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화 〉 59화 별일이었네
* * *
뒤를 돌아보자 어느새 다가온 흰 수염의 남자가 팔짱을 낀 채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아까까지 인자한 웃음을 짓던 남자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험악한 표정을 지은 채로.
나는 곧바로 자지봉을 꺼내들었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왜 여자를 꽁꽁 묶은 채로 상자에 넣어 놓은 거죠?”
“이런, 뭔가 오해가 있나 본데…”
“말 돌리지 말고!”
나는 자지봉으로 남자를 겨냥했다. 하지만 남자는 눈 하나 꿈쩍하지 않았다.
“그래서, 뭘 할 생각인가?”
“당연히 여기 경비병들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지!”
“그럼 곤란해지는 사람이 누구인 줄 아나?”
“당신이겠지, 그걸 말이라고 해?”
내 말을 들은 남자는 고개를 젓고는 한숨을 푹 쉬었다.
“자네가 경비병을 부른다면 나도 곤란해지긴 하지만, 제일 곤란해지는 사람은 바로 그 여자라네.”
이게 무슨 소리야? 경비병을 부르면 이 여자가 곤란해진다고?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들어보게. 그 여자들은 원래 이 도시로 들어올 수 없는 떠돌이들이야.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도 버림받아 그러지 못하는 불쌍한 사람들이지.”
순간 내 머릿속에 릴리가 떠올랐다.
“…더 말해 봐.”
“우리는 그런 불쌍한 사람들을 도시 안으로 몰래 들여보내 주는 일을 하고 있다네. 이건 우리의 사업이라고.”
“그런 사업이 있다고? 장난해?”
“왜 없나? 돈을 주고라도 새 삶을 시작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차고 넘친다네. 그 여자는… 꽤 많은 돈을 줬을 거야. 그만큼 이 도시로 들어오고 싶었다는 이야기지.”
“그럼 내가 경비병을 부르면…”
“나야 뭐 처벌받아도 금방 빠져나올 수 있겠지만, 그 여자는 운이 좋으면 추방당하고, 운이 안 좋으면 감옥에 갇힐 수도 있다네.”
남자의 막힘없는 말에 오히려 내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만약 남자의 말이 사실이라면 경비병을 부르는 것이 맞는 선택일까?
릴리와 비슷한 사람들에게서 새 삶을 살 기회를 앗아가는 게?
내가 가만히 있으니 남자는 말을 이었다.
“뭐, 자네가 놀란 것도 이상한 건 아니지. 원체 뒷거래라 아는 사람이 거의 없거든. 그리고…”
“그리고?”
“자네도 도시로 들여오고 싶은 사람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우리라면 충분히 그녀를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 줄 수 있다네.”
하긴, 릴리와 비슷한 상황인 사람들을 들여올 수 있었다면 릴리를 들여오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자, 이번 일은 설명을 제대로 못 한 내 실수로 칠 테니, 다시 동업자가 되어 보는 게 어떤가? 서로 돕고 사는 게 좋지 않나, 허허!”
남자는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이 손을 잡으면 릴리를 도시 안으로 들여올 수 있다.
내가 뭐에 홀린 듯이 그의 손을 잡으려던 순간,
엘리자베스가 칼등으로 내 손목을 강하게 내리쳤다.
“아야! 엘리자베스! 위험하잖아!”
“저 사람 말 들으면 안 돼요!”
엘리자베스의 말에 남자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오, 거기 계신 여전사 분은 무슨 자신감으로 남자 대 남자의 협상을 방해하는 거지?”
“거짓말하지 마.”
엘리자베스는 본 적 없는 무서운 눈으로 남자를 노려봤다.
“그래, 네 말대로 떠돌이들을 도시로 들여오는 일을 할 수는 있어. 그런 뒷거래가 있든 없든 별 상관 안 해, 하지만!”
엘리자베스는 손가락으로 바닥에 쓰러져 있는 여자를 가리켰다.
“그럼 왜 저렇게 노예처럼 묶어서 옮기는 건데! 누가 봐도 이상하잖아!”
“아, 그건 상자 안에서 갑갑하다고 움직일 경우에 곤란해져서 그렇다네.”
“거짓말이에요.”
여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던 이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방금 살펴봤는데, 이 사람들 성적으로 학대당한 흔적이 많아요. 부어오른 엉덩이, 헐어버린 질과 가슴에 난 이빨자국 등… 누가 봐도 강간 피해자예요.”
“진짜?”
내가 묻자 이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 쪽으로 걸어왔다.
“게다가 그녀의 항문에도 이물질이 삽입된 흔적이 있어요. 항문에서 정액의 흔적이 나오기도 했고요. 결국 강간 피해자들을 상자로 옮기고 있던 거예요.”
“오히려 피해자를 도시로 옮겨 보호해 준다는 생각은 안 드나?”
남자의 말에 이샤는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게다가 그녀의 성기에서는 아직 묽어지지 않은 정액이 흘러나왔어요. 모든 학대가 이뤄진지 얼마 되지 않았다는 것이지요.”
“그 얘기는…”
나는 이샤와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둘은 서로를 죽일 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아가씨, 관찰력이 대단하군.”
“강간 피해자들을 도시로 들여와서 뭘 하려고 한 거죠?”
“내가 알려 줘야 할 필요가 있나?”
분위기가 급격히 얼어붙었다. 엘리자베스는 칼을 꺼낸 뒤 칼날의 상태를 확인했고, 이샤는 포션 몇 개를 꺼낸 뒤 손끝에 작은 마법진을 만들었다.
“곱상한 얼굴과는 다르게 매서운 여자들이구먼.”
“당신 같은 사람에게 칭찬 들어봤자 하나도 기쁘지 않거든?”
“그 남자는 버리고 나한테 오는 건 어떤가? 내가 더 능력도 좋고 더 기쁘게 해 줄 수 있는데.”
“더러운 소리 그만하고 저리 꺼져.”
내가 잠시 가만히 있는 동안 흰 수염의 남자와 우리 파티원들은 차가운 말을 주고받았다.
그 사이 상황 판단이 끝난 나는 자지봉을 세게 움켜쥐었다.
“그래… 이제 다 이해됐어.”
“자네 생각은 어떤가?”
“넌 인신매매범이야.”
“사람을 그렇게 매도하는 건 좋지 못하다네.”
“넌 강간 피해자든, 아니면 길을 가던 여자든 납치한 다음 성노예로 팔아먹을 생각인 거야. 그 사이 성욕을 못 참고 납치된 사람들을 강간한 거고.”
내 말에 남자의 표정이 변하는가 싶더니,
“풉… 푸흡… 푸하하핫!!!”
이내 큰 웃음을 터뜨렸다.
“뭐가 그렇게 즐거운데! 설마 아직까지도 오해라고 말할 셈이냐!?”
“아니, 아니. 너무 잘 맞췄어. 아주 대단할 정도야.”
남자가 얼굴을 한 번 쓱 닦아내고는 우리에게 말했다.
“그걸 안다고 해서, 너희들이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지?”
“그야 당연히 경비병을 불러야…”
“여기서?”
남자가 손가락을 탁 튕기자 골목 사이사이에 숨어 있던 덩치 큰 남자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무기를 든 거한들은 이전에 본 양아치들과는 위압감이 달랐다. 한 대만 맞아도 그대로 좆 될 것 같은 느낌이랄까.
“내 일을 도와주는 친구들이지.”
남자들이 손을 꺾으며 우리에게 다가왔다.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고작 나무 막대기 하나 든 채로 우리를 어떻게 해 보겠다고? 그것도 제대로 싸우지도 못할 것 같은 여자 둘을 데리고?”
흰 수염의 남자가 나를 비웃었다. 내가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남자를 노려보고 있으니 남자가 말을 이었다.
“지금이라도 우리를 돕겠다고 말한다면, 아무런 위해도 가하지 않겠다고 약속하지. 자네 동료도 도시 안으로 들여보내 주고 말이야.”
“싫다면?”
“성노예를 옮기는 우리가 시체 한두 개 옮기는 걸 어려워할 것 같나? 그대로 죽어서 아무도 모르게 버려지는 거지. 소리 질러도 소용없어. 원체 깊숙한 골목이라 들리지도 않을 테니까 말이야.”
거부할 수 없는 조건이다. 아무리 봐도 우리가 저 거한들을 이기기는 무리다. 게다가 입만 꾹 닫을 수 있다면 릴리도 곧바로 이 도시로 들여올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우리 파티는 다시 완성되고, 다른 일을 하거나 새 파티원을 영입할 수 있겠지. 모두의 안전을 지킨 채로 말이야.
하지만…
“미안하게 됐군. 협상은 없다.”
나는 흰 수염의 남자를 향해 침을 탁 뱉었다.
“죽는 한이 있더라도 너희가 하는 더러운 일에 끼어들 생각은 없어. 그리고 이런 더러운 일을 신고하지 않고 넘어가고 싶지도 않고.”
“결국 죽겠다는 건가… 자네도 참 무식하군그래.”
“엘리자베스, 이샤. 미안해. 우리 모험 여기서 끝날지도 몰라.”
“아니요, 괜찮아요. 저라도 그런 결정을 했을 거예요.”
“저는 주인님의 명령이라면 언제든 들을 준비가 돼 있어요.”
나는 곧바로 바지를 내리고 고추칼리버를 꺼내들었다. 이것만은 꺼내기 싫었는데.
“푸흐흐… 뭐냐, 그 흉물스러운 무기는?”
“그렇게 얕보다간 큰 코 다칠 걸.”
고추칼리버가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길고 예리하게 빛났다. 죽을 위기에 처하니 집중력이 최고조로 올라간 모양이었다.
“그래, 그럼 원하는 대로…”
흰 수염의 남자는 옆에 있던 거한에게서 도끼를 건네받은 뒤 내 쪽으로 성큼성큼 다가왔다.
절체절명의 순간, 나는 눈을 감고 호흡을 집중했다.
우리가 여기서 이 녀석들을 이길 수는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시간을 버는 수준에서 끝나겠지.
적어도 그 사이에 누군가 우연히라도 이 상황을 발견해 주길 바라는 수밖에…
그렇게 생각하며 최후의 항전을 준비하던 순간, 상자 하나에서 쿵쿵대는 소리가 났다.
“뭐야?”
흰 수염의 남자는 주위에 있던 거한들을 째려봤다.
“제대로 묶어놓지도 않은 거야? 이 정도 일처리도 똑바로 못해?”
“죄, 죄송합니다! 형님!”
“놔둬. 내가 한 번 확인해 봐야겠어.”
흰 수염의 남자는 나를 내버려 두고 상자를 향해 성큼성큼 다가갔다. 그동안에도 상자는 계속해서 쿵쿵대며 울리고 있었다.
“어디, 계집을 어떻게 묶어놨길래…”
그렇게 말하며 남자는 상자를 열었다.
그 순간, 상자 안에서 주먹 하나가 힘차게 뻗어 나와 남자의 얼굴을 강타했다.
“크어억!”
남자는 괴성을 지르며 얼굴을 부여잡았다. 어안이 벙벙해져 있는 사이 상자 안에 있던 한 여자가 상자를 낑낑대며 빠져나왔다.
“아으, 찝찝해…”
여자의 목소리와 얼굴을 확인한 나는 놀랄 수밖에 없었다.
“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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