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6화 〉 65화 릴리와 마법사 (1)
* * *
내가 간밤에 무슨 짓을 했는지 눈치챘나?
분명 뒷정리는 깔끔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무슨 말이에요, 이샤?”
나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능청스럽게 말했다.
“모르는 척하지 마요. 분명 성기 씨는 어제 저한테 무슨 짓을 하셨어요.”
이샤가 한 걸음 더 내게 다가왔다.
“무슨 짓이요?”
“그렇지 않고서야…”
이샤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내게 달려들어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성기 씨 꿈을 꿀 리가 없잖아요?”
“제 꿈이요?”
“네. 어제 성기 씨가 꿈에 나와서 저랑 같이 놀아 줬어요.”
이샤는 나를 부둥켜안고 내게 뺨을 비벼댔다.
이샤의 뺨이 살짝 붉게 물든 걸로 보아 ‘놀아 줬다’라는 건 그렇고 그런 의미인 모양이었다.
어쨌거나 내가 한 일을 들키지 않았다는 걸 확인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줬다.
“일단 나가서 뭐 좀 먹죠.”
“네. 방에 가서 나갈 준비해 올게요.”
이샤가 방으로 들어가자 엘리자베스와 릴리가 말했다.
“경쟁자가 늘었군요…”
“방해꾼이 늘었네…”
“어허, 이샤는 우리 파티의 힐러야. 그런 말 하면 못써.”
나는 웃으며 엘리자베스와 릴리를 쓰다듬어 줬다. 그러다 문득 쳐다본 릴리의 표정은 심히 좋지 않았다.
“릴리, 그렇게까지 격하게 싫어할 필요는 없잖아?”
“그게 아니라요…”
릴리의 목소리에서 괴로움이 묻어 나왔다. 아무리 이샤가 싫어도 그렇게 괴로워할 것까지는 없지 않나?
“사실 마물들에게 당할 때 제가 마력을 다시 쓸까 봐 걱정된 마물들이 제 몸의 마력샘을 막아 놨거든요.”
“그래서 우리가 마력을 건네줬잖아.”
“그게… 마력을 그런 식으로 받으면 과부하가 와서… 게다가 마물들이 제 몸에 심어놓은 반마력 장치들이 켜진 모양이라… 조금 괴롭네요.”
하지만 릴리의 얼굴은 보통 괴로운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릴리, 괜찮아? 이샤 불러올까?”
“시간이 지나면 낫겠죠…”
하지만 이샤가 오고 밥을 먹으러 나갈 때까지 릴리의 상태는 호전되지 않았다. 오히려 가면 갈수록 릴리는 걷는 것조차 힘들어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아졌다.
“릴리 양한테 무슨 일 있어요?”
“그게…”
이샤에게 릴리의 상태를 설명해 주자 이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릴리에게 힐링 마법을 써 줬다.
“일단은 고통이라도 줄여드릴게요. 하지만 마물들이 심어놓은 거면 쉽사리 해제할 수가 없는데…”
“이샤의 포션으로는 어떻게 안 될까요?”
“포션으로도 한계가 있어요. 마력 과부하는 포션으로 어떻게 해결할 수 있다고 쳐도, 마물들이 심어놓은 것까지 제 포션으로 해결하기는 어려워요.”
“그럼 어떻게 해야 하죠?”
“릴리 양은 마왕에게 당한 거니까 웬만한 마법사가 아니면 해제하기 힘들 것 같은데…”
순간 칼벤의 모습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칼벤도 릴리의 상태를 눈치채지 못했으니 그다지 도움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것보다는 내게 감시 마법을 붙여 내가 떡치는 걸 보고 싶어 하는 양반이기도 하고.
그렇게 어떻게 할까를 고민하고 있으니 갑자기 여관 문이 열리고 경비병들이 들이닥쳤다.
“남성기!”
“네, 그거 제 이름입니다만?”
“영주님이 부르신다. 지금 당장 따라오도록.”
“죄송하지만 제 파티원이 조금 아파서요. 지금 당장 따라가기는 무리인 것 같은데.”
“감히 영주님의 명을 거역할 셈이냐?”
경비병들은 곧바로 칼을 빼들었다. 거 성격 참 더럽군그래.
내가 자지봉을 들어 올리려고 하니 릴리가 내 손목을 잡았다.
“일단은… 따라가죠…”
“괜찮겠어?”
“그렇다고 여기서… 경비병들이랑 싸울 수는 없잖아요…”
나는 자지봉을 집어넣고 경비병을 따라갈 준비를 했다. 하지만 경비병들의 걷는 속도는 릴리가 따라가기 힘들 정도였다.
“저 두고… 먼저 가세요…”
릴리가 헉헉대며 말했다. 하지만 파티원을 버릴 수는 없다. 나는 릴리의 앞으로 가 쪼그려앉았다.
“주인님..?”
“업혀.”
“하지만…”
“업혀, 명령이야.”
나는 릴리를 들쳐업고 경비병들을 따라갔다. 평소에 운동을 열심히 해두길 잘했어.
***
성 안으로 들어간 나는 영주가 있는 곳까지 릴리를 업고 들어갔다.
“그 여자는 누구길래 업고 들어오는 것이냐?”
영주가 내게 물었다. 나는 살며시 릴리를 내려놓고 대답했다.
“제 파티원입니다. 저희 목숨을 구하고 범인들을 잡은 일등 공신이죠.”
“그런데 왜 그렇게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느냐?”
나는 릴리에게 대답하라는 눈짓을 했다. 내가 말하다가 릴리가 알리고 싶지 않아 하는 곳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과거에 마물들에게 당한… 후유증인 것 같습니다…”
릴리가 숨을 헐떡대며 겨우 대답했다. 영주는 자리에서 일어나 릴리에게 다가왔다. 그 사이 나는 영주의 모습을 재빨리 스캔했다.
수염을 기른 남자일 거라는 내 예상과는 다르게 영주는 젊은 여자였다. 등허리까지 오는 긴 검은 머리와 잘록한 허리 라인이 눈에 띄었다.
얼굴은 그럭저럭 예쁜 편이었고, 왼쪽 눈 밑에는 눈물점이 있었다.
몸에 잔근육이 있는 것과 군살이 없는 것으로 보아 운동을 포함한 자기관리를 철저히 하는 모양이었다.
릴리에게 다가온 영주는 릴리의 몸에 손을 대고는 잠시 가만히 있었다.
“확실히… 무언가 거대한 것이 느껴지는군. 하지만 나는 검사지 마법사가 아니다. 내가 처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야.”
“그럼 영주님도 도움을 주실 수 없다는 겁니까?”
“앞서나가지 말거라. 나는 도움을 줄 수 없어도 내 마법사는 도움을 줄 수 있을 거다. 헤켄? 미나? 둘 다 있느냐?”
“부르셨습니까.”
영주가 호명하자마자 로브를 입은 두 남녀가 영주에게 다가왔다.
헤켄이라고 불린 남자는 검은 로브를 들고 스태프를 들고 있었고, 미나라고 불린 여자는 흰 로브를 입고 있었다.
“이 여자를 치료해 주거라. 아무래도 이야기는 그 뒤에 해야 할 것 같군.”
“알겠습니다.”
두 마법사는 영주에게 공손하게 인사하고 우리를 다른 방으로 안내했다.
마법사들의 방으로 보이는 곳에는 신기한 것들이 잔뜩 있었다.
책상 위에 올려진 수정구부터 칼벤이 보여줬던 에우라의 지도, 잔뜩 쌓여 있는 크리스탈과 은은하게 빛을 내는 마법진까지.
“여기, 이 침대에 환자분을 눕히십시오.”
릴리를 부축하던 나는 마법사의 안내에 따라 릴리를 침대에 눕혔다.
“윽…”
릴리는 침대에 누우면서도 앓는 소리를 냈다.
“잠시 떨어져 계십시오. 무슨 마법이 걸려 있는지를 알아봐야겠습니다.”
두 마법사는 우리를 멀찍이 떨어뜨려놓고 주문을 외웠다. 엘리자베스가 다쳤을 때 성직자가 주문을 외우는 것을 보던 느낌이었다.
“으윽… 아아악..!”
릴리가 고통스럽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어떡해…”
옆에서 이샤가 안절부절못했다. 그만큼 릴리는 괴로워 보였다.
릴리를 걱정하며 애태우기를 몇 분, 마침내 마법사들의 검사가 끝났다.
두 마법사는 서로 무언가를 이야기하는가 싶더니 내게 다가왔다.
“당신이 이 파티의 파티장이십니까?”
“네, 그렇습니다만.”
“잠시 이쪽으로 와보시겠습니까?”
두 마법사는 나를 데리고 방을 나와 조용한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무슨 이야기를 하시려고 이렇게…”
“당신, 저 사람을 믿습니까?”
헤켄이라고 하는 남자 마법사가 진지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을 받은 나는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당신의 동료를 믿으시냐는 말씀입니다.”
“동료인데 당연히 믿죠. 그걸 말이라고..?”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던 나는 순간 떠오른 생각에 말을 멈췄다.
릴리는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었어. 그게 어떤 거짓말인지는 모르지만.
그럼에도 난 진심으로 릴리를 믿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역시, 어떤 말 못 할 상황이 있군요.”
내가 쉽사리 대답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으니 미나라고 한 여자 마법사가 말했다.
“그런 걸 갑자기 왜 물어보시는 거예요?”
“릴리라는 사람에게 깃든 기운, 보통 기운이 아니었습니다.”
“그야 당연하죠. 릴리가 아까는 설명을 안 했지만 과거에 보통 강한 녀석한테 당한 게 아니라고 했거든요.”
“아뇨. 그런 게 아닙니다.”
“아니라뇨?”
“어쩌면 저 사람… 마물일지도 모릅니다.”
두 마법사가 심각한 표정으로 이야기했다.
“마물이라고요? 릴리가?”
어이가 없었다. 아무리 마물의 기운이 강력하게 느껴진다지만 사람 보고 마물이라고 하는 게 가당키나 한 일인가.
하지만 마법사들이 농담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릴리가 마물이라니요.”
“물론 아직은 추측에 불과하긴 합니다만… 단순히 마물에게 공격받은 것만으로 생길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선 것 같습니다.”
“릴리가 엄청 강력한 마물, 그러니까 마왕한테 직접 당한 거라 해도 말이 안 될 정도예요?”
“마왕이라… 마왕에게 직접 당했다면 그럴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만, 마왕에게 직접 당했다는 그 말을 믿으십니까?”
“지금 저보고 동료를 의심하라는 거예요?”
“그런 뜻은 아니었습니다만…”
미나가 말을 늘이자 헤켄이 옆에서 날카롭게 말했다.
“마왕에게 당했다는 건 곧 마왕의 앞까지 다른 마물들을 헤치고 갔다는 이야깁니다. 하지만 마왕이 등장한 이래 그런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많지 않았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잖아요?”
“그 정도의 사람이, 이름 하나 안 알려져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그건…”
나는 다시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나도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마왕에게 도전했고, 투사 길드에도 있던 사람이면 한 명쯤은 알아볼 만도 한데, 아무도 그렇지 않았다는 걸.
결국 다시 릴리를 의심해야 하는 건가.
“물론 저희도 무조건적으로 몰아세우려는 건 아닙니다. 단지 한 가지 검사를 하겠다는 동의를 구하고자 하는 겁니다.”
미나가 부드럽게 말했다.
“무슨 검사를 하길래 저한테 허락을 받아요? 릴리가 아니라?”
“그건… 여자로서의 고결함을 짓밟는 검사기 때문입니다.”
“네?”
순간 내가 잘못 들었나 싶었다. 하지만 여전히 두 마법사는 진지했다.
“대체 무슨 검사길래 고결함을 짓밟는다는 표현까지 쓰는 거예요?”
“마물과 반응하는 여러 가지로 몸을 검사해야 합니다.”
“그게 뭐가…”
“여성기를 이용해서 말입니다.”
나는 잠시 할 말을 잊었다. 내가 가만히 있으니 마법사들이 말을 이었다.
“몸에서 나오는 기운을 제대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몸속 깊숙한 곳에 수정을 넣어야 합니다.”
“그리고 몸속 가장 깊이 무언가를 넣을 수 있는 곳은 자궁이죠.”
그러니까 릴리의 보지에 수정을 박아 넣겠다고?
“파티장인 당신도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말씀드린 겁니다.”
“릴리는 뭐라고 하던가요?”
“아직 말씀드리진 않았습니다. 다만 마물과 관련된 일이라서 본인이 거부한다고 해도 검사가 이뤄질 겁니다.”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나는 화를 참지 못하고 옆에 있던 책상을 내리쳤다.
아무리 그래도 우리 파티원이다. 그런데 우리 파티원의 가장 소중한 곳을 괴롭히겠다는 말을 내 앞에서 대놓고 말한다고?
그리고 그것보다도 더 중요한 이유가 있다.
“저는 이 검사, 반대합니다.”
나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 이유를 여쭤봐도…”
“릴리의 보지는, 제 겁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