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3화 〉 29권 너만을 위한 그리고 영원을 향한(2)
* * *
"와, 진짜 오랜만에 와보네."
"나도."
"아니, 너는 너희 집인데 오랜만에 오면 안 되지."
로자리아는 자신의 부모님들에게 약속을 잡아서 따로 각을 잡으려고 했지만.
바로 가문에서 불가하다며, 꼬우면 집으로 기어들어 오라는 말만 돌아왔단다.
낌새를 보니까 이미 아카데미를 통해서 임신했다는 걸 다 들킨 것 같다고 하소연하던데.
나는 그걸 이번 학기가 될 때까지 안 걸릴 것 같다고 생각한 네가 더 신기한데....
"아, 안녕하십니까. 오랜만에 뵙습니다. 칼리 흐 글라디스입니다."
"칼리, 오랜만이네. 이야, 많이 컸어. 마지막에 봤을 때는 훨씬 어렸는데."
"죄송합니다. 가끔 찾아뵈었어야 했는데. 매번 로자리아만 저희 쪽에 오게 했었네요."
"아니야. 대강 사정은 들었으니까. 그런데 사정이 있는 건 있는 거고, 굳이 반대를 무릅쓰고 엄마 말이라면 귓등으로도 안 쳐 듣는 딸년이 문제지."
오, 신랄한데.
하긴 이제까지 계속 내 곁을 지킨다고 가문이랑 충돌이 많았던 로자리아였으니.
저런 평가가 나오는 게 당연할지도 모른다.
솔직히 귀중한 딸이 남자 새끼한테 빠져서 그렇게 한다면 화가 날 만하지.
"죄송합니다. 결국 제가 문제네요...."
"칼리, 그걸 왜...."
"에이, 그게 왜 칼리가 잘못이야? 우리 딸이 고집불통이라 그런 거지. 꼭 자기 같은 딸 낳아봐야 엄마 기분을 이해할걸? 그래도 칼리, 칼리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임신에 성공하긴 했네."
"엄마...!"
"지금 오랜만에 와서 배까지 산만해져서 화부터 내는 거니? 어우, 내 딸이지만 답답해."
여긴 확실히 우리 집안이랑 분위기가 많이 다르네....
물론 우리도 여러모로 충돌이 많았던 집이지만, 여기는 뭔가 기본적인 분위기 자체가 친밀하다고 해야 하나.
이렇게 친숙한 분위기에서 싸우고 뛰쳐나오는 걸 밥 먹듯이 하는 로자리아도 참 대단했다.
"아, 안녕하십니까."
"아, 앉게. 자네가 온다고 해서 식사 준비는 좀 빠듯하게 했으니. 많이 들게."
그, 장인어른?
일반적으로 그런 부분은 부담 주지 않게 말하지 않나요.
여러모로 평범한 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집안이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면 샤론 원로님이 없는 걸 다행이라고 생각해야 하나?
"여러모로 자네에겐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
"네!?"
"아니, 그렇지 않은가. 그 옛날부터 민폐 수준으로 남의 가문에 쳐들어가서 별 이상한 사고를 다 치는데. 심지어 이제는 순진한 애를 꾀어서 강제 책임을 요구하기 위해서 임신까지 해? 만약 내가 스크라이카였으면 억울해 죽었어."
"강제 책임이라뇨. 아닙니다. 아버님, 저 로자리아 사랑합니다. 책임지고 싶고, 함께하고 싶습니다."
"그거 가스라이팅이야."
"엄마!?"
대체 이 집안에서 로자리아에 대한 인식은 왜 이런 수준으로 바닥까지 떨어져 있는 걸까.
잠시 고민해 봤는데, 생각해보면 예전부터 로자리아가 츤데레 적인 성격 때문에 친한 사람이랑도 굉장히 틱틱거렸지.
요즘에야 좀 나아졌지만, 가문 사람들과 사이가 틀어진 것은 그때 이야기니.
자연스럽게 저런 평가가 나오는 걸지도 모르겠다.
"지금은 애가 솔직해져서, 예전보다 훨씬 성숙해졌습니다."
"성숙해진 애가 집에 안 오고 자리를 잡자고 해?"
"그, 그건.... 아니 아무튼 왔잖아!"
"괘씸하니까 그렇지."
나는 로자리아에게 눈치를 줬고.
결국 로자리아는 끝까지 석연치 않은 표정을 하다가, 나와 함께 일어나서 고개를 숙였다.
난 금쪽같은 딸을 임신시킨 문제로 숙인 것이고, 로자리아는 이제까지 벌였던 일련의 신경전에 대한 사과였다.
"허...."
"자, 잘못한 건 맞으니까요. 죄송해요."
"로자리아가.... 사과!?"
"...진짜 별일을 다 보네. 너 우리 딸 아니지? 칼리, 대체 얘를 어떻게 하면 이렇게 얌전하고 조신하게 만들 수 있는 거니?"
원래 로자리아는 그런 부분에서 부끄러움이 많아서, 어지간하면 미안하다는 말을 잘 하지 않긴 했다.
그것 때문에 계속 상황이 악화하는 경우가 많았지.
다만 그건 어디까지나 내가 전생의 기억을 각성하게 된, '그 사건' 이전까지의 이야기고.
그 이후로는 매우 순해진 편이었다.
"솔직히 연락 한 통 없다가, 배가 이렇게 부른 뒤에야 찾아온 게 괘씸하긴 하지만. 자네 얼굴 봐서라도 용서해줘야겠지."
"아빠...."
"너 이뻐서 용서하는 거 아니다. 애초에 넌 올 생각도 없었을 거 아니냐."
"그, 그건...."
"부끄러워해서 그렇지, 오고 싶어 했을 겁니다."
"그렇지, 그 부끄럽다는 이유로 집에 안 쳐들어오는 미친년이라 문제지."
"엄마!"
"뭐, 내가 틀린 말 했니? 그래도 믿음직한 사위가 생겨서 다행이야. 진짜 저거 누가 데려가려나 했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로자리아가 그 정도는 아니긴 합니다.
아마 밖에서 사위 구하려고 하면 줄을 서지 않을까 싶은데요.
아무리 그래도 마기우스 가문의 천재 마법사만 한 결혼 상대가 어딨어.
"솔직히 아무리 우리 애지만, 질려서 칼리 너도 포기할 줄 알았거든."
하여튼 로자리아의 성격 때문에, 버티지 못한 내가 쫓아내기만을 기다리셨다고 했다.
그런데 그걸 견뎌내는 신기한 상황에, 아이까지 가질 정도로 사랑을 받다니.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고 한다.
"우리가 너무 오냐오냐 키워서, 그래서 이 사달이 났다고 후회하고 있었는데. 그걸 자네가 고쳐버릴 줄이야."
"우연히 사건이 있었고, 그걸 토대로 로자리아 혼자 성장한 겁니다. 저는 한 게 없어요."
"하여튼 자네 곁에서 일어난 일이니, 다 자네 덕이지."
"그래서, 앞으로는 자주 들어 오는 거지? 우리가 네가 임신했다는 소식을 네 입이 아니라 다른 곳을 통해서 들었을 때 기분을 아니?"
"...죄송해요."
"아니, 왜 사과해! 너 누구야? 우리 딸 아니지!?"
슬슬 익숙해지세요....
하긴 생각해보면 그때 내가 급발진했던 것도, 워낙 그 당시 로자리아의 행동이 사람 꼴 받게 하는 형태라서 그런 것도 있어.
이제는 그런 로자리아가 잘 떠오르지도 않을 정도로, 순해진 느낌이지만.
그 와중에 로자리아가 되게 부끄러워하는 모습이 좀 귀엽네.
"그리고 따지고 보자면, 제가 로자리아에게 구원받은 적이 훨씬 많습니다."
"......."
"사실 아시다시피 제가 검만 휘두르면서 가문에 틀어박혀 있었지 않습니까. 그때 정신 상태는 정말 한계까지 몰려 있었는데, 그런 저를 유일하게 옆에서 지켜준 게 로자리아거든요."
물론 자기는 좋아하지 않는 척, 츤츤거리면서 괴롭히기나 했고.
심지어 같이 아카데미 가겠다고 도발까지 하는 녀석이었지만.
애초에 그런 행동을 하기 이전에, 붙어 있어 주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게 나를 애정해주는 행동의 표시였고.
그것만으로도 구원을 받은 적이 분명 있었다.
당시에야 하는 짓이 꼴 받아서 인정하기 힘들었지만, 지금은 확신할 수 있다.
"물론, 로자리아의 그 행동이 마기우스 가문 입장에서는 아주 철없고 민폐인 행동이었겠지만. 저에게는 구원 그 자체였습니다."
"이건 가스라이팅이 아니라 세뇌를 당한 수준인데...."
"엄마!?"
말은 저렇게 하셔도, 자신들의 딸이니까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는 더 잘 아실 거라고 생각한다.
로자리아가 악의로 그런 행동을 하는 건 아니었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시는 분들일 테니까.
다만 아무리 그래도 응어리가 쌓일 만큼 상황이 나쁘게 흘러간 건 어쩔 수 없지.
"뭐, 로자리아 이야기는 여기까지 하고. 자네도 요즘 유명하던데."
"네? 아...."
"검술부가 아니라 마법부를 택한 것도 놀라운데, 차석이라니."
"아버님이 말씀하시는 걸 들으니까, 재능도 로자리아보다 낫다던데요."
샤론 원로님은 여기까지 내 이야기를 하셨나 보다.
하긴 내가 아카데미에 입학하면서, 내가 로자리아가 집착한다던 바로 그 남자애라는 알게 되셨으니.
아마 이야기하다가 그런 내용도 자연스럽게 나왔겠지.
"그래서, 검은 완전히 포기한 거고?"
"조금 조건이 있지만, 지금은 그림이랑 만화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 중입니다."
"아, 맞다. 이거 선물 받았다?"
너는 이 와중에 자랑하고 싶니.
로자리아는 내가 방학 시작 날 건네줬던 '너만을 위한 그리고 영원을 향한'이라는 이름의 그림 집을 꺼냈다.
그나저나 반지도 평소에 항상 끼고 다니고 있는 걸 보면, 여러모로 그날 이벤트는 성공적이었나보다.
"칼리 이야기를 할 때만 표정이 헤벌쭉한 것을 보니까, 우리 딸은 맞는데."
"그랬어?"
"그, 그게.... 그래지 않았을까? 오래돼서 확실하게는 모르겠는데."
"그랬지. 그런 표정이 아니었으면, 때려 패서라도 끌고 돌아왔을 거야."
방금 딸을 엄청나게 돌리시긴 했지만, 결국 그런 딸의 행복을 위해서 다 참고 포기하셨던 거다.
딸 이기는 부모가 없다더니, 역시 그냥 져주신 거구나.
"그러니까, 애초에 우리는 오늘 일은 각오를 하고 있었어. 그러니 사과하지 않아도 괜찮단다."
"우리 딸 잘 부탁하네. 로자리아 너도 전보다는 철이 많이 든 모양이니까 하는 말인데, 남편 힘들게 하지 말고 착하게 살아."
"응...."
솔직히 오랜 시간 동안 딸을 빼앗긴데다, 심지어 말도 없이 임신까지 시켰으니.
욕이란 욕은 다 먹어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나를 환대해주시는 데다, 별문제 없이 허락도 떨어진 느낌이라 얼떨떨했다.
여전히 착한 분들이네.
"감사합니다."
"대신 하나만 약속해주게, 꾸준히 이 녀석이 여기 좀 오라고 해줘."
"그건 제가 굳이 말하지 않아도 그럴 겁니다. 그렇지?"
"...응. 미안 아빠."
마치 악역 빙의물에서 주인공이 빙의 직후 하는 평범하게 착한 행동을 본 주변 인물들처럼.
로자리아의 부모님은 로자리아의 착한 행동 하나하나에 감동과 감탄을 했고.
그걸 지켜보고 있는 나로서는 기분이 이상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저런 상황이면 로자리아의 호감도가 올라가지 않나?
왜 그때마다 저 두 분에게 내 호감도가 올라간다는 느낌이 드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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