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96화 (196/229)

〈 196화 〉 39권 ­ 가짜 천재와 진짜 천재(5)

* * *

그러니까, 지금 아모리는 내가 시작도 전에 포기하는 꼬라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거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뭘 벌써 포기하냐는 거지.

확실히 맞는 말이기도 하고, 나를 우상이기도 하지만 경쟁자로 보는 다른 애들한테 매너 없는 행동이기도 했다.

그래, 내가 아무리 가짜 천재라고 해도 출발선 자체가 쟤들보다 앞에 있는 셈이잖아?

그럼 아무리 달리는 속도가 다르다고 치더라도, 비슷하게만 버텨내면 승산이 있다.

그 정도는 내가 노력으로 커버할 수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왜, 왜 웃으세요?"

"아니, 아모리 말이 맞아서. 내가 너무 매너가 없었네."

"...저 표정 오랜만에 보는데?"

그래, 쟤들이 진짜 천재라고 해서 가짜 천재인 내가 져야 한다고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었다.

원래 모든 건 이긴 사람이 기억에 남는 것일 뿐, 그런 공정함 따위는 필요가 없다.

내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서, 저 녀석들에게 따라잡히지 않으면 되는 거다.

"정말 아모리는 나한테 많은 걸 깨닫게 해준다니까...."

"그, 그럼 부족한 부분을 알려주시는 건가요?"

"아니?"

"...네?"

"이제부터 너와 나는 경쟁할 건데, 경쟁자한테 그런 좋은 팁을 주면 안 되는 거잖아?"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도 모자랄 판에, 왜 네가 성장할 시간을 단축하게 해주냐?

그것도 내 시간을 써가면서 그렇게 하는 건 더 미친 짓이지.

어차피 너는 천재라서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부분일 텐데 말이야.

"에, 에에?"

"아모리, 이건 네 실수야. 칼리가 잊고 있던 승부욕을 발동시켰잖아."

"승부욕이요?"

"칼리는 옛날부터 나한테 이기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던 애거든."

"......."

확실히 그랬다.

사고가 난 날에 내가 규칙까지 어기면서 로자리아를 공격한 것도 그렇고.

그 외에 규칙에서 제한하지 않는 온갖 더러운 짓을 다 해가면서 대련을 했었다.

그 당시에는 어떻게 해서든 로자리아한테 이기고 싶었으니까.

"뭐, 칼리가 진심이 되길 원했던 거잖아? 잘됐네."

"이, 이건 예측 못 했는데요. 어지간한 결과는 다 예상했는데, 선배가 이런 성격인 건 진짜 몰랐는데요!?"

"그야, 저렇게 불타지 않을 때는 신사적이고 착한 녀석이니까. 나도 처음 눈에 흙 맞고 놀랐었지."

그럼 내 검술로 네 마법을 이겨낼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하냐?

마법은 못 쓰더라도 마법 비슷한 기술로 시야라도 막아야 뭘 하지.

...이렇게 생각하니까 옛날 생각 많이 나네.

"좋아. 그럼 지금부터 아모리한테 지지 않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신작을 그려야지."

"서, 선배?"

"오...."

일단 결심했으면 낭비할 시간 따위는 없다.

이제까지 고민하고 있던 작품을 어떻게든 최고의 모습으로 탄생시켜야 하리라.

나는 그렇게 선언하고, 그대로 신작 작업에 모든 시간을 올인하기 시작했다.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

"...그래서 저렇게 둘 다 작품에 머리를 박고 있는 거야?"

"그렇지 뭐. 너는 하고 있다던 그거 무사히 끝낸 거야?"

"어느 정도는 개선했는데.... 포기. 다음 학기에나 가능하지 않을까 싶어."

"오르카가 그런 말을 할 줄은 몰랐는데."

"응, 검술이 이렇게 생각하던 대로 안 풀리는 건 처음 겪어봐."

내가 콘티 아이디어를 검토하고 있는데, 옆쪽에서 오르카와 로자리아의 대화 소리가 들려온다.

뭔가 오르카치고는 한숨이 섞인 목소리라서 조금 마음에 걸렸지만.

당장은 내 작품에 집중하기에도 바쁜 상황이라, 뭐라고 말을 걸지는 못하고 있었다.

'대충 이 정도인가?'

지금 신작에 적용할 수 있을 만한 키워드를 마구 쏟아내서 적어두고.

그걸 이용해서 어떤 작품을 만들어낼지 고민하는 중이었다.

원래라면 그냥 내가 그리고 싶은 것이 생각날 때까지 고민했을 텐데, 왠지 열의에 타오르니까 다른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생각해보면 내가 '가짜 천재'라고 부르는 내가 가진 가장 큰 강점은 지구에서 생활하던 전생의 기억이다.

시작점에 해당하는 다양한 경험과 정보들이, 아모리에 비해서 월등하게 많다는 거지.

그럼 그 역사와도 같은 수많은 소재를 잘만 활용한다면, 그녀가 지구라는 세계를 따라오지 못하도록 앞서 달려갈 수 있으리라.

뭐, 대충 그런 아이디어로 생각나는 소재를 마구 적어둔 건데.

간단하게 말해서 이번에 아모리를 상대하는 데 사용하는 전략은, 치트키를 잔뜩 쓴다는 거였다.

기존 세상에서 반칙이라고 불릴 정도로 흥하던 클리셰 소재들을 잔뜩 가져와서 그려낸다면, 무조건 재밌을 수밖에 없겠지.

'물론 이쪽 세상 감성이 맞아야 하고, 나름 내가 그리고 싶은 소재여야 하지만.'

나는 내가 그리고 싶지 않은 것은 그리지 못하는 병에 걸려 있어서.

이기기 위해서라도 내가 꼴리는 스토리와 소재를 골라야만 한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치트키면서 내가 꼴리기까지 하는 소재들을 마구 찾아서, 그것들을 잔뜩 넣어 버무린 비빔밥을 제조해야 하는 셈이지.

"칼리, 뭐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고 있어. 대충 간단한 아이디어는 있었는데, 그거론 모자라서."

원래 계획은 마찬가지로 이종족의 이야기를 하는 거였다.

다만 이제까지는 실존하는 이종족을 써먹은 작품을 위주로 했지만.

이번에는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는 특별한 이종족을 가상으로 만들어 써먹는 형태였다.

"아, 이거야?"

"응. 평범하지?"

"귀가 좀 특이한 인간인가? 아니지, 귀가 특이하니까 수인족?"

"인어라는 가상의 종족이야."

실제로 인어라는 종족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리고 사실 이 인어는 일반적인 지구의 상식에서 나오는 인어와도 조금 달랐다.

어류의 커다란 꼬리가 달린 것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의 다리처럼 생겼으니까.

그나마 종족의 특징이라면, 귀가 조금 특이하게 물고기처럼 생겼고.

발바닥이 서로 조금씩 붙어서 갈퀴처럼 생겼다는 점인데.

솔직히 그 수준도 매우 약해서, 어지간하면 사람이 간단한 장식을 했다고 느껴지는 수준이었다.

딱 이쪽 세상의 수인과 인간의 차이랑 비슷하다고 볼 수 있겠지.

"되게 그럴듯하게 그려서, 실제로 있는 종족인 줄 알았어."

"없어."

사실 있다면 그것대로 소름 돋지 않을까?

인어들이 나타나서 잊힌 우리 종족을 알려준 은인이랍시고 지랄하면 좀 어지러울 것 같았다.

설마 그 정도로 이 세상이 막장으로 흘러가진 않겠지.

두 번이나 비슷한 경험을 했더니, 이제 슬슬 무서워졌다.

"그래서, 얘들이 뭘 하는데?"

"몰라."

"뭐?"

"...아직 거기까지는 안 정했다고."

문제는 내가 전혀 준비되어있지 않다는 점이었다.

대충 캐릭터들 몇의 그림도 뽑아냈지만, 정작 이 작품의 스토리라인이 전혀 결정되지 않은 상태였다.

그냥 실존하지 않는 종족을 그리고 싶다는 마음과 그거 인어라는 컨셉을 해야겠다는 것 말고는 결정된 것이 전혀 없었던 거다.

"그래서 이렇게 뭘 할지 잔뜩 적어둔 거야?"

"그렇지."

자주 쓰이는 반칙 같은 소재들이니, 그것들을 엮어서 스토리를 짜면 강력한 녀석이 탄생하겠다는 아이디어였다.

나는 내가 그려둔 인어의 그림과 키워드들을 번갈아 보면서.

도대체 뭐랑 연결이 될지를 굉장히 고민하다가, 결국 내가 인어라는 캐릭터를 디자인한 이유가 생각이 났다.

'미소녀에 예쁜 수영복을 입히고 싶어서였지.'

이번 작품의 테마는 세상에 없는 이종족과 수영복이었다.

이미 있는 이종족인 수인으로도 그렇게 애널 꼬리를 전파했는데.

그렇다면 내가 아는 수영복들의 디자인을, 실존하지 않는 어떤 종족의 고유문화처럼 소개하면 어떨까 싶었다.

즉, 이 작품은 비키니 같은 반쯤 헐벗은 수영복을 입은 미소녀들이 나오는 작품이다.

심지어 그것이 입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특이하게도 평상복이 수영복이라는 설정이기에.

말 그대로 작품 내내 그런 상황이 연출되는, 시각적 만족도가 굉장히 높은 설정이었다.

그런데 그런 설정과 키워드를 연결하려 하니, 자연스럽게 미연시라는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확실히 이종족을 이용한 미연시도 꽤나 많았지.

생각해보니까 내가 마지막에 했던 미연시가....

"어라, 잠시만."

"왜 그래?"

"아, 미안. 그냥 뭔가 번뜩여서."

미연시라는 키워드를 떠올리는 순간, 곁가지로 쫙 뻗어나가는 많은 소재가 떠오른다.

생각해보면 아주 많은 미연시의 배경이 되는 장소가 시골이잖아?

부모님이 살던 고향이라는 설정으로 자주 쓰이는 작품 배경 중 하나다.

그렇게 그 시골 처녀들과 도시의 문명 따위는 잊고 잔뜩 관계를 맺으며 즐거운 나날을 만끽하거나.

그 섬의 비밀과 같은 미스터리를 해결하는 등 사건에 휘말리는 등....

따지자면 여러 가지 세부 장르가 많지만, 사실 나는 다 필요 없고 고향이라는 키워드가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이거 진짜 괜찮은데?'

일단 메인 키워드를 정하니까, 그에 맞는 배경 스토리가 떠오르기 시작한다.

모함으로 인해 유죄 판결을 받아, 억울하게 국외로 추방당하는 주인공.

그런 그는 국외에 연줄이 전혀 없는 줄 알았지만,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향이 있다는 사실에 조심스럽게 그곳으로 향한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의 어머니는 어인이었고, 고향인 섬은 어인들이 모여서 사는 일종의 시골 마을이었다.

이제 그곳에서 순박하게 살아가던 미소녀 어인들과 힐링 라이프를 즐긴다는 설정이 되는 셈이지.

그렇게 고향이라는 친숙한 장소와 처음 보는 이종족의 마을이라는 이질적인 장소를 섞음으로써, 친숙함과 신비함이 공존하는 묘한 배경이 완성된다.

'어?'

이렇게 되면 굉장히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연결되고, 아무런 무리 없이 상황이 이해가 간다.

심지어 일반적으로 주인공에 독자들이 몰입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주인공이 평범한 인간이라는 점까지 아주 좋은 선택이다.

미지의 세상을 여행하는 기분을 정말 자연스럽게 공감하고 느낄 수 있을 테니까.

"오케이, 이거로 가자."

나는 치트키가 잔뜩 발린 고강화 콘티를 든든하다는 듯 바라보며 웃었다.

* *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