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화 〉 40권 잔잔한 물가의 일렁임(4)
* * *
"몰아서 일하려니까 죽겠네...."
하지만 방학이 끝나기 전에 모든 일을 마쳐야 칼리와 함께 놀기로 했던 약속을 지킬 수 있기에.
니아는 볼멘소리를 혼잣말로 내뱉으면서도, 굉장히 열심히 일 처리를 하고 있었다.
아무리 아카데미에 다닐 때 해놓을 수 있는 건 전부 해놓았다고 해도, 방학이 되어야만 할 수 있는 스케쥴이 있는 법이니까.
'성욕도 좀 해소가 안 되는 편이고.'
아카데미에서는 칼리와 가발과 목줄을 장착한 플레이 한 번으로 말끔해지는 것을.
지금은 열심히 칼리에게 따먹히는 상상을 하면서 장난감으로 애널을 쑤셔도 완벽하게 해결이 되지 않다 보니.
그녀에게는 꽤 스트레스가 되고 있었다.
"후, 이것도 바로 봤어야 했는데."
시우 화가의 신작 만화 '잔잔한 물가의 일렁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미 며칠 전에 판매가 시작되었으나, 정작 그녀는 바쁜 스케쥴에 치여서 손도 대지 못하고 있었다.
"전부 모아놨습니다."
"그래, 고마워."
2권의 경우 특수한 판매 방식 때문에, 하루에 하나만 구할 수 있는데.
그녀는 4일 전에 미리 시녀에게 명령해, 스케줄이 끝나는 오늘 전권을 볼 수 있도록 준비를 해놓았다.
일을 마친 시녀가 무표정을 유지하며 방을 나서자.
한숨을 쉬는 그녀의 목소리에서 여자아이의 신음이 작게 터져 나왔다.
이제까지 자신의 목소리를 숨기며, 낮은 남자 목소리를 따라 했다 보니.
긴장이 풀리자마자 여자 목소리가 흘러나온 것이었다.
"좋아, 일단 1권부터...."
4명의 캐릭터가 모두 그려진 1권부터 읽기 시작한 그녀는.
의외로 정치와 관련된 이야기로 시작하는 초반부에 흥미를 강하게 느꼈다.
특히 모략으로 인해 자신의 자리를 잃고 쫓겨나는 주인공에게 불쌍함을 느끼다가.
오히려 그런 정치의 세계에서 떠나.
마음 편하게 섬에서 행복한 생활을 즐기는 주인공을 부러워하기도 했다.
물론 니아는 좋은 왕이 되고 싶다는 목표가 있었기에, 절대로 이룰 수 없는 꿈이었지만.
"...슬링이 좀 궁금하네."
잔잔한 물가의 일렁임에서, 슬링은 꽤나 특이한 인어였다.
커다란 가슴과 여성기를 팽팽하고 좁은 천으로 이어서 가리고 있는 아찔하고 변태 같은 복장을 하고 있고.
평소 주인공인 미즈기에게 하는 말도 변태에 가까운데다.
야한 상황에 발작을 일으키는 미크로에겐, 항상 짓궂은 장난을 치는 야한 장난꾸러기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묘하게 똑 부러진 행동들과.
야한 것에 미친 바보라기에는 너무 똑똑한 언동이나, 잠깐씩 보이는 날카로운 눈빛이 니아는 신경 쓰였고.
그 묘한 느낌을 참지 못한 그녀는 곧바로 슬링이 그려진 2권을 집어 들었다.
"갈수록 수상하네."
니아가 은근하게 느낀 감정은 '동질감'이었다.
이전에 칼리에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는데, 실제로 칼리는 자신이 시우라는 것을 숨기는 특별한 사람이었다 보니.
니아는 혹시 슬링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의심이 되었다.
'그냥 칼리가 그리면서, 자기한테 있는 그 느낌을 잘 담은 건가?'
처음에는 그런 생각도 했었지만.
2권에서부터 노골적으로 보이는 수상함은, 갈수록 니아에게 확신을 심어줬다.
새까만 밤에, 작게 마법으로 불을 밝히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모습이라던가.
마법을 쓸 줄 모른다던 슬링이 고난이도의 통신 마법을 이용해서 누군가와 연락을 하고.
절대로 자신의 집만큼은 아무도 오지 못 하게 하는 것까지.
슬링은 정말 수상하다는 말 밖에는 나오지 않는 인간이었다.
심지어 평소에 장난스러운 말투로 장난을 치는 캐릭터인 슬링이.
가끔 특정 상황에는 굉장히 허탈한 표정으로 모든 것이 부질없다고 말하는 등.
평소의 이미지와 갭이 있는 장면이 자주 나오면서.
결국은 미즈기까지 슬링에게 수상함을 느끼게 된다.
다만 미즈기는 슬링의 그런 수상함을 다그치거나,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슬링이 정체를 들킬 것 같은 상황이 되면, 슬링도 힘든 일이 있는 거라면서 도와주기 시작했고.
그런 미즈기의 마음에, 슬링이 점점 마음을 열어가는 내용이 2권의 기본 골자였다.
진행되는 방향은 다르지만, 칼리가 니아의 비밀을 알았을 때의 대처와 비슷한 느낌이 분명 있었고.
니아는 그때의 칼리를 생각하며,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울지 말라고 했었나.'
그녀가 칼리를 죽이려고 했을 때, 죽기 직전에 했던 말이 그런 바보 같은 것이었음에.
니아는 자신의 자궁 부근을 살며시 쓰다듬으며, 왕자님이라도 떠올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사랑스러운 주인님....
"아차, 만화 봐야지."
순간 의도치 않게 과거 회상으로 빠져버린 것을 깨닫고, 그녀는 급하게 만화로 눈을 돌렸다.
당연하지만 미즈기의 그런 헌신적인 태도에, 슬링은 천천히 닫아 놓았던 마음을 연다.
누구보다 장난기 강하고, 자신의 바보력을 올곧게 전파하던 변태 소녀가.
사실은 누구보다 자신 따위는 없다고, 연약하고 무력한 현실의 노예라며.
자기 자신을 부정하며 새까맣게 타들어 간 속마음을 털어놓는다.
"나랑은 조금 다르네."
자신 나름대로 목표가 있어, 그것을 위해 이 힘든 상황을 버텨내는 니아와 다르게.
슬링은 오로지 현실에 굴복하고, 그것을 따르기 위해 심적으로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다만 조금 비슷한 점이라면, 니아의 안식처가 칼리인 것처럼.
슬링의 안식처가 미즈기라는 점일 터다.
「미즈기, 너는 정말 독이나 다름없는 사람이야.」
본래라면 그냥 현실에 굴복하고, 평범한 바보를 연기하며 살아갔을 텐데.
물론 그것이 언젠가는 부서질 유리와도 같은 행복이라도.
아주 소박하게 슬링을 행복하게 해주고 있었는데.
이제 슬링은 더는 그런 소박한 행복으로는 만족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모든 것이 부서지는 마지막 날을 견디지 못할 정도로 연약해졌고.
이런 거짓된 행복이 아니라, 정말로 행복한 미래를 꿈꾸고 만다.
「나한테 너무 과분한 미래야. 모두를 속이고 이 자리에 있는 나에게, 그런 행복을 꿈꿀 자격 따위.... 악!?」
「아니, 나는 그런 미래 용납 못 해.」
슬링의 따귀를 때리면서까지, 그건 아니라고 말하는 미즈기.
모든 것이 파탄 나더라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밀고 나가는 것이 미즈기의 성격이었다.
그렇기에 시작부터 정치질에 패배해 쫓겨난 거였고, 그런 마음가짐은 이런 섬에 와서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좋네...."
그렇다고 슬링을 괴롭히는 상사들을 부술 힘은 그들에게 없었고.
자그마한 반항이라도 꿈꾸면서, 둘은 섬을 떠나 잠적하게 된다.
굳이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무래도 미즈기가 섬에서 이전 일을 모두 잊고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기 때문이리라.
인어들이 사는 섬이 아니라, 평범하게 사람들이 사는 외딴 시골에서.
자그마하고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간다는....
둘 사이에 아이까지 있는 예상보다 굉장히 온건한 결말이 펼쳐졌다.
"행복해 보이네.... 조금 찝찝하지만."
다만 그 이후 행복해 보이는 가정의 모습과 달리.
스쳐 지나가듯 드러난 섬의 상태가 처참한 모습이었기에.
니아는 조금 찝찝한 표정으로 책을 덮었다.
도망친 곳에 나름대로 낙원은 있었지만.
그것으로 인해 잃어버린 것도 있다고 느끼게 하는 엔딩이었다.
니아는 자신이라면 저런 선택을 하지 못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다른 2권에 눈을 돌렸다.
'조금 여운에 잠기고 싶지만, 그렇게 자유시간이 여유 있지는 않으니까.'
어지간하면 오늘 모든 이야기를 다 봐야 하리라.
다만 어떤 순서로 볼지는 순전히 그녀의 자유인 만큼.
다음에 읽을 것에 대해서는 고민할 필요가 있었다.
"역시 미크로려나."
방금 니아가 읽은 슬링의 이야기에서,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다른 인물이 바로 미크로였다.
아무래도 슬링의 친구면서, 슬링이 놀리는 걸 굉장히 좋아하는 장난감 같은 위치인 만큼.
기본적으로 많이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
굉장한 바보에, 야한 것만 나오면 난리를 치는 부끄럼쟁이지만.
그 순수함으로 인해, 가끔 슬링에게 근본적인 부분을 파고드는 질문을 하기도하고.
그 질문에 섞여 있는 착한 마음씨 때문에, 니아에게 있어 미크로는 슬링을 진지하게 생각해주는 절친이라는 이미지가 강했다.
"아마, 안쪽에 진짜 수영복이 있는 거였나?"
미크로는 이 작품에서 유일하게 수영복 복장으로 다니지 않는 인어였다.
그냥 옷 비슷한 걸 입고 다니는데.
안쪽은 수영복 차림이지만, 그것이 1권에서는 드러나지 않았다.
"2권에서는 바로 표지부터 박아놨네."
2권의 표지에는 굉장히 가리는 면적이 작은 비키니를 입은 미크로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젖꼭지와 보지만 간신히 가리는 엄청나게 야한 모습에, 니아는 감탄을 내뱉었다.
위에 입는 옷이 다른 인어들과 다르게 불투명한 이유가 있었다.
"그나저나, 전개가 좀 빠른데?"
아까 슬링의 마음을 함락하는데 책의 모든 내용을 소모한 것과 다르게.
미즈기가 진지하게 다가가는 것만으로도, 미크로는 굉장히 쉽게 함락당했다.
수영복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을 포함해, 조금이라도 야한 상황이 오면 미크로가 변태 망상으로 폭주하는데.
그 망상과 반대되게 굉장히 따뜻한 손길만 내미는 미즈기는, 점점 미크로의 안에서 믿을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했고.
최종적으로는 망상 자체가 둘이 결혼해서 행복하게 사는 것으로 바뀌어, 사랑 바보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서로는 행복한 교제의 시간을 가지고.
최종적으로는 그 결실을 위해 부드럽고 배려심 넘치는 섹스를 하게 되는데....
니아는 그 와중에 망상 속에서 벌써 아이를 셋까지 낳아버린 미크로의 모습이 되게 귀엽게 느껴졌다.
"설마 저 망상 부분에 진짜 도달할 때까지 만화를 그려놨나? 대체 왜 이렇게 남은 분량이 많...."
그렇게 웃으면서 페이즈를 넘긴 니아의 시야에는.
이제까지 본 적 없는 싸늘한 눈빛으로 마법을 발동하는 슬링의 모습이 들어왔고.
슬링이 발동한 마법은 그대로 미즈기의 심장을 꿰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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