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화 〉 22화 다른 도시로 가는 길 (1)
* * *
막상 호기롭게 성인용품점 밖으로 나오긴 했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모르겠다.
바로 마왕에게 달려가는 건 자살행위나 다름없고, 칼벤의 말대로 일단 동료를 모아야 하는데, 어디가 좋을까?
“릴리, 어디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
“네? 마왕을 정벌하러 가는 거 아니었어요?”
“가기 전에 동료를 모으려고.”
“아…”
릴리는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자기 말고 다른 사람이 붙어 다닌다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걸까.
“그런 거면 모험가 길드를 찾아가 보면 되지 않을까요? 왕국의 수도인 만큼 이곳의 모험가 길드도 크기로 소문난 곳이거든요.”
“아, 안타깝지만 내가 이 도시에는 오래 못 머물러.”
“왜요?”
“여왕과 만날 때 복잡한 사정이 조금 생겼거든. 좋아, 일단은 이 도시에서 벗어나자. 다른 도시로는 어떻게 가지?”
“도시에 있는 공간이동석을 이용하면 돼요.”
“좋아, 거기로 한 번 가 보자.”
하지만 나는 공간이동석 근처에도 갈 수 없었다.
워낙 중요한 시설이라 경비가 삼엄한데다가, 그 경비병들은 여왕 앞에서 암컷타락을 외친 것으로 모자라 탈옥까지 감행한 희대의 범죄자를 잡으려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면 안 되겠네요…”
경비병을 피해 골목에 숨어 있던 도중 릴리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더 좋은 생각 없어?”
“마법으로 변장을 하면 가능할지도 모르지만, 그런 상위 마법은 쓸 줄 몰라요. 공간이동석은 포기하는 게 낫겠고, 직접 마차를 타고 다른 도시로 가야겠어요.”
“다른 도시를 오고 가는 마차면 거기도 경비병이 있지 않을까?”
“정문은 그렇죠. 하지만 다른 길이 있어요. 절 따라오세요.”
릴리는 앞장서서 어딘가로 걷기 시작했다. 나는 살짝 의아해하면서도 릴리를 따라갔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성벽 어딘가에 난 조그만 틈새였다. 아마 성에 균열이 간 것이 사람이 넘어 다닐 수 있을 정도로 커진 모양이었다.
릴리는 먼저 성문이 아닌 성벽에 나 있는 조그마한 틈새를 통해 도시 밖으로 나왔다.
틈새가 워낙 작아 한 사람이 드나들기도 힘들었다. 나는 몸을 구겨 넣어가며 겨우겨우 릴리를 따라 성벽 밖으로 나왔다.
“대체 이런 곳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이 도시에 들어올 때도 여기를 통해 들어왔거든요. 혹시나 막혀있지는 않을까 걱정했는데, 안 막혀있어서 다행이에요.”
“굳이 이런 데로 들어올 필요가 있었어?”
“저는 방랑자였으니까, 웬만해선 도시에 출입을 안 시켜주더라고요. 더군다나 왕궁이 있는 왕국의 수도면 말할 것도 없죠.”
릴리, 아무리 봐도 뭔가 뒤에 내가 상상한 것 이상의 배경이 있을 것 같다.
지금 당장 말하라고 겁박할 수도 있긴 했지만… 하나하나 알아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그나저나 릴리, 여기서 다른 도시까지 거리가 있을 텐데 어쩌려고 여기로 나왔어? 설마 주인님보고 그 먼 곳을 걸으라고 할 건 아니지?”
“어, 그, 그럼 안 되나요…”
릴리가 살짝 당황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나는 그대로 릴리에게 다가가 릴리의 겉옷을 벗겨냈다.
“주인님? 옷은 왜..?”
“잘못할 때마다 옷을 한 꺼풀씩 벗길 거야. 알몸으로 돌아다니고 싶지 않으면 처신 잘하라고.”
“네…”
릴리의 상의는 속이 비치는 얇은 옷 하나밖에 남지 않게 되었다. 당연히 그 안으로는 릴리가 입고 있는 속옷이 보이고.
뭐, 여행할 때 눈요깃거리 걱정은 없겠구먼.
“별 수 있나, 걷자.”
“아, 저, 주인님!”
“왜?”
“사실 다른 도시까지 직접 걸어갈 필요는 없어요. 저기 큰 나무 보이세요? 저 큰 나무 밑에 서 있다 보면 다른 도시로 향하는 마차에 올라탈 수 있어요.”
그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당황한 척을 했다? 자기를 빨리 알몸 산책 시켜달라는 말이네.
하지만 이 정도까지 됐더니 살짝 무섭기도 하다. 대체 릴리의 마조 성향은 어디까지인 거지?
이러다 내가 마조 성향에 잘 못 맞춰주면 큰일 나는 거 아니야?
“주인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세요?”
먼저 큰 나무 쪽으로 걸어가던 릴리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것도 아주 순수한 웃음을 지으며.
당장이라도 키스를 박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야 정상인데,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좋아, 일단 데려오기는 했지만 릴리는 요주의 대상이다.
나는 까먹는 일이 없도록 몇 번이고 그 사실을 되새기며 릴리의 뒤를 따랐다.
***
나무에 기댄 나와 릴리는 거친 숨을 골랐다.
거리는 그다지 멀지 않았지만 길 위를 오는 것이 아니라 풀이 우거지고 나무가 솟아있는 산길을 거쳐야 했기에 체력 소모가 심했다.
“허억, 허억, 릴리, 넌 괜찮아?”
“저도, 저도 힘들어요, 주인님…”
다행히도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힘으로 나를 제압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렇게 마차를 기다리고 있으니, 저 멀리서 마차가 흙 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것이 보였다.
“릴리, 저기 봐! 태양이 떠 있는 쪽에서 마차가 달려오고 있어!”
“저기 숲이 우거진 곳에서도 마차가 오고 있어요!”
두 마차는 거의 동시에 우리의 앞에 멈춰 섰다. 각 마차의 마부는 곧바로 마차에서 내려 우리와 가격 흥정을 들어갔다.
“어이~ 이쁜 아가씨~ 어디로 가시나? 어디로 가시든 싸게 싸게 태워줄게. 어때?”
“워, 워, 저 협잡꾼 말은 들을 것도 없어. 내가 진짜 좋은 곳으로 데려다줄게.”
마부들은 릴리를 꼬시느라 정신이 없었다. 덕분에 옆에 있던 나는 꿔다 놓은 보릿자루 신세가 되었다.
아무리 내가 남자라도 그렇지, 이건 너무한 거 아니냐고 씻팔.
하지만 그 상황은 릴리의 말 한마디에 반전됐다.
“어, 어떻게 하죠? 주인님?”
주인님이란 말이 나오자마자 두 마부는 무척 놀란 기색이었다. 얼마나 놀랐으면 우리를 호객하는 것도 잊어버리고 자기들끼리 떠들까.
“들었어? 주인님이래.”
“이 근처에 노예가 합법인 도시가 있던가?”
“여기 주위엔 없었던 걸로 기억하는데…”
“에이, 설마 진짜 노예겠어. 그냥 애정을 담아 부르는 별칭 같은 거겠지.”
“그렇지? 가끔 일부러 노예인 척해서 다른 사람을 높아 보이게 하는 행위도 많아졌다더라.”
마부들이 나와 릴리의 관계를 믿지 못하는 눈치길래 나는 곧바로 릴리의 앞에 가서 섰다.
“릴리.”
“네, 주인님.”
“나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발이 많이 아프거든.”
나는 신발을 벗어 맨발을 꺼냈다. 거친 숲을 헤치고 온 발은 꽤 퀴퀴해져 있었다.
“주인님..?”
“핥아.”
내 말에 두 마부는 다시 한번 놀랐다. 릴리는 다소곳이 자세를 낮추면서도 훌쩍이는 목소리로 말했다.
“우… 주인님… 너무해여…”
“자꾸 딴소리할래?”
나는 맨발로 그대로 릴리의 머리를 살짝 밟았다.
“아, 알겠어요, 주인님! 핥을게요!”
내가 발을 떼자 릴리는 두 손으로 내 발을 잡은 뒤 혓바닥을 내밀어 내 발을 핥기 시작했다.
“어우…”
“세상에…”
두 마부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에 반해 릴리는 내 발가락 사이사이까지 꼼꼼하게 핥았다.
“그 정도면 됐어, 릴리.”
“네? 하지만 아직 청소해 드릴 곳이 남은걸요…”
“됐다니까. 또 딴소리하면 그 옷도 벗겨버릴 줄 알아.”
그렇게 말하고 나는 마부들을 향해 몸을 돌렸다.
“자, 이제 흥정은 저하고 하시죠.”
“진짜 노예입니까?”
“더 보여드려야 믿으시겠습니까? 물론 더 보여드릴 수 있습니다.”
“아, 아니. 됐습니다. 어느 마차를 타고 싶으십니까?”
“아무리 그래도 제 마차가 낫습니다. 저는 여러분이 가고 싶으신 곳으로 마차를 움직입니다. 저 아무 데나 툭 던져놓고 나 몰라라 하는 마차보다는 훨씬 낫지요.”
“다 뭣도 모르는 사람 꼬드기려고 하는 말입니다. 여러 사람이 타면 각각이 원하는 곳으로 마차를 움직이느라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듭니다. 저희 마차는 편안하게 다른 도시로 갈 수 있습니다.”
마부들은 다시 자기들끼리 옥신각신하기 시작했다. 나는 슬쩍 뒤로 물러나 릴리에게 의견을 물었다.
“릴리, 어느 마차가 더 나은 것 같아?”
“저는 잘 모르겠어요… 역시 주인님이 선택하셔야 할 것 같아요.”
흐음. 그렇단 말이지.
그렇게 무슨 마차를 탈까를 한참을 고민하고 있으니 마차 위에 있던 한 여성이 이쪽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언제까지 멈춰 있을 거야! 빨리 출발 안 해?”
앙칼진 목소리가 맘에 든다. 얼굴도 좀 보여줬으면 좋겠는데.
“그래! 기다리는 건 질색이라고!”
이건 덩치 큰 남자의 목소리다. 함께 마차를 타고 가는 덩치 큰 남자와 앙칼진 여자, 이건 뭐 둘이 마차 위에서 광란의 섹스 파티라도 하겠다는 뜻인가?
그에 반해 반대쪽 마차는 조용한 편이었다. 내가 그 마차를 보고 있으니 마부가 와서 내게 말했다.
“방금 들으셨죠? 저기는 무뢰배, 모험가 놈들이 타는 마차입니다. 예의라고는 기대할 수도 없죠. 하지만 저희 마차는 꽤 높으신 여성분들을 태우고 가고 있는 중입니다.”
그러니까 한 쪽 마차에는 남녀 모험가가 타고 있고, 한 쪽에는 서너 명의 여성을 태우고 있다는 말이지.
“못 들었어!? 빨리 출발하라니까!”
마차 밖으로 서슬 퍼런 검이 불쑥 튀어나왔다. 앙칼진 여자 모험가가 가지고 다니는 칼인 모양이었다.
이윽고 검의 주인인 앙칼진 여자의 얼굴도 마차 너머로 살짝 보였다.
그걸 본 나는 마음의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결정했습니다.”
“역시 귀하신 분들과 같이 가기를 택한 것이죠? 노예까지 데리고 다닐 수 있는 정도의 능력자라면 귀하신 여성분들도 환영하실 겁니다.”
“돈이 많아서 그렇습니까? 하지만 여행의 낭만은 이 마차가 더 좋다고 할 수 있지요.”
마부들은 마지막까지 내게 자기 마차를 타라고 아우성이었지만 내 목표는 정해져 있었다.
“저는 저 마차에 타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나는 내가 탈 마차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한 마부의 얼굴에는 난감함이, 한 마부의 얼굴에는 환희가 피어올랐다.
“주, 주인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옆에 있던 릴리까지 나서 나를 만류했다.
하지만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내가 선택한 마차에 올라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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