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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54화 (154/229)

〈 154화 〉 31권 ­ 희망과 절망의 안티노미(3)

* * *

"이건 진짜로 의외네."

"그러게, 마지막 결전에서 절망 덱을 꺼낼 줄이야."

대회에서는 희망덱과 절망덱이 따로 있다는 점을 숨기기 위해서, 그리고 어느 정도 플레이어들이 서로의 수를 숨길 수 있도록 선수 등록에는 그 둘을 구별하지 않고 있었다.

따라서 희망덱을 사용하던 사람이 대회 중간에 절망덱을 꺼내거나, 반대로 절망덱을 사용하던 사람이 희망덱을 사용해도 무방했고.

실제로 지금 결승전은 그걸 이용해서 고민한 끝에 모두 절망덱을 꺼내든 상황이었다.

하긴, 지금 매치 상대의 기본 메르헨 정도는 서로 알고 있을 테니.

그 매치를 기준으로 유리한 덱을 선정했을 테고, 그럼 자연스럽게 이렇게 될 수밖에 없지.

성냥팔이 소녀 유리와 탑에 갇힌 소녀 라푼젤이 맞붙게 되면, 아무래도 유리덱의 절망쪽이 라푼젤 희망에 굉장히 유리한데.

라푼젤 쪽은 대부분을 희망덱으로 올라왔으니, 당연히 그걸 노리고 절망을 사용해 카운터를 날리려고 했을 거다.

반대로 그걸 예측한 라푼젤은 절망덱을 사용해서 그 상성 관계를 때려 부순 거고.

양쪽 다 절망이면 크게 상성이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라서, 평범하게 운과 실력으로 판가름이 나겠지.

지금이야 덱이 적어서 이런 식이지만, 나중에는 여러 덱을 들고 할 수 있도록 룰 개정을 좀 해야겠네.

그나저나 대회가 참 예상했던 것처럼 돌아가네.

예선전이야 아무것도 몰랐으니까 절망이 좀 선전하다가, 덱 자체의 성능 차이로 희망이 꽤나 많이 승리했지만.

본선에서는 모든 걸 깨달은 참가자들이, 양쪽 덱을 모두 가지고 나왔거든.

아마 이렇게 될 거라 예상하고 짠 대회 시스템인 만큼, 지금 상황이 되게 마음에 들었다.

"유리의 절망 메르헨이 어떤 내용이더라?"

"사실 성냥이 마법이 아니라, 환각을 보여줘서 사람을 현혹하는 마약이라는 내용이야. 마약 특유의 강한 의존성이랑 중독성을 상대한테 묻혀서 몰아붙이는 덱이지."

실제로 이쪽 세상에도 마약으로 분류되어 금지되는 종류의 물건이 좀 있었다.

오크의 송곳니에서 나오는 미약 같은 것이야, 종족 특징인데다 의존성까지는 없어서 상대방 동의 없는 사용만 불법이고 약물의 출처도 알기 쉬워서 처벌이 쉽지만.

마법이나 검술 등 향상성을 중요시하는 제국에서, 그런 것을 방해하고 사람들을 돈만 쓰는 바보로 만들게 하는 마약류 약품은 최대한 유통을 막으려고 하고 있었다.

하여튼 간에, 마약 성냥을 파는 내용인 유리의 메르헨은.

최종적으로 팔아먹던 성냥팔이 소녀조차 중독되어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는 것으로 끝이 난다.

저 덱으로 승리하는 조건도 그것에 가깝고.

"아마 마지막 메르헨 달성 조건이, 본인과 상대 모두가 마약에 중독되는 거였으니까."

다만 마약에 중독되면 플레이가 정상적으로 불가능해지므로.

상대와 자신이 마약에 중독되는 타이밍을 잘 맞춰야 한다는 부분이 어려웠다.

자신만 마약에 중독되면 그대로 처맞다가 패배할 가능성이 큰 덱이니까.

"작품 내용은 저 덱에 중독되어 패배하는 것을 기쁨으로 여기는 패배 중독 바보들을 만들어서. 패배시켜 줄 테니까 내놓을 걸 내놓으라는 식으로, 암암리에 세상을 지배해 돈을 쓸어 모으는 거였지?"

"응, 정작 그 돈으로 먹여 살리려던 가족들은, 그녀를 두려워한 사람들한테 살해당하지만."

다른 절망의 이야기와 마찬가지로, 유리의 절망 이야기도 그다지 행복한 결말을 맞이하진 못했다.

절망 컨셉에서 워낙 이 나라에서 불법이거나 위험하게 여겨지는 것을 많이 이용하게 되고.

그것을 미화하는 것이 굉장히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만화가 지금 어떤 검열도 받지 않고, 어지간하면 나중에도 이 상황이 유지된다지만.

만약 그것 때문에 논란이라도 나면 좀 상황이 귀찮아지니까.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었다는 느낌은 괜찮지만, 그 선택을 해서 정말 행복하기만 한다면 개연성을 포함해서 여러모로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애초에 개인적으로도 그런 전개를 별로 좋아하지 않고.

"생각보다 잘 밀어붙이는데?"

"그러게. 나도 어느 정도는 라푼젤이 밀릴 거로 생각했는데."

라푼젤은 대회에서 절망 덱을 꺼낸 것이 이번이 처음이었고.

유리는 기존에도 절망 덱을 간간이 꺼내긴 했으니.

둘을 비교하자면 당연히 경험이 많은 유리가 강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과는 의외로 라푼젤도 유리가 비등비등하게 붙는 느낌이다.

"아, 미리 연습을 했나 보네."

"꺼내지 않고 연습만 했다고?"

"그런 것 같은데?"

결승전에 아껴두기 위한 픽이었던 건지, 아니면 이제까지 굳이 사용할 상대가 없었던 건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그녀가 평소 하던 플레이 수준으로 능숙하게 풀어내고 있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특히 어차피 마약에 절여져서 피폐해질 캐릭터들이라고 판단했는지, 빠르게 촉수를 임신시켜서 진행의 발판으로 삼는 결단이 굉장했다.

실제로 정석에 가까운 유리덱을 막아내는 방법이지.

'기본적으로, 양쪽 다 상대 캐릭터가 나오면 이득을 보기 좋은 구조야. 그래서 내는 게 조심스러워서 그게 다 템포가 손해로 바뀌는데....'

라푼젤 덱의 사용자는 그걸 최대한 손해 없이 마무리하기 위해서, 그냥 소환하고 빠르게 파기하는 식으로 게임을 진행하기로 한 거다.

그러면서 그 파기할 때 이득을 촉수 임신을 통해 보니까, 템포를 먼저 가져가면서 손해도 최소화할 수 있다.

이 정도면 대단히 머리를 잘 썼지.

"비슷하게 비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새 밀리네요."

"응, 단숨에 뒤집는 카드가 있는 덱들이 아니니까. 이런 식으로 한 번 말리기 시작하면 꽤나 뒤집기 어렵지."

그러다가 솔직히 좀 위험한 순간이 찾아왔는데.

밀리는 것에 지친 유리 덱에서, 단숨에 메르헨을 선언하고 막판 중독을 밀어붙인 거다.

이러면 상대가 방해하는 순간, 상대보다 자신이 먼저 마약에 중독되어서 사실상 패배하는데.

그 위험성을 걸고 한 배팅이 어느 정도 먹힌 거다.

"없네...."

"저것만 막으면 어떻게든 될 텐데."

"잠시만, 어?"

막을 카드가 손에 없어서, 이대로면 유리덱쪽이 다음 턴에 승리하겠다 싶었는데.

라푼젤 덱 사용자는, 이미 이것도 예측했다는 듯 메르헨을 진행했다.

이쪽은 메르헨이 더 늦긴 하지만, 이번 중독만 버텨내면 된다.

"메르헨 선언! 그리고 카드의 효과로 임신한 캐릭터의 수만큼 추가로 드로우!"

"아, 저거로 뽑을 생각이었구나."

"어, 그럼 슬슬 나올 때가 된 거 아니에요?"

"그렇긴 한데, 저걸 차단할 만한 이벤트 카드가 그다지 많진 않아서."

잠시만, 생각해보니까 다른 방법도 하나 있지 않나?

여전히 그녀의 패에는 중독을 막아낼 카드가 없었지만, 그녀는 웃음기를 지우지 않았고.

그대로 턴을 종료했다.

"뭐야, 저기서 왜 턴 종료를...."

"잠시만...!"

생각해보면 이상했다.

2턴 전부터는 슬슬 촉수를 부화시켜서 이득을 보는 것이 가능한 상황인데, 일부러 부화하지 않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그 때문에 상대는 오히려 마약 중독 캐릭터가 살아있으니까 계속 추가 이득을 보고 있었고.

그나저나 그런 묘한 상황을 조건으로 하는 카드는 딱 하나밖에 없는데?

"...임신 중독!"

"자, 상대방 턴의 시작을 조건으로! 임신 중독 발동! 코스트 지불!"

엄청나게 모여있던 패 전부가 코스트로 소모되는데.

출산하지 못하고 한 턴 이상 방치된 캐릭터 카드만 필드에 있고, 그 수가 일정 이상이므로 발동 가능한 일반 이벤트 카드다.

효과는 무려 자신의 메르헨 턴을 진행한다는 것.

이미 마지막 메르헨 조건을 만족한 상태였기에, 추가적인 턴만 필요하던 그녀에게 있어.

이 카드를 사용한다는 것은 턴 하나를 당겨서 승리한다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저걸 들고 있었어?"

조건이 워낙 까다롭고 코스트도 워낙 높아서 사용하는 것이 어렵기에.

사실상 섀도우 복싱으로 상대 플레이를 제한할 뿐인 카드라, 실질적으로는 코스트 사용으로 버리는 카드인데.

이상하게 저걸 안 버리고 들고 있다 했더니, 정말로 사용할 각을 잡은 거였다.

'예상했네.'

이렇게 급발진하는 것까지 고려해서 패에 가지고 있었던 거다.

사실상 사전에 그녀가 짜둔 듯한 틀로 경기가 흘러간 느낌.

아무리 생각해도 대단한 실력이라서 감탄이 나온다.

오히려 아까 비슷한 실력으로 게임 굴러간다고 한 내가 겜알못이었네.

"오...."

그 엄청난 실력 플레이 때문인지, 대회를 보고 있던 모두가 소리까지 지르며 박수를 보냈고.

그렇게 첫 번째 카드 대회, '발푸르니기스의 밤'은 무사히 마무리되었다.

아니지, 지금 하는 수상식까지 끝이 나야만 진짜로 끝나는 거다.

"우승자분의 경우에는, 원하시는 덱 하나를 우승자분을 모티브로 해 새로운 덱을 만들어 드립니다. 대회 특별판으로 판매 예정이고, 수익금 일부도 지급해드립니다."

"제가 모티브인 카드요...?"

"물론 허락하지 않으시면, 상금을 좀 추가해드리는 쪽으로 진행할 수도 있습니다."

"아, 아뇨! 영광이에요!"

카드 효과는 완전히 같지만, 대회 특별판으로 판매를 하는 형태다.

대형 대회를 할 때마다 이런 식으로 기념을 해주면, 대회에 참가할 의의도 올라가고.

추가적인 판매를 통해서 돈도 벌 수 있으니까.

"어떤 덱을 원하세요?"

"아, 아무래도 라푼젤이죠. 제가 가장 사랑하는 덱이 라푼젤인걸요."

"하긴, 라푼젤로 우승하셨는데 다른 덱을 컨셉으로 사용하시는 것도 이상하겠죠."

"네, 네!"

"그럼 라푼젤에, 희망의 이야기...."

"아뇨!"

"네?"

"희망 말고 절망으로 해주세요!"

...지금 이 인간 제정신으로 하는 소리인가?

물론 내가 그런 미친 컨셉의 카드 게임을 만들긴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자기가 모티브가 되는 카드 덱인데.

그 덱을 절망덱으로 고른다니, 보통 또라이가 아닌 것 같았다.

"혹시, 결승전을 이긴 의미가 깊은 덱이라서 그러시는 건가요?"

"아뇨! 제가 절망쪽을 더 좋아해서요!"

"네?"

"아, 혹시 저를 모티브로 하면 알몸 사진 같은 거라도 필요할까요? 작가님한테 보내드리는 샘플이라던가? 뭐라도 저는 할 수 있는데!"

"아, 아니요. 어디까지나 대회 기준으로 모티브만...."

"하, 그 메르헨이 나로? 하으...♡"

뭘 상상하고 있는지, 살짝 애틋한 신음까지 흘리는 우승자를 보며.

나는 왠지 여러모로 정신이 아득해지는 기분이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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