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0화 〉 44권 어른이 되어 버린 소녀의 세계(4)
* * *
"확실히, 같은 덱인데도 느낌이 많이 다르네."
"응, 마음에 들어."
유리아는 내가 만들어준 유리아 컨셉의 아이 웬디 덱을 사용했는데.
기획했던 것처럼, 안아주는 것이 아니라 빼앗고 단절시키고 강제로 취하는 느낌으로 동작했고.
마치 폭주할 때의 로자리아를 보는 것처럼, 유리아가 조금 무섭게 느껴질 정도로 카드의 테마가 확 와 닿았다.
'조심하긴 해야겠다.'
내 전략은 전혀 들키지 않은 것 같지만.
그렇다고 해도, 우연히 중요한 카드를 빼앗길 가능성도 있으므로.
나는 최대한 조심하고 주의하면서 게임을 진행했다.
"자, 이러면 가장 중요한 행동이 막히지. 칼리가 메르헨에 도달하기 전에, 내 공격에 덱이 다 떨어질 거야."
"음, 정말 모든 부분에서 내 실력을 압도하네. 하긴, 그러니까 우승했겠지."
하지만 우승할 수 없는 방법으로 승리하는 것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하는 모양이다.
아니, 정확히 따지면 고려 대상에도 넣고 있지 않겠지.
그게 오늘 내가 승리할 수 있는 원동력인 셈이고.
"자, 여기서 이걸 사용할게."
"잠시만, 방금 말했잖아. 그걸 사용하면 묘지에 가면서 내 효과로 네 덱이...."
"여기서 이렇게 콤보를 만들면.... 동시 타이밍에, 내 메르헨도 완성되거든."
"...어?"
내가 유리아를 이길 방법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주 단순하다.
바로 고의로 무승부라는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
유리아는 내 덱의 모든 승리 플랜을 꿰고 있지만, 반대로 무승부의 가능성은 점치지 않아서 모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지구에 있던 카드 게임 중, 3판 2선승제로 대회를 진행할 때.
무승부가 양쪽 모두의 승리 판정이라, 일부러 한 판을 이기고 무승부를 노리는 덱도 있었으니.
나에게는 꽤 친숙한 게임 방식이지만....
무승부면 재대결을 하는 이쪽에서는, 이런 식으로 이긴다는 것에 대해서 고려조차 하지 않고 있었을 거다.
애초에 무승부 자체가 거의 일어나지 않는 일이라는 인식이 강했겠지.
그래서 내가 아까 양쪽이 이긴다는 판정을 말해도, 그럴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가볍게 넘겼을 거다.
"자, 그럼 무승부로. 우리가 모두 승리한 셈이네."
"...자, 잠깐만!"
"우리 둘 다 소원권을 얻은 거지?"
어차피 유리아가 나에게 무리한 소원을 요구할 가능성은 적어.
그리고 저렇게 불안해하면, 딱히 소원이 아니더라도 도와주려고 노력할 생각이고.
그러니까 이렇게 양쪽 다 소원권이 생기면, 오히려 상황이 궁금했던 나는 더 이득이지.
"정말, 정말.... 칼리답다고 해야 할까. 치사하네."
"치사하지 않으면 못 이기는 상대니까. 설마, 메르헨 배틀의 결과에 승복하지 않겠다는 건 아니지?"
"......."
저렇게 풀죽은 유리아의 모습은 처음 보는 것 같다.
젖꼭지라도 꼬집으면서 장난을 치려다가.
아무리 나라도 상대가 저런 표정을 하고 있으면, 선뜻 손이 가질 않았다.
"크흠, 내 소원은 간단해. 유리아가 지금 고민하는 부분에 대해서 최대한 자세하게 설명해주는 것."
"...싫어."
"소원권이잖아."
"하지만, 하지만...."
"걱정되는 거라도 있어?"
"전부 말했다가, 만약에 칼리한테 버림받으면, 나는, 난...."
"안 버려."
대체 무슨 내용이길래 저렇게 애가 망가지는지 모르겠다.
별생각 없었는데, 네가 그러니까 슬슬 나까지 무서워지려고 하잖아.
나는 비에 젖은 강아지처럼 변한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어주며, 최대한 진정할 수 있게 도와줬다.
"...절대로?"
"응. 물론 네가 믿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진심이야."
"...소원 쓸래."
"응?"
"칼리는 나를 버리지 말아줘. 절대로, 무슨 일이 있어도."
"응, 그럴게."
한 번으로 부족한 것 같아서, 유리아를 안아준 채로 계속 속삭여줬다.
당장 내가 말해줬던 내용이잖아.
믿고 의지할 수 있을 때까지 말해주면, 언젠간 유리아도 내 마음을 알아주겠지.
유리아도 그걸 원해서, 굳이 소원이랍시고 그런 말을 했을 거고.
그나저나 이런 당연한 걸 소원으로 빌어버리면.
나만 너무 이득 보는 게 아닌가 싶다.
"칼리, 나는 말이야.... 옛날부터 좀 특별했다나 봐."
"그래 보여."
판타지 세상이라서 그렇지, 세상에 머리카락이 그렇게 특이하게 움직이는 애가 어딨어.
그리고 그 말도 안 되게 커다란 가슴 크기도 제 정상은 아니지.
그림 실력도 여러모로 특별하다는 말 밖에....
"그래서 말이야. 탐이 났던 모양이야."
"탐이 난다고...?"
"잘은 모르겠어. 제국이고, 귀족들이라는 것 말고는."
아무튼 유리아가 특별하다는 걸 알아본 뒤.
유리아를 원하던 이들은, 유리아의 가정을 괴롭히기 시작했다.
유리아가 그려왔던 망가진 어머니와 팔리는 딸의 이야기는.
사실 자기 자신의 이야기였다고 했다.
"엄마는 무슨 약물 비슷한 거에 중독되어서, 나를 팔아버렸어. 우리끼리 놀러 간다고 해놓고, 그대로...."
"그, 어.... 응."
시발, 무거워질 줄은 알고 있었는데 예상보다 더 무거웠다.
왠지 그림에 실린 감정이 디테일하다 싶었는데, 그게 경험담이었냐고.
심지어 그걸 그림으로 표현할 정도로 기억력이 좋다니, 천재라 좋은 건지 그걸 기억해서 나쁜 건지 잘 모르겠다.
"저번에 말한 적 있지. 키리시마시."
"응."
"내가 팔려 간, 제국의 인체 실험장 이름이야."
"허...."
이제야 조금씩 쌓여 있던 의문이 풀리는 느낌이다.
유리아가 '잔잔한 물가의 일렁임'을 보고, 나한테 이상한 소리를 했던 건.
비키니섬에서의 실험이, 본인이 겪은 제국의 인체 실험과 닮아있어서였다.
인어라는 종족은 없는 게 맞았는데, 인체 실험장이 있다는 전개냐?
내 상상력이 얄팍한 건지, 아니면 이 세상이 미친 건지.
왜 그딴 게 실존해서 지랄인지 모르겠다.
"특별한 힘을 가진 인간들을 연구해서, 그 힘을 증폭시켜 능력으로 발현시키나 봐. 그리고 나서는 약을 먹여서 전력으로 부리는 거야."
"제국에 그런 시스템이 있었다고?"
진짜 전혀 몰랐다.
당장 나도 꽤 높은 귀족이고, 황태자가 룸메이트에 애인인데.
이런 실험장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들어본 적이 없거든.
"뭐, 결국 나는 대단한 능력은 발현되지 못했지만. 폐기 처분된 걸, 어떤 귀족이 도망치게 도와줬어."
"...폐기 처분당했다고?"
"응, 그래서 집에 돌아가니까. 엄마는 약에 절어서 몸을 팔아서 약을 사면서 살고 있더라. 그러다가 여기 입학에 도전하게 된 거야."
"......."
괜히 방학이 되어도 집에 돌아가는 일이 없었던 게 아니었다.
그나저나 이런 게 아직도 자행되는 중이라면, 가볍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최소한 니아랑 이야기해서, 그게 뭔지 정도는 알아봐야....
"나는 말이야, 엄마한테도 그 녀석들한테도 버려졌어. 필요 없었거든.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 사람들은 내가 중요하다고 하더니, 결국은 나중에는 필요 없다고 버리더라고."
"유리아, 나는 그럴 생각이 없어."
"알아, 알고 있어. 머릿속으로는 알고 있는데...."
하지만 이전의 기억이 그녀를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것일 터다.
솔직히 내가 어떻게 해결해 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네.
시간이 흘러서 나를 더 믿을 수 있게 되어야만 해결할 수 있는 문제다.
"괜찮아. 절대로 버리지 않아."
"응...."
평소에 누구보다 장난스럽고 강해 보였던 유리아인데.
사실 내면은 이렇게나 여리고 버려지길 무서워하는 소녀다.
나는 묘한 기분을 느끼면서, 유리아를 꽉 안아줬다.
"근데, 이 이야기를 들으면 왜 버려진다고 생각한 거야?
"...아무리 폐기 처분이라지만, 그곳에서 도망쳤다는 건. 나중에 무슨 일에 휘말릴지 모른다는 소리잖아. 거기가 제국에서 가장 강할지도 모르는 집단이고...."
"그래서?"
"에?"
뭐, 내가 무서워서 도망갈 줄 알았던 건가?
하긴 상식적으로 판단하면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나는 그것보다 훨씬 위험한 행동인, 차기 황제 자궁에 질싸 하기를 실천한 사람이거든.
겨우 그 정도로 쫄겠냐?
'아마, 이것 때문에 이번 작품이 끝나고 나한테 계속 마음을 확인하려고 했던 거겠네.'
이번 신작은 기본적으로 어른이 될 수 없다는 문제에 휘말린 페트라를.
일종의 어머니와도 같은 웬디가 구해주고 어른으로 만들어주는 이야기다.
즉, 끝까지 버리지 않는 이야기라고 볼 수 있는 셈이지.
그러니 유리아는 이걸 내가 그녀를 무슨 일이 있어도 버리지 않겠다고 말한 것으로 듣게 된 거다.
저기에 일부러 그런 의미를 담았다는 건 유리아의 착각이지만....
결국, 실제로도 그런 답을 줄 거라 큰 상관이 없긴 했다.
"그런 이유로 버리기에는 내가 유리아라는 사람을 너무 많이 좋아해서. 싸우다가 뒤지더라도 안 버릴 것 같은데."
"칼리...."
"물론 내가 좀 병신 같은 새끼긴
하지만, 책임지기로 한 사람을 버릴 생각은 절대로 없어."
사랑해서 책임지기로 해놓고, 겨우 그런 게 무서워서 도망칠 리가 없잖아.
그럴 거면 처음부터 섹스도 하지 말고, 처녀도 따지 말고, 질싸도 하지 말고, 약속도 하지 말았어야 한다.
다 감안하고 유리아의 자궁 안에 정액 싸지른 건데, 뒤늦게 다른 소리를 하면 안 되는 거지.
"그러니까, 문제 있으면 혼자 해결하려고 끙끙대지 말고. 나한테 말해줘. 앞으로의 길을 같이 고민하는 게 반려자잖아."
"...응!"
...다 끝나고 보니까 정말 별거 없는 일이네.
물론 이런 일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나 나름대로 조사해봐야겠지만.
오히려 유리아와의 관계에서는 크게 바뀔만한 부분이 없었다.
"자, 그렇게 걱정하지 말고 한숨 자."
"응...."
최근에 잠도 못 자고 고민했는지, 꽤 피곤했던 유리아가 내 품 안에서 금방 잠들었고.
나는 천천히 유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푹신한 가슴의 감촉을 즐겼다.
...내일 좀 나아지면 잔뜩 파이즈리 해달라고 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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