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81화 (181/229)

〈 181화 〉 36권 ­ 절대로 섹스하지 않을거야(5)

* * *

여기서 정액 결핍증을 활용하다니. 역시 선배는 대단하다.

대체 서큐버스의 생태에 대해서 어디까지 조사를 했으면, 그렇게 자세한 내용을 알고 있는 걸까.

당장 '오크와의 정사를 꿈꾸는 엘프는 오늘도 답답하다'만 하더라도, 오르카 선배의 가정의 상황과 굉장히 유사하다고 들었으니.

칼리 선배의 이런 디테일은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물론 아직 만화에서 정확한 병명이 나온 것은 아니지만.

굳이 섹스를 숨기지 않는 시우 화가의 스타일과 1권에서 섹스 장면이 한 번도 나오지 않은 것을 보면 뻔하지.

여기서는 릴리스의 병이 정액 결핍증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했다.

"지금이야 그런 경향이 줄었지만, 예전에는 혈통도 이야기가 많았다고 했지...."

서큐버스의 경우, 더 고위 서큐버스의 혈통의 경우에는 강한 마력 때문에 정액 결핍증을 달고 살았다고 들었다.

그것 때문에 개체 수가 줄어서 요즘은 거의 보이지 않지만.

생각해보면 조금씩 릴리스의 혈통이 고위 서큐버스의 것이라는 암시는 조금씩 던져왔었네.

"릴리스...."

그리고 정말 선배가 악독한 것은, 저 병에 고통받는 릴리스와 애덤의 이야기를 이제야 시작했다는 점이다.

한 권의 이야기를 진행하며, 둘의 행복한 모습을 잔뜩 보여줘 놓고.

인제 와서 끔찍한 현실을 들이밀어, 고통을 후벼파다니.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지려는 것을, 왠지 지는 것 같아서 입술을 꽉 물며 참았다.

차라리 1권에서 릴리스가 고통스러워하는 파트도 넣어줬다면 상황이라도 잘 알 텐데.

선배는 이 정보의 불균형을 위해서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 때문인지 그 시간대를 완전히 생략해놨다.

1권을 다시 살피며 차이를 확인하자, 거의 1년이라는 시간의 공백이 있었고.

그 공백에 있었던 릴리스의 고통은 나조차 알 방도가 없는 상황이었다.

"휴, 깨어나긴 하네."

그래도 다행이었던 건, 쓰러진 릴리스가 생각보다 금방 깨어났다는 점이다.

이 부분에서는 그녀를 간호하던 애덤과 나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이제까지 릴리스가 이상했던 건, 아무래도 정액 결핍증의 증세를 숨기기 위해서였겠지?

「아하하, 아마 피곤했나 봐. 자, 쌩쌩하잖아? 너무 걱정하지 말라니까.」

「절대로 무리하지 마. 우리 일정도 최대한 체력에 영향이 가지 않는 걸로 할 테니까.」

「걱정 끼쳐서 미안해.」

물론 애덤이 서큐버스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잘 알 리가 없었기에, 결국 이 사건은 이 정도로 일단락이 났다.

릴리스는 굳이 자신과 서큐버스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를 애덤에게 하지 않았고.

애덤은 그런 종족에 대한 차이점에 대해서 큰 상관을 하지 않는 성격에, 말해주지 않으면 굳이 신경을 쓰지 않는 시원한 성격이었으니.

자연스레 그런 사실을 숨기는 쪽으로 발전했을 터.

"후우...."

만화를 읽으면 읽을수록 답답하다는 감정이 솟아오른다.

둘의 사랑이 얼마나 깊은지, 얼마나 아름다운지를 알 수 있다 보니.

서로 어긋나버린 마음의 방향이, 너무나 애틋하게 다가온다고 할까.

솔직히 말해서 릴리스가 이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야한 짓을 해서 정액을 몸에 받아들인다는 단순한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릴리스가 사귀는 상대가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상대가 존재하는 만큼 어려운 일이 아니지.

다만 진심으로 애덤을 사랑하는 릴리스에게는, 그게 굉장히 어려운 일이 되는데.

그것은 그녀가 고위 서큐버스의 피를 타고났다는 부분 때문이다.

솔직히 선배가 이런 정보까지 조사했다는 것이 놀라운데.

몸에 마력이 강해서 생명에 영향을 줄 정도로 심한 정액 결핍증을 일으킬 정도라면.

그 마력에 의해서 생기는 너무 강한 생기 흡수로 인해, 상대 배우자가 사망에 이를 정도로 위험하기 때문이다.

애초에 기존 서큐버스들은 생기를 착취해서 자신의 힘으로 하는 마족이지, 그 취하는 대상을 먹이가 아니라 사랑의 대상으로 택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기에 그 대상이 사랑의 대상으로 바뀐 시점에서, 일부 심한 정액 결핍증을 겪는 서큐버스는 사랑하는 사람을 찾더라도 저렇게 고통받으며 죽어가야 하는 운명인 셈이지.

그나마 최근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정액을 입으로 마시는 것으로, 어느 정도 병을 완화할 수 있는 마법이 탄생했지만....

애초에 작품에 나오는 릴리스는 마력 결핍증의 증상으로 마법을 사용할 수 없어서 해당하지 않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굉장히 최근에나 개발된 마법이라, 반영되기 이전의 이야기일 가능성이 컸다.

그러니 지금 상황은 굉장히 부정적이라고 볼 수밖에 없었다.

「릴리스, 이제 말해줄 때도 되지 않았어? 너 정말 이상해.」

「벼, 별거 아니라니까.」

「아픈 것도 아픈 거고, 그거 말고도 계속 뭔가 나한테 숨기고 있지 않아? 혹시 기절하는 거 말고도 다른 증세가 있어?」

확실히 애덤의 말대로 다른 증세가 있는 것 같긴 했다.

처음에는 고통 때문에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겼다고만 생각했는데, 그 이외의 묘한 점들이 계속 눈에 들어온다.

특히 최근에 날짜나 시간을 묻는 일이 아주 많고, 이미 갔던 데이트 장소를 연속으로 선택하는 등의 이상행동을 반복했다.

"잠시만, 이거 은근히 공통점이 있는데...."

그리고 그 공통점들을 대충 정리하던 나는, 이 모든 악몽 같은 상황을 이렇게 밀어붙이는 선배의 악독함에 무서움까지 느꼈다.

실제로 내가 알아차린 직후, 책에서도 모든 것을 설명해줄 요량이었는지.

천천히 그녀의 비밀을 찾아가기 시작한다.

이상할 정도로 최근 일들을 빼곡하게 기록해둔 일기장과 그 일기장이 너덜너덜할 정도로 자주 만진 흔적.

평소보다 확실하게 오늘을 표시해둔 달력과 체크를 잊지 말라는 메모.

소지품 속에 들어있는 자기 자신에게 써둔 자그마한 쪽지 등.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

릴리스는 정액 결핍증의 증상으로 몸이 망가지고 있었고.

그 몸이 망가지는 것은 일반적인 방향과는 조금 달랐다.

하필이면 그녀가 망가지는 곳은 다름이 아닌 머리.

두 사람의 행복한 추억을 기억하는, 너무나도 소중한 곳이었다.

이제야 앞서 읽었던 책의 제목이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였는지를 깨닫게 된다.

소중한 애덤과의 기억을 잃어버리고 있는 릴리스는, 자신의 기억이 증발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했고.

그 사랑스러운 기억 하나하나를 메모하며, 절대로 잊지 않고 평범한 생활을 하려 했던 셈이다.

「애, 애덤? 여긴 어디야?」

「릴리스....」

「미안, 내가 너무 많이 마셨나?」

「혹시, 지금 몇 년도인지 알아?」

그러던 도중 쓰러졌던 릴리스가 깨어나고, 둘의 사랑스러운 신혼집조차 알아보지 못하는 모습에.

애덤은 입술을 꽉 깨물며 그런 질문을 했고.

당연하다는 듯이 이사 이전의 날짜를 내뱉는 릴리스를 힘껏 껴안고 오열했다.

아까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에서 보던 밝은 릴리스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지만.

정작 작품이 그려내는 분위기는 그 모습과 굉장히 대비되는 어두움이었다.

그렇게 그려진 아려오는 듯한 슬픔이, 둘의 이야기를 함께하는 나에게 전달됐다.

"이건, 정말...."

물론 릴리스는 자신의 병명이나 해결법에 대해서는 일기장에도 적어놓지 않았다.

결국 그녀는 애덤에게 이렇게 들키게 될 상황을 염려했을 것이고.

그녀가 죽게 될지언정, 진실을 알게 된 애덤이 자신과 '섹스'를 하게 될 상황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였다.

다행히 다량의 기억을 통째로 잊는 것은 일시적인 현상에 가까운지, 시간이 지나자 릴리스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지만.

그건 오히려 애덤에게는 악재에 가까운 일이었다.

당연히 상황을 알고 있는 릴리스는, 절대로 애덤이 자신의 병명을 알 수 없도록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아, 아아...."

서로 어긋나고, 계속 어긋나는 답답한 상황이지만.

그 어긋남에 담겨있는 서로를 향한 사랑과 애틋한 마음이 너무나 아름다워서.

대체 이런 아름다운 작품을 그리고 있던 선배를, 나는 대체 무슨 착각으로 그런 변태 취급했던 건지 모르겠다며 자책을 했다.

아니, 생각해보면 차라리 그런 변태가 더 나은 취급일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선배는 이렇게까지 잔혹한 사람일 수 있을까.

지금 나야 내 종족 때문에 릴리스의 병명을 확신하고 있지만, 일반적인 인간이 이 작품을 본다면?

지금 애덤이 그려내고 있는 진실을 찾기 위한 여정....

그 끝에는 해피엔딩이 그려질 거라고 다들 믿으면서 이야기를 보고 있을 터인데.

그곳에 담긴 진실이, 두 사람의 사랑을 지키기 위한 릴리스의 희생이라면.

그렇게 잔혹한 진실이 달리 또 있겠는가.

「왜, 기억나지 않는 거야....」

「릴리스....」

릴리스는 절대로 자신의 병명이나, 해결법에 대해서는 애덤에게 알리려 하지 않았지만.

이제까지 혼자서 아픔을 견뎌온 것에 대해서는 꽤나 많이 지쳐있었고.

애덤이 그녀가 기억을 잃는 것을 알게 된 후로는 가끔 이렇게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특히 그녀가 가장 힘들어한 것은, 메모에도 적혀있고 흐릿하게 느껴지는 감각으로도 알 수 있는 행복한 추억이.

이제는 흐릿하게 그려질 뿐, 제대로 떠오르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차라리 아예 존재 자체를 몰랐으면 슬프지도 않았을 것을, 실제로도 보일 듯 말듯 그려둔 과거의 사건들을 짚으며 힘겨워하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팠다.

"분명,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에서 나왔던 에피소드인 것 같은데."

조금 전에 봤던 만화인 만큼, 지금 릴리스가 그리워하는 사라진 기억이 무엇인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혹시 저기 흐릿하게만 보이는 그림의 원본을 알 수 있으려나 해서, 나는 아까의 만화책을 다시 꺼내 들었다.

분명히 그 장면이....

"에...?"

그리고 나는 그 만화책을 다시 손에 쥐자마자, 확연하게 느껴지는 이질감에 사고가 반쯤 정지하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내가 즐겁게 읽었던 만화책이, 지금은 굉장히 이질적인 존재로 느껴진다.

표지는 물론이고, 만화책을 열어서 어떤 페이지를 열어봐도.

조금 전까지만 해도 있었던 두 사람의 사랑 이야기는 온데간데없고.

그저 새하얀 백지만이 내 시야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마치, 그곳에는 원래 아무것도 없었다는 듯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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