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야한 만화가 합법인 세상에서-197화 (197/229)

〈 197화 〉 40권 ­ 잔잔한 물가의 일렁임(1)

* * *

"흠, 컨셉을 미연시로 잡은 건 좋은데...."

신작의 스토리를 짜내다가, 아무래도 욕심이 생겨서 고민에 빠졌다.

이번 작품은 기본적으로 시골에 있는 미소녀들과 엮이는 미연시 배경을 적극적으로 채용하기로 했는데.

그렇다 보니, 다수의 히로인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아무래도 만화 한 권에서 그 히로인들의 이야기를 모두 진행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아니, 그것을 넘어서 한 명의 진지한 이야기를 하는 것조차 분량이 한참 모자란 느낌이다.

이러면 저번 작품처럼 2권으로 나누더라도, 메인 히로인을 하나만 골라야 하는데.

'컨셉이 미연시인 이상, 좀 다양한 캐릭터의 이야기를 보여주고 싶은데.'

다양한 캐릭터들의 성격과 그에 맞는 이야기를 전개하고 싶은데.

'마녀 아카데미'에서 했던 것처럼 진행하면, 아무래도 느낌이 살지 않을 것 같았다.

그 작품은 따로 목표가 있다 보니, 목표를 이루는 과정에서 하렘이 꾸려지는 스토리로 괜찮았는데.

결국 다수의 캐릭터를 스토리 라인에서 모두 다루면, 캐릭터 하나씩을 온전히 보여주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런 문제 때문에 '이너 메르헨'을 덱당 하나의 만화를 그려가며 스토리를 나눈 것이 아니었는가.

그럼 결국 이번 작품도 히로인별로 책을 따로 만들어야 했다.

"공통루트...?"

생각해보니까 미연시의 구조 중에서 이런 형태를 가진 경우가 많았던 것 같다.

공통루트라는 이름의 초반 스토리에서, 히로인을 모두 소개하고 스토리의 기본적인 상황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 이후의 스토리는 하나의 캐릭터를 골라서 전개하는 식인 거지.

심지어 캐릭터 루트를 선택지를 통해서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그냥 바로 선택권을 주는 작품들까지 있다.

특히 스마트폰 이식 버전의 경우, 인앱 결제 형태로 넘어가면서.

히로인 별로 루트를 따로 판매하는 게임도 있었지.

"지금 딱 맞지 않나?"

그리고 솔직히 저런 루트로 감동을 주는 부분은 내가 아무리 열심히 해도 아모리를 이길 수 없다.

그쪽에서 승률이 없다면, 과감하게 포기하고 다른 장점을 가진 선택지를 택하는 편이 옳으리라.

이러면 친해지고 공략하는 연애의 맛을 줄이는 대신, 그만큼 원하는 캐릭터의 이야기를 확실하게 골라서 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하긴, 이건 만화지 게임이 아니니까.'

사실 아모리의 장점은, 만화보다는 게임을 만들 때 더 빛을 발할만한 것이었다.

그래서 아모리도 게임북이라는 장르를 택했던 것일 거고.

특히 게임북이라는 장르의 특성상, 만화의 체감 분량도 기존 만화보다 훨씬 줄어든다.

그럼 그런 단점을 공략해서, 내 작품의 압도적인 작품으로 삼아야 하는데.

내가 지금 짜낸 아이디어를 적용하면, 독자들이 돈을 내고 만화를 구매한 만큼 즐길 수가 있다.

다른 루트를 위해 버려지는 것 없이, 내가 선택한 루트만 온전하게 가득가득 채울 수 있으니까.

'심지어 전체로 따져도 내가 더 분량이 많아.'

선택을 통한 가성비는 물론이고, 여러 히로인의 루트를 다 타면 전체 분량도 내가 압승이다.

그리고 사실 내가 시작이 늦어서 그렇지, 그 수많은 루트의 유기성을 만드는 데 들어간 시간을 생각하면.

사실상 작품 제작에 들어가는 시간도 비슷하리라.

'질로 이길 수 없으면 양으로 밀어 붙이는 거지.'

그리고 사실 장르가 다를 뿐이지, 그렇다고 딱히 질이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 장르에서 질로 이길 수 없으니, 양이 많은 유사 장르로 밀어붙이는 것뿐.

캐릭터들의 이야기와 캐릭터성은 제대로 그려내야 하리라.

"뭐, 그 부분은 이전부터 고민하고 잡아보던 부분이니까."

일단 작품의 방향성이, 모든 히로인을 심화하며 파고드는 것으로 결정되었으니.

지금부터는 기존에 고민하던 캐릭터들의 성격과 과거, 고민, 사건 등을 확정할 차례였다.

물론 기본적인 캐릭터성 자체는 다 정해진 상태긴 했지만 말이지.

이번 작품은 기본적으로 '수영복'을 평상복으로 입고 다니는 인어들에 포커싱을 맞춘 세계관이다.

그러니 당연히 히로인들도 각기 다른 디자인의 수영복을 입고 있고.

자연스럽게 이 작품을 수영복 모에화라고 볼 수 있을 정도로, 그 캐릭터의 성격을 나타내는 가장 중요한 장치가 된다.

"뭐, 수영복 하면 일단은 비키니가 먼저지만."

사실 이쪽 세상이라고 해서 수영복이라는 개념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물에 잘 젖지 않는 재질을 이용해 몸을 가리는 형태로, 비슷한 물건이 존재했다.

다만 문제는 그게 해녀복이나 마찬가지인 수준이라는 거지.

그런 이유로 이곳에 수영복을 보급하고, 여름마다 눈을 호강하기 위해서.

그리고 작품들에 수영복과 관련된 내용이 잔뜩 나오길 바라면서 설정한 것이 이번 인어 설정이었으니.

일단 내가 생각하는 수영복의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비키니가 우선이었다.

"생각해보니까, 처음에는 이걸 미연시로 할 생각이 없었구나."

그렇다 보니 비키니가 기본값이라는 전제를 두고, 주인공 같은 설정을 많이 잡았었다.

모두와 친하면서 항상 밝고 반짝이는 그런 주인공 캐릭터의 설정이 남아 있었다.

...근데 생각해보면 메인 히로인 속성이라고 볼 수도 있긴 하네.

일단 주인공이 모든 주민이 여자인데다, 처음 보는 노출이 개쩌는 복장만 입은 섬에 도착했을 때.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주는 것은 가장 흔한 디자인인 비키니가 될 것이다.

그러니 그 밝은 얼굴로 다가와서, 주인공을 적응할 수 있게 도와주는 역할을 해야겠지.

"자기를 평범한 주민A로 소개한다는 느낌이 좋지."

근데 솔직히 말이 평범한 여자애지.

저 외모와 피지컬이면 절대 평범한 것이 아니라 상위권이다.

어디까지나 자칭 평범한 히로인인 셈인데, 원래 만화에서 평범 캐릭터라는 건 그런 법이다.

그리고 모두와 친하다는 설정이 있으니, 공통루트에서 다른 히로인들을 보여주고 알려주는 역할도 할 수 있을 거다.

일종의 가이드 역할을 맡길 수 있는 캐릭터라는 거지.

심지어 작품 초반에 충돌을 어렵지 않게 상쇄시켜 줄 정도로 매우 밝은 성격도 주인공에게 도움이 될 거고.

'싫어할 수가 없지.'

성격이 꼬인 사람이 아닌 이상, 이렇게나 주인공을 챙겨주는 모습을 보면 호감이 갈 거다.

그리고 원래 웃는 사람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항상 헤실거리면서 인사를 건네는 캐릭터를 싫어하기 어려우니까.

'하지만 그렇게 밝기만 한 캐릭터면 재미가 없긴 해.'

따라서 공통루트에 자그마한 힌트를 숨겨둘 생각이다.

그렇다고 주인공이 알아차리면서 무언가 의심하는 수준은 아니다.

그저 비키니 끈이 실수로 풀리는 장면을 하나 넣는 정도지.

'사실 뭐, 그거 자체야 서비스 신에 가깝겠지만.'

문제는 그 장면에서 약간의 흉터가 드러난다는 점이다.

물론 대놓고 흉터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비키니가 풀리는 과정에서 이제까지 보이지 않던 내부 흉터의 끝자락이 보이는 정도지만.

눈치가 빠른 몇몇이라면 약간 불안함 정도는 감지하겠지.

"세상에 마냥 웃고만 다니는 바보가 어딨겠어."

당장 내 주변에 있는 오르카도, 은근히 여린 부분이 많다.

평소에는 그렇게 잘 웃고 바보 같아 보이는데.

사실 다 뜯어보면 마냥 바보처럼 별생각 없이 웃는 건 아니거든.

하여튼 비키니를 입은 히로인은 비키니 내부가 흉터로 가득하다는 설정을 하고 있다.

누구에게 괴롭힘 받은 것이 아니라, 항상 혼자 있을 때 느끼는 자기혐오로 인한 자해의 흔적이다.

이 세상 모두에게 사랑받고 싶어 하는 자칭 '평범녀'인 그녀는, 자신이 그러지 못할 때마다 혐오의 감정을 담아서 자신의 몸을 베어낸다.

다만 그런 상처가 바깥으로 드러날 경우, 자신이 이제까지 구축해놓은 평범함의 성이 무너지기에.

무조건 자해는 비키니가 가릴 수 있는 내부에만 저질러 왔다.

하지만 주인공과 둘이 있던 도중, 실수로 비키니 끈이 풀려나면서 그 흉터가 조금이지만 드러났던 거지.

비키니의 루트에서 주인공은 우연히 자해 발작 중인 그녀를 만나게 되고.

이제까지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았던 그녀의 비밀을 알아버리게 된다.

자신을 혐오하면서 만들어낸, 혐오의 덩어리나 마찬가지인 상처들을 보여줬으니.

그녀는 완전히 멘탈이 나가서 폭주하게 된다.

"이 장면을 위해서라도 공통루트의 웃는 장면에 힘을 많이 줘야지."

그 극단적인 상황과 표정의 대비가, 아마 이 루트에서의 가장 큰 충격일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이 작품이 진심 피폐물을 찍으려는 목적으로 만든 것이 아닌 만큼.

사실상 이 타이밍의 이미지 각인이 전부긴 하지만.

'그 뒤로는 뭐....'

주인공은 상처투성이인 알몸조차 아름답다며 받아들여 주고.

그녀는 자신의 원래 모습에 대해 자기혐오에 가까운 생각을 쏟아내며, 자신은 그런 소리를 들을 정도로 아름답지 않다고 외치지만.

여전히 주인공은 그런 그녀 또한 아름답다면서 무한하게 긍정해준다.

물론 말 한마디로 그렇게 피폐해진 그녀가 돌아올 리는 없지만.

주인공은 그녀가 자신감을 찾고 자기혐오를 잊을 수 있도록.

여러 방면으로 데이트를 하면서 천천히 고쳐주는 이야기가 전개된다.

그렇게 조금씩 기존보다는 피폐한 성격이 사라지고, 자해의 빈도수도 현저히 줄어드는데.

그런데도 다른 히로인들에 자격지심을 가져, 자신이 가질 수 없는 주인공을 자신이 불쌍하다는 이유로 독점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고.

결국 주인공에게서 떠나려고 한다.

주인공은 그것을 미리 알아차리고, 떠나려는 그녀를 붙잡는다.

그리고는 그녀가 불쌍해서 이러는 게 아니라, 좋아해서 이런다며.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특별한 방면으로 빛나는 다른 히로인들이 아니라 평범한 너라면서 안아주는 거다.

"흔한 클리셰지만, 그러니까 정말 잘 먹히겠지."

소중한 사람이 사실은 망가져 있었고, 그 망가진 사람을 고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와 서로 사랑하는 나 뿐이라는 설정이라니.

이런 바보 같은 설정을 사람이 참을 수 있을 리가 없다.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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