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5화 〉 37권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4)
* * *
"서, 선배?"
싱긋 웃으면서 그런 말을 내뱉는 아모리가, 이상할 정도로 아름답게 빛이 나서 눈이 부셨다.
사실 '시우 화가'를 동경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당장 마법 학부로 뛰어가서 물어보면 대부분 학생이 동경한다는 답변을 내놓겠지.
"우, 울어요!?"
"모, 모르겠다. 그냥, 기분이 조금 이상해서."
그런데 그냥 이제까지 계속 실감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다.
본래라면 만화가가 되겠다는 큰 관심이 없던 것이 아모리였을 텐데.
그런 그녀의 꿈이 내 만화로 만화가로 바뀌고, 그 과정을 내 눈앞에서 바라보았기에.
비로소 실감이 나서, 이제야 이런 기분을 느끼는 걸까?
"아모리, 나는 내가 대단한 만화가라고 생각하지 않아."
"...네?"
"뭐, 최초의 만화가에 대단한 화가에 마법사라면서 치켜세워주지만.... 잘 모르겠다고 할까."
솔직히 그 모든 것은 현대에서 만들어진 만화의 개념을, 내가 익숙한 그대로 들고 왔을 뿐이다.
오히려 그 개념을 이렇게나 빨리 이해하고, 나를 따라오고 있는 이 세상의 화가들이 훨씬 천재일 거다.
그래서 자꾸만 만화 외적인 요소에 신경을 쓰고, 그런 것으로라도 신선한 무언가를 주려고 고민하며 압박감 비슷한 것에 몰려있었다.
그렇지 않으면 천재들한테 따라잡힐 것만 같았거든.
"나야말로 멍청했어."
"서, 선배!?"
나도 모르게 아모리를 와락 껴안고는,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어줬다.
예전의 아모리라면 질색하면서 도망쳤을 만한 상황인데도, 그녀는 자신의 머리를 내주며 내가 진정할 때까지 기다려줬다.
꼭 그렇게 내 작품을 기대하는 이들에게, 엄청난 경험을 시켜주고 싶어서 만화를 그리는 게 아니었다.
그래, 사실 다른 건 별로 중요한 게 아니지.
오로지 내가 그리고 싶어서 그린 만화가, 누군가를 감동하게 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한 것이었을 텐데.
어느새 나는 중압감에 짓눌리고 있었나 보다.
"미안."
"괜찮아요. 선배가 그렇게 울어버릴 줄은 몰랐지만요."
"아하하.... 아무튼, 고마운 것도 있고. 원하는 거 뭐 없어? 내가 도울 수 있는 거라면 도와줄게."
"그거라면, 혹시 이번 신간 하나만 더 구할 수 있을까요?"
"네가 판매하는 거니까, 그냥 사면 되는 거 아니야?"
"...최근에 돈이 다 바닥났더라고요."
나중에 작품 활동으로 돈이라도 벌면 좀 나아지겠지만, 지금의 아모리는 돈이 그다지 여유롭지 않은 편이었다.
아마 그녀는 식욕보다는 성욕이 우선되는 편이라, 이제까지 만화를 모을 수 있었겠지만.
그거야 천천히 모을 떄 이야기지, 당장 돈이 없으면 구할 방법이 없겠지.
"근데 왜 사려고?"
"다시 한번 보고 싶어서요."
"응?"
'절대로 잊지 않을거야'의 내용을 다시 읽고 싶은데, 그 내용이 증발해 버렸으니.
새 작품을 사서 증발하기 전에 보고 싶다는 소리였다.
...아마 이스터에그까지는 발견하지 못했던 모양이네.
"아, 그건 걱정 안 해도 괜찮아. 혹시 지금 그 책 가지고 있어?"
"네? 네...."
나는 아모리가 백지로만 보이는 책을 건네주자.
그 위에 내가 만들어둔 마법을 발동시켰고.
천천히 마법의 빛을 흡수한 책은, 마치 처음의 모습처럼 모든 그림이 그려진 상태로 되돌아와 있었다.
"어?"
"이 마법, 기억나지?"
"아...!"
이건 내가 릴리스가 기억을 되찾는 타이밍에, 그녀의 주변에 그려 넣은 이스터에그 마법이었다.
이걸 통해서 증발한 만화 부분을 복구할 수 있게 해놓았었다.
솔직히 아예 영구적으로 만화가 사라지는 건 아깝잖아.
"그나저나, 만화가 증발하는 연출은 어땠어? 꽤 괜찮은 경험이었으려나?"
"네. 확실히 릴리스의 감정에 몰입할 수 있게 해주는 요소였어요."
"괜찮았다니 다행이네."
현대에서 했다면, 바로 고소당했을 수도 있는 짓거리였지만....
하긴, 현대에서 했으면 이런 출판 만화가 아니라 게임의 형태를 빌렸을 것 같긴 하다.
만들 때는 꽤나 고생한 기능인데, 만족스러웠다니 조금 안도했다.
'현대랑 같은 원리라서 다행이었지.'
솔직히 이쪽에서는 그냥 마법이겠거니 하고 넘어가겠지만.
이건 그냥 화학적인 원리를 이용한 것에 가까웠다.
산성과 염기성인 pH농도에 따라서 색이 바뀌는 잉크와 공기 중의 성분과 결합해서 천천히 pH농도가 바뀌는 물질을 섞어서 만든 잉크로 프린트를 한 셈이지.
그렇게 pH농도에 따라 색이 바뀔 뿐이니, 마법을 써서 그냥 그 pH농도가 되도록 물질을 뿌려주면 색이 영구적으로 돌아오니.
이스터에그로 원래 상태를 되찾는 연출까지 구현할 수 있었다.
다만 이런 특성 자체는 괜찮은데, 제작이 조금 힘들긴 했다.
일단 특수한 용액으로 좋은 질의 대량 생산 프린트를 하는 것 자체가 쉽지 않아서 굉장히 애를 먹었고.
공기 중의 그 성분이 제작 과정에서는 들어가지 않도록, 마법으로 신경을 써가며 만드는 거랑.
마지막에 밀봉까지 제대로 해서 글자가 유지되도록 하는 것도 꽤나 힘들었다.
"그나저나, 선배. 왜 마지막에 해피엔딩으로 하신 거예요?"
"엔딩?"
"네, 사실은 거기서 애덤이 죽는 쪽이 더 현실적이라고 생각하신 거 아니에요?"
확실히, 엔딩에 대해서는 작품을 제출하기 직전까지 굉장히 고민했던 것 같다.
솔직히 제대로 여운을 더 남기려면, 거기서 애덤은 죽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딱 하나의 이유를 찾고 나니까, 살리는 게 맞겠더라고.
"다음 이야기를 더 보고 싶어서."
"네?"
"릴리스와 애덤이 그리는 사랑 이야기, 아직 부족하지 않나 싶더라고."
더 사랑할 시간을 주고 싶었다.
물론 그 사랑이 순탄하진 않겠지만, 여기서 이야기를 끊어버리고 싶지 않았다.
둘이 보여줄 다음 이야기를 더 그려보고 싶어졌다는 소리다.
"...차라리, 이 세계의 신이 선배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았을 텐데."
"뭐?"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 슬슬 가야겠네요. 코코아랑 완벽하게 일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어, 그래...."
영문 모를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아모리는, 마치 말이라도 돌리려는 것처럼 활기찬 목소리로 일을 열심히 하겠다고 선언하고 동아리방을 나가버렸다.
뭔가 폭풍이라도 지나간 것 같은 기분이라, 한동안 멍하니 문을 지켜보고 있다가.
한숨을 내뱉고 나 또한 본래 계획했던 일정인 시험공부를 위해서 동아리방을 나섰다.
"...칼리는 대단하네."
"어? 뭐가?"
"최근에 작품 마감 친다고, 꽤나 바빴던 걸로 알고 있는데. 벌써 내가 따라잡힌 느낌이야."
그 뒤로는 유리아와 함께 시험에 들어가는 마법을 연습했는데, 최근 성적이 굉장히 좋은 유리아가 저런 말을 하는 거 보니까 내 실력도 꽤 괜찮아진 모양이다.
그럼 이쪽 시험은 대충 이 정도로 커버를 칠 수 있으려나?
솔직히 이 강의는 최소한으로만 하고, 기록 마법이랑 관련된 강의에 더 시간을 투자하고 싶은데.
"그 한결같은 취향도 여전하네. 물론 칼리 말대로 기록 마법이 더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건 맞지만. 인정받는 거엔 일반적인 마법 실력이 더 중요하지 않아?"
"그게 무슨 의미가 있어. 내가 전쟁하려고 마법을 배우는 것도 아닌데."
"혹시 모르잖아."
"뭐, 최악을 상정하고 살아가야 한다는 말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확실히 이쪽 동네가 꽤나 거친 과거를 가지고 있으니, 유리아의 말도 틀린 건 아니지만.
내가 기록 마법을 우대한다고 해서 일반적인 마법을 무시하는 건 결코 아니었다.
충분히 취미 수준에서는 재밌게 즐기고 있다고 생각해.
기록 마법은 내 직업이랑 직접적으로 연관이 생길 예정이라 더 열심히 하는 거고.
"이게 이번에 제출하는 과제지?"
"어, 네가 보기엔 어때?"
"...냉장고라고 하지 않았어?"
누가 봐도 냉장고처럼 생긴 비주얼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이 디자인도 지구의 냉장고를 기반으로 설계했다는 걸 깨달았다.
이쪽은 아직 냉장고가 좀 투박한 형태였다는 걸 잊고 있었네.
...평범한 디자인으로 수정해야 하나?
"그렇게 안 보여?"
"나는 또 네가 섹스할 대상을 집어넣어서, 보지를 차갑게 만든 다음에 사용하는 시원한 섹스를 위한 준비 도구라도 그린 줄 알았지.
"그럴 리가 있냐!?"
냉장고가 깔끔한 문 두 개로 이루어진 형태라고 해서, 그런 상상이 가능한 네가 더 두렵다.
그런 짓을 했다간 최소 감기에, 자칫하면 생명이 위험할 수도 있거든?
가끔 훅 들어오는 미친 소리가 진짜 어지럽다니까....
"하지만 냉장고라기엔, 뭐 이런저런 기능이 너무 많잖아."
"딱히?"
그래봐야 기존 냉장고에서 깔끔하게 하기 어려웠던 온도 조절 기능을 디지털화시켜서 보기 편하게 만들고.
그 조절을 좌측과 우측을 분리해, 원한다면 한쪽을 냉동고로 사용하는 것도 가능하게 해서 활용도를 넓힌 정도다.
아, 내부에 조명이 없던 것도 조명을 넣는 식으로 개선하긴 했지.
"별거 없는데?"
"안정적인 온도 조절 기능으로, 사람이 얼어 죽지 않으면서 지낼 수 있게 해주는 게 아니었다고?"
"말이 되냐?"
"...조명을 단 것도 사람이 들어가 있을 예정이라서 그런 게 아니야?"
"이거 문 닫으면 조명 꺼진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라 이것아.
하여튼 이번 과제는 이렇게 기존에 존재하는 마법 도구의 개선판을 설계해서 논문을 제출하는 거였다.
이것도 이 정도면 대충 마무리가 된 것 같네.
"의외네, 벌써 기록 마법 쪽 공부를 끝내고."
"야, 시간을 좀 보고 말해."
이미 우리가 공부한답시고 하루를 다 써놓고 저런 소리를 하네.
그리고 애초에 기록 마법 공부는 하지도 못했어, 이건 어디까지나 기록 마법 강의의 시험 과제인 거지.
그렇게 대충 시험 대비를 끝내고, 유리아와 헤어져서 기숙사로 돌아왔다.
"니아는 벌써 자고 있네."
하긴 요즘 여러모로 학생회 일에 시달리는 모양이라 피곤하긴 하겠더라.
나도 대충 씻은 다음에 침대에 누워서 잠을 청하려고 했는데.
자려고 눕기 직전, 뭔가 느껴지는 이질감에 그대로 모든 동작을 멈췄다.
"...뭐야, 어디 갔어."
분명히 침대 머리맡에 놓아둔 것으로 기억하는 내 보물이 보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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