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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80화 (180/229)

〈 180화 〉 36권 ­ 절대로 섹스하지 않을거야(4)

* * *

'어떻게 된 거지?'

최근 칼리 선배의 행동은 내 예상과는 굉장히 다르게 움직였다.

코코아를 범하기 위해, 억지로 나와 떨어트리는 행동을 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나에게 위험한 행동을 하기 위한 위험한 작전을 수행하지도 않았다.

일단 선배가 내가 코코아를 지키는 것을 굳이 막지 않고, 알아서 하라는 듯 내버려 두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왜냐면 코코아는 이미 선배의 손에 타락해, 선배 없이는 살 수 없는 변태가 되어버렸으니까.

굳이 급하게 하지 않아도, 언제든 원하는 걸 할 수 있다는 거겠지.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나에 대해서 관대한 것은 이상했다.

서큐버스 그림까지 그리면서 나를 강간할 준비를 마친 사람이.

전혀 그럴듯한 계획으로 밀어붙여 오는 경우가 없었기 때문이다.

가끔 야한 농담을 하면서 다가오긴 하지만, 내가 하지 말라고 하면 바로 멈추고.

만화였으면 이쯤에서 몇번이고 섹스를 했을 법한 상황이 와도, 전혀 상황이 진전하질 않았다.

예전에는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해서 문제였는데, 이제는 반쯤 준비를 마쳐도 오지 않아서 내가 답답....

아니, 나는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정신 차리자 아모리. 그래, 결국 이렇게 나를 가지고 노는 거겠지."

어쩌면 선배가 말했던, 코코아를 강간한 것이 아니라 코코아가 해달라고 해서 섹스를 했다는 건 사실일지도 모른다.

지금 내가 당하는 것처럼 계속 애를 태워, 섹스하고 싶도록 유도하고.

자신에게 굴복하게 해서 완전히 절정 타락을 시켜버린 거겠지.

내 예상보다 더 끔찍한 강적이었다.

'이대로면, 사실상 선배의 계획에 말려드는 셈이야.'

가장 좋은 건 코코아를 데리고 동아리를 나서는 건데.

코코아가 워낙 선배에 푹 빠져 있어서, 거기까지는 절대 설득하지 못할 거다.

나 혼자 도망친다는 선택지를 고를 수도 없으니, 그냥 이대로 선배의 계획에 걸려드는 수밖에 없는 셈인데....

"아니야. 결국 선배는 내가 겨우 그런 유혹에 빠진다고 생각해서 이런 계획을 세운 거잖아?"

그럼 내가 유혹에 넘어가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다.

지금까지 잘 버텨오는 중이고, 앞으로도 똑같이 하면 된다.

나는 절대로 선배에게 패배하지 않는....

"아모리?"

"네, 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얼굴도 빨갛고, 몸도 부르르 떨고.... 혹시 야한 생각?"

"아, 아, 아니거든요."

"그럼 내가 하는 말을 들어줄래? 너 혼자 답을 안 해서 회의가 진행이 안 되잖아."

"아, 회의 중이었죠. 집중할게요. 죄송합니다."

그런데 대체 무슨 내용으로 회의를 하는 거였더라.

거의 초반부부터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어서 전혀 듣질 못했다.

내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하자, 칼리 선배는 한숨을 쉬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내일 나오는 신작 때문에, 그걸 안내하고 판매할 사람을 정해야 하거든."

"...동아리에서 내는 신작이에요?"

"무슨 소리야. 유명 작품의 경우에는 우리 학교에서도 판매를 동시에 진행하잖아? 그걸 우리 동아리에서 하는 거야."

기본적으로 업무는 학교 쪽에서 고용한 이들이 하지만, 그걸 총괄할 인원 한 명 정도는 동아리에서 차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다만 지금 전체적으로 2학년과 3학년들이 시간이 없는 상황이기에, 1학년인 우리에게 맡긴다는 건데....

"코코아는 한다고 했는데, 어차피 요즘 코코아랑 항상 붙어 다니잖아? 하는 김에 너도 코코아를 도와서 같이 할 수 있냐는 질문이었어."

"아, 그런 거군요. 그럼 도와야죠."

"그래, 그럼 이거 받아."

"네?"

잘 포장된 듯한 상자 두 개를 꺼낸 칼리 선배가, 코코아와 나에게 하나씩 건네주고는 하품을 했다.

대체 뭐길래 이런 걸 주는 건지 영문을 몰라서 선배를 쳐다봤더니.

천천히 이 물건의 정체를 설명했다.

"원래라면 당일에 너희도 즐겨야 할 신작인데, 그게 안 되니까 미리 주는 거야. 오늘 읽고 내일은 일에 집중해. 아, 팔면서 내용에 대해서 말해는 건 금지다? 그랬다간 진짜 전시관 쪽이랑 척질 수도 있어."

"아하.... 아, 어떤 화가의 신작인데요?"

"시우."

"네?"

나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것은 아닌가 싶어서 귀를 의심했다.

시우 화가라면, 당장 내 눈앞에 있는 칼리 선배의 화가명이잖아.

그렇다면 그 신작을 칼리 선배가 그리고 있었다는 건데, 전혀 그런 낌세는 없지 않았나?

'아니, 잠깐만....'

생각해보면 이상할 정도로 내가 동아리 방에 없게 되는 상황이 많이 벌어졌었다.

나는 코코아를 지킨다고 데리고 동아리 방에서 나가는 행동을 자주 했는데.

선배는 그 행위에 대해서 전혀 막으려고 하지 않았었지.

나는 그게 굳이 시간이 급하지 않아서, 우리가 알아서 몸을 바칠 때까지 기다린다고 생각했는데.

애초부터 목표가 그게 아니었다면?

원래부터 선배가 '시우'라는 사실을 모르는 나를 빼고, 그사이에 작업을 하기 위해서라면?

'그럼, 그때 내가 봤던 그림이....'

그림에 나오는 서큐버스가 나를 형상화했던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신작에 나오는 인물이었다면?

이상할 정도로 잘 맞아떨어지는 상황들이, 이제까지 내가 하고 있던 주장을 부숴버리려고 한다.

그럼, 사실 선배는 내 예상처럼 나쁜 짓을 하려고 한 게 아니라 그냥 작품 활동에 집중하고 있던 거야?

"......."

"아모리?"

"그럴 리, 없어. 이것도 다 속임수일 거야...."

"아모리?"

"네!?"

"뭘 그렇게 당황해. 나 팔 아프다. 슬슬 받아라."

"아, 넵."

"내일 잘 부탁해. 코코아가 잘 아니까, 옆에서 거들면서 일을 배운다는 느낌이면 될 거야."

사실 선배는 내가 알아차렸다는 것도 알고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엿듣고 있다는 것까지 알고 다 일부러 말했던 거지.

그리고 지금 상황도 의도한 것일 터다.

'그럼 결국 그 의도가 담긴 건, 결국 이 만화라는 거겠지....'

나와 코코아가 이 만화를 읽는 것으로, 자신에게 완전히 함락된다고 생각한 게 아닐까?

물론 그런 것이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말이 안 되지만.

선배가 당장 그림 하나로 얼마나 많은 영향력을 일으켰는지 생각하면, 충분히 가능할 수도 있었다.

"아모리, 너 진짜 괜찮아?"

"응. 괜찮으니까 걱정하지 마."

기숙사에 돌아와서도 한참을 박스만 바라보며 고민에 빠졌다.

코코아는 벌써 상자를 열고 작품을 보고 있었지만, 나에게는 아직 마음의 준비가 필요했다.

이걸 보고도 절대로 선배에게 함락되지 않을 준비 말이다.

"후우, 그래. 이제까지 선배 작품으로 단련되어 있으니까 괜찮을 거야. 경계하지 않고 보는 것도 아니고, 경계하면서 보면 괜찮겠지."

사실 무서우면 그냥 보지 않으면 되겠지만.

당장 시우 화가의 신작을 보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다.

결국은 보게 될 텐데, 그냥 지금 의지가 단단한 편일 때 보는 게 낫지 않을까?

"후, 그래. 내가 나를 믿지 못하면 누가 믿겠어."

일순간 그렇게 타락해서 강간당하는 상상을 해서 아랫도리가 젖었지만.

그 저주와도 같은 상상을 이리저리 흔들어 지워내며 마음을 다잡았다.

나는 겨우 야한 것에 휘둘리지 않는 긍지 높은 서큐버스, 절대로 패배할 리 없다.

"어라?"

생각해보니까 평범하게 책이 아니라, 상자의 형태라는 점에서 의심했어야 했는데.

상자 안의 내용물은 그냥 평범하게 만화책 하나만 들어있는 것이 아니었다.

만화책이 하나가 아니라 두 권이 따로 들어있고, 각기 뭔가 튼튼해 보이는 포장으로 봉인되어 있었다.

"이렇게 뜯으면 되는 건가?"

무슨 오래 보관하는 음식처럼 튼튼하게 봉인되어 있었고.

그것을 뜯기 전에 과연 어떤 책부터 읽을지 고민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위쪽에 올라가 있는 것이 먼저 읽을 책일 텐데....

"맞아. 시우 화가라면, 확실히 그런 세세한 것까지 신경 쓰는 성격이지."

위쪽에 있던 책은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라는 제목의 흑백 표지를 가진 작품이었고.

아래쪽에 있던 책은 '절대로 섹스하지 않을거야'라는 제목의 컬러 표지를 하고 있었다.

왜 굳이 한쪽은 흑백이고, 한쪽은 컬러를 차용했는지는 잘 모르겠네.

"그나저나, 그 서큐버스 캐릭터는 역시 여기 나오는 주인공이구나."

여자 주인공인 릴리스는, 굉장히 귀여운 서큐버스였다.

그리고 만화책의 내용은 그 릴리스가 애덤이라는 남자와 만나서 사랑을 한다는 평온한 이야기였고.

나는 야한 장면조차 한 번 나오지 않는 달콤한 사랑 이야기에 조금 당황했지만, 워낙 작품이 재밌었던 만큼 어느새 작품에 빠져들어 읽고 있었다.

"...이상하네."

책 한 권의 내용이 모조리 둘의 사랑 이야기로 가득 차 있었다.

종족이 서큐버스랑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만 제외하면, 오히려 시우 화가님이 아니라고 느껴질 정도로 평범한 작품이다.

물론 그렇다고 재미가 없는 건 아니지만, 이 정도로 평범하게 사랑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 아닌가?

'아, 아니구나.'

야한 이야기가 배제되어있다는 것만 제외한다면, 나는 분명히 이런 분위기를 느낀 적이 있었다.

바로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라는 작품.

달콤한 분위기로 잔뜩 연애한다는 점이, 그때와 이상할 정도로 닮아 있었다.

"그래 맞아. 딱 그런 느낌인데...."

최근 들어 그렇게 가벼운 이야기 전개는 잘 없었던 만큼, 오히려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물론 이게 작품의 끝은 아니었으니, 다음 내용도 읽어봐야지 알겠지만.

일단 지금까지 느껴지는 바는 그러했다.

"...사실상 여기 뭐가 있는지가 중요한 거니까."

솔직히 이미 반쯤은 선배에 대한 의심을 거둔 상태였지만.

그래도 굳이 작품의 제목에 섹스가 들어간다는 점에서 마음이 걸렸고.

나는 조심스레 다음 권을 펼쳤다.

아까 그 책이 서큐버스인 릴리스의 시점에서 진행된 것과 달리, 이 책은 인간인 애덤의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분명히 아까의 책처럼 데이트도 하고 있고, 여전히 진한 사랑을 나누는 뒷이야기였지만.

왠지 모르게 초점이 어긋난 것 같은 장면이 반복되며, 이상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아까까지 문제없던 상황을 직접 봤던 만큼, 그 차이가 더 이질적으로 느껴진다.

애덤이 이상한 것은 아니고, 오히려 이상한 것은 릴리스였는데.

본래라면 누구보다 기념일을 잘 챙기던 릴리스가 기념일을 착각하거나, 갑자기 넋 놓는 일이 많아졌으며.

이상할 정도로 자주 화장실에 가거나, 화들짝 놀라는 모습을 보였다.

"자, 잠깐만 이거 설마...."

그리고 결국 릴리스가 애덤의 눈앞에서 쓰러지는 장면에 도달하고 나서야.

나는 야한 것이 아닌, 다른 의미로 악독한 칼리 선배의 매운맛을 느끼며 입술을 꽉 깨물었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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