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2화 〉 37권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1)
* * *
그 비상식적인 상황을 목도한 순간, 나는 깜짝 놀라서 기숙사 내부를 둘러보았다.
혹시 코코아가 장난을 친 건가 싶어서 그쪽을 확인했지만, 나와 비슷한 상황인지 당황하고 있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애초에 어떠한 마력의 흐름도 느끼지 못했는데, 이런 일이 가능해?
"이게 무슨...."
분명히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쩡했던 책이, 왜 이렇게 변했단 말인가.
릴리스가 기억을 잃어서, 만화책에 있던 그녀의 기억이 사라졌다고?
마법이라면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마법이 발동할 방법이 없었잖아.
"아...."
일단 이런 상황을 준비한 것이 선배라는 점에서, 가능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렇게 이 일은 넘어간다고 해서, 만화의 내용에 다시 집중하기도 쉽지 않았다.
릴리스가 기억하지 못하는 그 기억이 무엇이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 굳이 만화를 읽는 것을 멈춘 거였는데.
정작 그 기억은 이제 나도 알 수 없는 것이 되어버렸으니까.
물론 내 쪽이 그녀보다는 더 자세하게 기억하고 있겠지만, 그런데도 이렇게 답답한 기분이 든다니.
지금 릴리스의 허탈하고 고통스러운 기분이 조금이나마 이해가 되어서, 굉장히 이상한 느낌이었다.
마치 홀린 것처럼, 아무것도 없는 페이지를 넘기며 하나라도 남은 것이 있기를 기도하는....
미련이 가득 찬 내가 되어 있었다.
「그날은, 처음으로 절벽에서 서로 불만이었던 점을 외쳤던 날이야.」
「불만...?」
애덤은 그런 우리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울컥한 표정으로 설명해줬지만.
분명히 책의 내용을 기억하고 있어야 하는 나도,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다.
책뿐만 아니라 내 머릿속에 있던 내용까지 지워버린 기분이라서 굉장히 무서웠다.
소중한 릴리스와 애덤의 행복한 시간이, 절대로 잊지 않아야 할 추억이.
어느새 애덤 혼자서 알고 있고, 우리는 그 이야기에 제대로 따라가지 못한다.
그 무서운 간극은, 릴리스와 나를 굉장히 지치게 하고 있었다.
"후우...."
하지만 그런데도 릴리스는 애덤이 병명을 알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것만큼은 멈추지 않았다.
그러니 그만큼 이것저것 신경 쓸 것이 많아진 릴리스는 스트레스가 더 쌓였고, 그건 오히려 병을 악화시키기 시작했다.
끊임없는 두통과 간헐적인 기억 상실에, 과거의 추억뿐만 아니라 현재조차 제대로 즐길 수 없게 되어버렸다.
즐겁게 이야기하던 도중에도, 방금까지 하던 이야기를 잊어버려 대화가 끊어지고.
했던 말을 까먹고 반복하는 바람에, 그런 그녀를 보고 울음을 터트린 애덤의 포옹에 당황한다.
아마 릴리스의 옆에 항상 애덤이 있어 주지 않았다면, 그녀는 진작에 무너졌을지도 몰랐다.
「릴리스....」
「어?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사실상 애덤에게 진실을 들키는 것은 시간문제이긴 했다.
아무리 그녀가 애덤에게 진실을 숨기기로 다짐한 것이 먼 과거라, 최근 기억을 잊더라도 숨기려 했다지만.
그렇다고 해도 정상적인 상태를 벗어난 만큼 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애덤이 기억을 잃은 그녀를 속여가며, 다른 서큐버스를 만나서 설명을 듣는 것까지 막을 수는 없었으니까.
물론 애덤이 알아차릴 가능성을 모두 막아야 한다고 생각했다면, 막을 수 있었겠지만.
아직 증상이 시작하기 전의 기억만 남은 상태일 때는, 그렇게까지 전부 조심하지는 않았으니까.
「정말, 이야?」
「애덤, 그게....」
「왜 말하지 않았어? 알고 있었던 거잖아. 전부 알고 있었으면서 왜 나한테는...!」
「애덤....」
애덤이 모든 진실을 깨닫고 가장 먼저 느낀 감정은 괴로움이었다.
결국 그녀가 이런 선택을 한 것은,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었으니까.
더 잘해주지 못하는 것이 죄스러웠던 그의 마음은, 마치 자신이 그녀를 이렇게 만든 것 같아 더 죄스러워졌다.
그나마 그 절망 속에서 한 줄기 희망을 본 것은, 그 끔찍한 병에는 단 하나의 해결법이 있다는 점이었고.
릴리스의 예상처럼 애덤은 그 해결법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바로 애덤이 이제까지 생각도 하지 않던 섹스를 릴리스에게 요구하기 시작한 것인데....
'당연히 릴리스가 하겠다고 할 리가 없지.'
릴리스가 아무것도 모른다면 모르겠지만, 애덤보다도 훨씬 더 정액 결핍증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것이 릴리스다.
만약 둘이 섹스를 해서 릴리스에게 정액이 보급된다면, 굉장히 높은 확률로 마력이 폭주한 릴리스에게 기력을 빨려 애덤이 죽을 텐데.
자신이 죽으면 죽었지, 애덤을 죽게 내버려 둘 릴리스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다른 남자가 릴리스와 관계를 맺게 한다는 건, 애덤이나 릴리스가 용납하기 힘들었고.
애초에 그게 아니더라도 관계없는 사람을 희생한다는 것 자체가 그들에겐 선택할 수 없는 선택지였다.
그럼 결국 남는 것은 애덤 본인이 희생하는 것뿐이니, 서로 희생하겠다는 가슴 아픈 결과만 남을 뿐이었다.
'이 부분이 사실상 가장 큰 문제야.'
예상하던 상황인데도, 절절하게 두 사람의 사랑이 느껴져서 가슴이 아파졌다.
자신이 죽어도 상관이 없으니, 상대라도 살아줬으면 하는 마음을....
누가 정답이라며 손쉽게 편을 들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원래라면 이렇게 작품의 시선의 메인이 되는 애덤의 기분이 메인이 되는 것이 정상이지만.
당장 애덤과의 행복하고 아름다운 기억을 잃어버리면서까지, 애덤을 살리려는 릴리스의 기분도 이해하게 되어버리게 하는 작품이기에.
더 어느 한쪽의 손을 들어주기는 어려운 상황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그래서 말하지 않았던 거라고!」
「그럼 어떻게 해! 그럼 나는? 나는 네가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만 있으라고!?」
사랑하기에, 자신의 자그마한 생명보다는 상대의 커다란 생명을 지키고 싶기에.
그렇기에 둘은 언성을 높이고 자신의 주장을 밀어 붙여가며 싸웠다.
다만 몇 번이고 이루어지는 이런 싸움은, 싸우고 있던 것조차 잊어버리는 릴리스의 해맑은 미소에 멈추고.
감정을 주체하지 못한 애덤이 그녀를 껴안고 우는 결말로 수렴했다.
"오랜만에 느끼네. 이 답답한 느낌."
엄청나게 오랜만인 것은 아니지만, 칼리 선배의 작품에서 자주 느끼던 감각이다.
무거운 분위기에 짓눌려서 다음 페이지를 여는 것이 무섭지만, 지금 이대로 멈추는 것조차 무서워서 페이지를 넘길 수밖에 없는 감각.
굉장히 무게감이 느껴지는 페이지를 하나씩 넘기자, 결국 일이 터지는 것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애, 애덤? 그러지 마. 응?」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되어버린 애덤은 릴리스를 설득하는 것을 포기하고 만다.
그렇다고 릴리스를 구하는 것을 포기한 것은 아니고, 허락을 구하지 않기로 결론을 내린 것이었다.
즉, 간단히 말해서 애덤은 릴리스를 강간하기로 마음먹었다.
「꺄악!?」
「미안해 릴리스. 나를 영원히 용서하지 마.」
「안돼, 이건 아니야. 제발, 그러지 마!」
평소라면 이런 음탕하고 야한 상황은 너무하지 않냐고 불만을 터트렸을 나였지만.
당장이라도 애덤이 릴리스를 덮칠 것 같은 상황에도, 그런 감각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애덤이 목숨을 걸고 릴리스를 강간하려는 모습은, 경건해 보이기까지 했다.
물론 선배의 그림은 그런 상황은 상관없다는 듯, 미려한 릴리스의 나체를 완벽하게 그려냈고.
찢어진 옷가지 일부만 덮인 릴리스가 눈물을 글썽거리는 장면 자체는 굉장히 야했지만.
그 안에 담겨있는 애덤에 대한 걱정과 애정이, 그 장면의 야함을 오히려 먹어 치우고 있었다.
「그만해...!」
짜악!
당장이라도 애덤에게 덮쳐질 상황이었던 릴리스는 애덤의 뺨을 강하게 쏘아붙였고.
정신이 든 애덤은, 자신의 몸에 깔려서 눈물을 글썽거리는 릴리스를 보고 움직임이 멈췄다.
그렇게 애덤의 강간이 멈춰지자마자, 릴리스는 그를 밀쳐내고는 다른 방으로 도망쳤다.
「릴리스, 나는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누구보다 서로를 사랑하고 아끼는 예쁜 커플이었던 두 사람이었는데.
어느새 상대의 의견을 꺾고, 자신의 의견을 밀어붙여야만 하는....
만나기만 하면 싸워야 하는 상대가 되어버렸다.
심지어, 억지로 자신의 선택을 밀어붙이려다가 상대를 울리기까지 했으니....
「역시 사과해야겠지?」
그라고 해서, 정말로 그녀의 의견 따위는 무시하고 범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다.
계속해서 평행선을 걷는 의견과 점점 심해지는 릴리스의 상태로 아주 불안해졌고.
쌓여있던 불안감에 결국은 폭주하고 말았다.
어느 정도 감정을 추스른 애덤은, 릴리스가 좋아하는 꽃인 유선화를 사다가 선물로 준비했다.
작게나마 이벤트를 열어서, 사과하고 그녀의 기분을 풀어줄 생각이었다.
물론 릴리스는 그런 것보다는 애덤이 포기해주는 걸 바랄 테지만, 그에겐 그럴 생각이 없었으니 이런 사과가 나름 최선이었으리라.
"어...?"
그런데 애덤이 멋쩍어하면서 내민 꽃을 받아든 릴리스의 표정이 조금 이상했다.
여전히 화를 내는 것도 아니고, 갑작스러운 선물에 기뻐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엄청나게 혼란스러워하는 것에 가까운 표정이었다.
「어, 어라? 왜 그래? 어디 안 좋아?」
「...죄, 죄송한데요. 혹시 사람을 착각하신 건 아니죠?」
「뭐?」
사실 그 표정에서부터 강력한 불안감이 몰려오는 바람에 예상할 수 있긴 했지만.
그래도 당장 그것이 현실이 되니, 순간적으로 현기증이 올라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정말 끝까지 너무한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다.
「그, 그러니까.... 혹시 누구시죠? 여기는 대체 어디구요?」
「아, 아아....」
「저기....」
「아아아아아아악!」
릴리스는 자신이 가장 두려워하는 상황 하나를 일기장에서 자주 언급하고는 했다.
이렇게 계속 자신의 기억이 사라진다면, 결국은 '애덤과 만났던 기억 전부를 잃어버리는 것이 아닐까?'하고.
그리고 그녀가 그토록 무서워하던 그 최악의 상황은, 지금 현실이 되어 애덤의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