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31권 희망과 절망의 안티노미(1)
* * *
"하, 진짜 하필이면 어제 같은 날 시간이 없어서...."
한 마법사는 어제 온종일 자신의 시간을 빼앗아간 직장에 짜증을 내면서도.
하루가 지났는데 남아있는 작품의 물량을 보면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아마 시우 화가 작품이라고 엄청나게 많은 물량을 준비해둔 모양이었다.
"그러니까, 이 다섯 개가 다 다른 작품이라는 거죠?"
"네, 맞습니다. 전부 드릴까요?"
"그렇게 해주세요."
마법사는 이미 대충 이야기를 들었기에, 자금은 넉넉하게 챙겨온 상황이었다.
그나저나 이번 작품이 5개라니, 휴가까지 써가면서 즐길 시간을 마련한 것이 후회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과연 이번에는 무슨 작품이길래 이런 특이한 형태려나....
"우선, 이것부터 읽어볼까."
'유리구두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가족에게 인정받고 싶었던 엘라라는 주인공의 이야기였다.
그 와중에 제목 아래에 '절망의 이야기'라고 적힌 것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망이라는 이야기를 할 정도로 끔찍한 이야기라는 건가?
엘라는 가족에게 무시당하는 상황이었고, 거의 능력을 통해 검증받은 결과만 인정해주는 집안 탓에 많은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메르헨'이라는 것을 각성하게 되고, 이것을 통한 메르헨 배틀이라면 인정받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
여러모로 열심히 싸우면서 메르헨 배틀의 실력을 키워나간다.
엘라의 메르헨은 엘라와 마찬가지로 가족들에게 인정받고 싶어 하는 소녀의 이야기지만.
정작 그 결말은 가족에게 인정받는 것이 아니라, 인정을 주는 것이 아니라 끝까지 그녀를 괴롭히고 왕자까지 빼앗으려던 가족들이 벌을 받는 이야기였다.
그 밖에는 12시가 되면 풀리는 마법이나, 그 마법으로 남아버린 유리구두 등이 마법사에게 인상 깊게 느껴졌다.
"뭐, 저런 요상한 마법이 있다고 보긴 어렵지만. 꿈 같은 거니까...."
오히려 시간이 지나면 마력이 다해서 정지한다는 점에서.
마법의 기본적인 틀은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아무래도 이걸 그린 시우 화가의 어쩔 수 없는 점이겠지.
그린 본인이 마법사니까 완벽하게 실제 마법과 다르게만 할 수는 없었을 거다.
그렇게 선전하면서 강해져 가던 엘라는, 예상치 못한 시점에서 패배하고 꺾이면서 주저앉게 된다.
벽이나 다름없는 상황을 느끼고, 그 상황에 이상한 사람을 만나면서 이야기가 급변하게 된다.
그 사람은 더 강해질 방법이 있다며 엘라를 꼬드기고, 엘라는 결국 승리하기 위해 그 유혹에 넘어가는데.
그 순간 엘라의 메르헨이 완전히 바뀌게 된다.
본래 왕자님을 만나러 파티에 가는 이야기는 완전히 사라지고.
마법사의 마법을 이용해, 자신들의 가족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이상한 모습으로 타락하는 것이 바뀐 메르헨의 모습이었다.
마치 서큐버스의 모습과 비슷한, 유리 구두 차림의 소녀가.
자신의 가족을 마법을 사용해 만든 무언가로 범하고, 조교 하는 모습은 이제까지 알던 내용과는 전혀 다른 메르헨이었다.
"와, 와아...."
그 결말은 그녀를 포함한 가족 전부가 흑마법사로 몰려 화형당하는 것이었음에도.
그렇게 가족만 생각하던 착한 아이가, 비틀린 사랑으로 가족들을 그렇게 성적으로 괴롭히는 모습이 너무 인상적이었으며.
바뀌어버린 메르헨으로 인해 바뀐 메르헨 카드와 레어 카드를 들고 모두를 쓰러트리는 엘라의 광기 또한 묘한 쾌감을 주었다.
그렇게 엘라는 메르헨에 있는 어둠 때문에 가족들이 끝까지 인정하지 않아, 그 쓸쓸함을 양분 삼아 더 강해져 강대한 권력까지 손에 넣지만.
자신이 메르헨처럼 가족을 망가트릴까 봐, 최대한 가족에서 멀어지고는.
혼자서 쓸쓸하게 살아가는 결말은 꽤 많은 여운을 남겼다.
그 후에 읽은 다른 작품들도 비슷하게 흘러가는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아무래도 엘라의 이야기가 가장 그녀에겐 마음에 들었고, 상대를 '범한다'라는 컨셉을 가진 엘라의 메르헨도 마음에 들었기에.
마법사는 모든 작품을 읽고 나서, 자신이 사용할 메르헨 덱으로 엘라의 것을 선택했다.
"어, 어?"
그리고 마법사가 자신이 읽은 작품이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은 건.
우연히 날짜가 맞아 참가하게 된 '발푸르니기스의 밤'이라는 이름의 대회 때문이었다.
딱히 아는 사람이 있지 않아서, 혼자서만 테스트 플레이를 했던 만큼.
5개의 덱은 완벽하게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대회에서 만나는 덱 대다수는 자신이 아는 것과 전혀 달랐다.
아니, 정확히는 이야기에서 초반에 등장하는 변질하기 전의 메르헨과 같은 것에.
약간의 레어 카드 발전만 이루어진 느낌의 덱들이었다.
그나마 이쪽은 그 컨셉에 대해서도 알기에, 어떻게든 대응했지만.
상대방들은 난생처음 보는 덱이라는 듯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시작했고.
마치, 자기 자신이 엘라가 되어 나쁜 힘을 빌려 강해진 듯한 기분에.
갈수록 그런 상황을 즐기며 메르헨 베틀을 이어나갔다.
"그런 카드가 있을 리가 없잖아! 반칙이야!"
"심판분은 존재하는 카드라는 표정인데요? 애초에 이 카드가 문제가 있었다면, 제가 여기까지 올라왔겠어요?"
"그, 그건...!"
직장에서 말단으로 일하면서 쌓였던 스트레스가 쫘악 터져나가는 듯한 기분을 느끼며.
마법사는 신나게 대회를 즐기고 있었다.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설마 정말로 그게 먹힐 거라고는 생각 못 했는데...."
"뭐, 다수의 플레이어한텐 기분 나쁜 경험일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이런 대회는 반전이 있는 사건 하나 정도는 있어야 재밌잖아."
흐뭇하게 웃고 있는 내 모습을 보며, 로자리아는 악질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5개의 덱 컨셉은 부족한 것 같아서, 이야기마다 2개로 나눠서 10개로 간 것까지는 좋고.
그 컨셉을 각기 희망과 절망으로 삼은 것도 좋았다.
그런데 정작 그걸 그냥 팔기는 좀 아쉽더라고.
그렇다고 기존처럼 뽑기 형태로 가면, 오히려 들킬 확률이 높기도 하고.
그냥 고가에 팔아먹기밖에 안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일자가 홀수일 때랑 짝수일 때 파는 작품이 다르다니...."
"첫날엔 사람이 거의 다 몰려서 책을 사 갈 테니. 그날 희망을 팔고. 그다음 날은 절망을 판다. 괜찮지 않았어?"
"칼리가 원했던 대로 되긴 했지. 소수의 절망 덱을 가진 사람들이 대회에서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고 있으니까."
이번 이너 메르헨의 첫 시리즈는, 내부적으로는 희망과 절망의 이야기 정도로 컨셉이 확정이 났고.
그래서 같은 캐릭터별로 희망의 이야기와 절망의 이야기로 부제를 달아서 양쪽을 출시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희망의 날과 절망의 날로 하루에 한 번씩 판매일을 교차하면서 판매하기로 했었다.
그래야 여러 작품을 사는 사람도 희망과 절망 중 하나의 이야기만 있다고 속게 되니까.
"그래도 신기하네. 정보가 부족하다는 것만으로도 저 정도 승률 차이가 난다니."
"오히려 살짝 약하게 설계한 파트도 있는데, 저리 선전하는 걸 보면 신기하긴 해."
기본적으로 절망 쪽 덱들의 컨셉이 상대를 괴롭히는 형태라, 그것들이 너무 주류가 되면 너무 게임에서 당하는 사람들이 재미가 없어지기에.
아주 살짝씩 희망 덱들에 비해 약하게 설계했음에도.
첫 대회에는 절망 덱의 존재 자체를 모르는 사람이 많아서인지, 굉장히 절망 덱이 선전하는 것이 느껴졌다.
"재밌잖아. 저렇게 같은 캐릭터의 덱이지만, 완전히 컨셉이 달라서 충돌한다니."
"작품의 특정 타이밍의 승패 하나로, 엄청나게 많은 게 바뀐 셈이긴 하지."
마치 게임북에서 선택지를 골라 엔딩이 바뀌듯, 희망과 절망의 이야기는 단 하나의 차이로 인해 완전히 다른 결말을 맞이했다.
너는 거기서 이겼기에, 그렇게 강해질 수 있었다며 비웃는 절망의 이야기와.
거기서 졌더라도 꺾이지 않았다면, 이렇게 정석적인 방법으로 강해질 수 있었다고 주장하는 희망의 이야기.
그 둘의 인식의 틈이 보여주는 싸움이 참 좋다고 생각한다.
그나저나 절망의 이야기 쪽은 조금 걱정일 정도로 하드하거나 특이 취향이 많이 나와서 걱정했는데.
그런 짓을 했던 결말이 다 좋지 않아서 그런지 넘어간 모양이었다.
"근데 황금 사과 과수원에서, 과수원 엘프가 집단으로 오크한테 범해져서 쾌감에 타락해버리는 건. 어쩌다가 생각한 거야?"
"정확히는 송곳니의 미약 효과로 떨어진 거지만.... 그거? 그, 가끔 오르카가 나한테 송곳니 박아서 미약 주입하거든? 거기서 약간 경험을 살렸지."
"아하?"
양치기 소년을 베이스로 한 '황금 사과 과수원 이야기'는, 희망에서는 오크들의 꼬심을 버티고 거짓말의 죄를 뉘우치는 이야기로 끝이 나지만.
절망에서는 오크들로 인해 쾌락에 타락해서 황금 사과에 대한 모든 정보를 넘기고, 오크의 편이 되어 오크와 엘프의 하프를 잔뜩 낳아 버린다.
조금 민감할 수 있는 문제라, 최대한 역사를 뒤져서 재현하는 형태 정도로만 그려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결국 나중에는 정신이 들어서 후회하면서 자살하는 마무리였으니.
이 이야기에 대해서 미화하거나 하는 내용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 것도 다 신경 쓰면서 그려?"
"...내가 이상한가?"
그리고 종족 간의 그런 민감한 부분이 아닌 건, 비슷한 내용인데도 어느 정도 미화를 해서 그린 파트도 있었다.
샤프가 등장하는 '웃지 않는 공주 이야기'의 절망 편인 경우.
기사가 나타나서 공주를 웃겨주지 못한 경우, 한 귀족이 쾌감이 잔뜩인 섹스로 웃게 해준다는 어처구니없는 조건을 내세우고.
정말 자지에 박혀서 쾌락에 타락해 웃게 되는 내용으로 스토리를 전개한 기억이 난다.
웃는다는 게 좀 망가진 듯한 쾌락에 절은 웃음이긴 한데.
하여튼 웃은 것은 웃은 거라서, 귀족은 그대로 공주와 결혼까지 했지.
"근데 그것도 결국 결말은 나쁘지 않았어?"
"뭐, 그렇긴 해."
유일하게 욕심부려서 남을 괴롭히던 이들, 특히나 그중에서도 가장 큰 영향을 주던 귀족들에게.
유일한 반기를 들고 있었던 공주가 넘어가 버렸으니.
자연스럽게 불만은 쌓여가다가 반란이 터져 공주까지 죽으면서 이야기가 끝이 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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