지?"
"응, 아주 좋아. 사랑해."
잘은 모르겠지만, 로자리아가 기뻐하는 것 같으니까 된 건가?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