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8화 〉 117화 영주와의 밀담
* * *
“그게 무슨 말씀…”
“월영을 암컷으로 만들 생각이냐고 물었느니라.”
나는 첫 번째로 영주의 입에서 천박한 단어가 나온 것에 놀랐고, 두 번째로 영주가 내 의중을 간파하고 있음에 놀랐다.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역시 월영을 계속 데리고 다니려 하는 데서 티가 났나? 슬레이런으로 가는 것을 말리지 않아서?
일단 뭐라고든 대답을 해야 하는데,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렇다고 하기는 이상하고, 아니라고 하기엔 수상하다.
“당황할 필요 없느니라.”
영주가 인자한 미소를 지었다.
“아까도 말했지만, 나는 너를 책망하는 것이 아니니라.”
말은 그렇게 한다지만, 영주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어쩌면 저런 말로 내 솔직한 말을 유도해 질책하려는 것이 아닐까?
보통의 영주라면 자기 호위무사를 암컷타락시키려고 한다 말하면 화를 내는 것이 당연하겠지. 지금은 솔직히 말할 수 없다.
“그런 생각은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더냐..?”
영주가 빤히 나를 바라봤다. 내가 한 말이 사실이냐는 듯한 눈빛에 나는 눈을 둘 곳을 모르고 이리저리 시선을 옮겼다. 등에 땀방울이 맺히는 것이 느껴졌다.
“옛날이야기를 하나 해 주마.”
영주가 의자에 편히 기대앉으며 말했다.
“한 여검사가 있었느니라. 어릴 때부터 친한 것은 검밖에 없었던 그녀는 늘 검만 휘두르며 살았다. 그것이 자신의 모든 것이라 믿었고, 또 그것이 자신이 나아갈 길이라 믿었기 때문이었느니라.”
월영의 이야기인가?
“그렇게 그녀는 성인이 되도록 검밖에 모르는 삶을 살았다. 성인이 되었지만 바뀌는 것은 하나도 없었느니라. 그저 검술을 단련할 줄밖에 모르는 바보였다.”
영주는 아련한 표정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러나 어느 날, 그녀가 시정잡배들을 혼내 주기 위해 거리로 나간 날이었다. 그녀는 자기보다 먼저 시정잡배들과 싸우고 있던 한 남자를 발견했다. 그때 그 여검사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아느냐?”
“자신의 일거리를 빼앗겨 기분이 나빴습니까?”
“하하, 전혀 그렇지 않았다. 오히려 그 남자와 사랑에 빠지고 말았느니라. 그의 등이 어두컴컴한 뒷골목에서도 마치 햇살을 받은 것처럼 밝게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느니라.”
남자가 어지간히 잘생겼었나 보네.
“여검사는 그날부터 남자를 졸졸 따라다녔느니라. 하지만 여검사가 알지 못했던 것이 있었다.”
“무엇입니까?”
“남자는 심히… 난봉꾼이었다. 여검사에게만 마음을 주지 않고 이 여자 저 여자와 어울려 다니는 그런 난봉꾼 말이다. 당연히 여검사에게도 온전한 마음을 주지 않았지.”
“그래서 여검사는 포기했습니까?”
“포기? 포기는 그녀와 어울리는 단어가 아니었느니라. 그녀는 오히려 더 그 남자에게 적극적으로 다가갔다. 언젠가는 그가 자기만 바라봐 줄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결론적으로 보면 틀린 생각은 아니었느니라.”
“그 말씀은…”
“그래. 남자도 결국은 그 여검사와 사랑에 빠졌느니라. 사랑에 빠진 두 남녀가 할 것이 무엇이 있겠느냐?”
섹스지, 섹스!
나는 섹스를 외치고 싶은 충동을 겨우 참으며 영주에게 말했다.
“결혼입니까?”
“그대 입에서 그렇게 순수한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다. 당연히 남녀 간의 정을 나눠야지 않겠느냐?”
미친, 내가 생각한 게 맞았어?
“그는 여검사에게 여자의 기쁨을 알려줬느니라. 처음에는 부담스러워하던 여검사도 결국에는 남자와 정을 나누는 것을 좋아하게 되었다. 더 이상은 무뚝뚝한 여검사가 아닌, 한 명의 여자가 되어 있었다.”
말을 마친 영주는 나를 바라봤다.
“내가 이 이야기를 왜 했는지 알겠느냐?”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나는 그대가 월영에게도 여자의 기쁨을 알려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고 있느니라. 언제까지고 나를 짝사랑하는 모습을 보고만 있을 수도 없으니 말이다…”
월영이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알고 있었구나. 하긴 짝사랑을 하면 본인 빼고 모두가 안다고들 하지.
“하지만… 괜찮으시겠습니까?”
“무엇이 말이더냐?”
“월영은 영주님을 위해 순결을 지켜왔습니다. 그 순결을 제가 취해도 되겠습니까?”
“내가 반대하면, 하지 않을 생각이더냐?”
영주의 질문에 나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이 영주는 내가 어떻게 행동할지를 이미 다 꿰뚫어보고 있다.
“다만 그대에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은 걱정되는 것이 있어서니라.”
“무엇이 걱정되십니까?”
“월영과 어떻게 관계를 가질 생각이더냐? 나를 좋아하는 아이니, 쉽사리 그대와 관계를 가지려 하지 않을 터.”
사실 나도 그게 고민이었다. 여자를 좋아하는 월영이라면 나와 관계를 가지지 않으려 할 텐데, 일단 좆맛을 보여줘야 암컷타락을 시키든지 말든지 하지.
“힘으로 취할 생각이더냐?”
“그렇진 않습니다.”
“그럼 어찌할 생각인지 알려 줄 수 있겠느냐?”
영주의 매서운 질문이 나를 압박해온다. 정 안 되면 힘으로라도 월영의 처녀를 가져갈 생각이었지만, 영주의 앞에서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역시 힘으로 취하려 했구나.”
영주의 얼굴에 근심이 떠오른다. 애써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지만, 영주는 내 말을 믿지 않았다.
“그대가 이해되지 않는 것은 아니다.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런 편한 길을 가고 싶어 할 게야.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영주가 살짝 슬픈 눈을 하며 나를 바라봤다.
“나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그 아이를 위해서라도 그러지 않으면 안 되겠느냐?”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영주는 내 의중을 전부 읽는 걸로 모자라 나를 다루는 방법까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영주에게 끌려다닐 수는 없었다. 나는 역으로 영주에게 질문했다.
“영주님, 말씀드리긴 외람되오나…”
“무슨 말이든 해 보거라.”
“월영과 관계를 맺을 방법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이대로면 저도 힘으로 월영을 취하는 수밖에 없습니다. 혹시 힘을 쓰지 않고 월영과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까?”
“어려운 질문이구나…”
영주도 거기까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 턱에 손을 대고 생각에 잠겼다. 잠시 가만히 있던 영주는 살짝 한숨을 내쉬며 내게 말했다.
“나도 잘 모르겠구나. 하지만 월영은 나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아이다. 나를 위해서라면 말이지…”
나는 영주의 말뜻을 알아차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나를 바라보던 영주는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으로 내게 물었다.
“나도 참… 못된 영주지 않느냐. 나의 호위무사에게 이런 몹쓸 짓을 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래도 나는 영주를 할 그릇이 못 되는 것 같구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영주님은 최선의 선택을 하신 겁니다.”
“최선의 선택은 너에게 월영을 보내지 않는 것이 아니겠느냐?”
“월영은 저와 함께 가겠다고 말할 겁니다. 함께 세상을 구하고 돌아와 영주님께 구애를 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아무리 영주님께서 말리더라도, 슬레이런에 가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극구 가겠다고 할 겁니다.”
“월영이라면 그럴 테지.”
“그 상황에서 영주님은 앞날을 내다보고 월영을 지키려 하셨습니다. 그런 총명한 영주는 손에 꼽을 것입니다.”
“입에 발린 말은 그만하거라. 부담스럽다”
영주는 손을 휘휘 내젓고는 의자에 앉아 멍하니 허공을 응시했다.
“오랜만에… 옛날이야기를 하니… 그립구나…”
“영주님의 이야기였습니까?”
“눈치채고 있지 않았더냐.”
얼추 짐작은 했지만, 진짜로 영주가 난봉꾼과 사랑에 빠졌던 검사였을 줄이야. 이런 영주를 반하게 만든 난봉꾼이 누구인지 한번 직접 만나보고 싶었다.
“그분은 어디 계십니까?”
“좋은 곳에 있을 게다. 병으로 먼저 세상을 떠났으니 말이지…”
아차, 꺼내면 안 될 이야기를 꺼냈구나. 내가 허둥지둥 화제를 돌리려 하자 영주가 피식 웃었다.
“왜 그러느냐? 난봉꾼인 그이를 만나 누가 더 난봉꾼인지 겨뤄보고 싶기라도 했느냐?”
“그런 건 아닙니다만…”
“아니면, 그대의 그 물건이 그이보다 큰지 작은지 겨뤄 보고 싶었느냐?”
“영주님..?”
“아, 그대가 좋아할 만한 농담이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게냐? 사과하마.”
“아닙니다. 그런 농담 좋아합니다.”
살짝 딱딱했던 분위기가 순식간에 녹아내렸다. 영주와 나는 허물없이 농담을 주고받으며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이어갔다.
“영주님은 제 자지가 얼마나 대단한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지금 당장이라도 나를 침대에 눕힐 것 같은 말이구나. 고맙지만 사양하겠다.”
“왜 그러십니까? 저 때문에 암컷타락하실 것 같아 두려우십니까?”
“분위기를 풀자고 농담을 던졌더니 더 짓궂은 농담으로 답하는구나. 솔직히 말하면 그렇다. 나는 영주다. 해야 할 일이 많은데 남자의 것을 탐하고 있으면 안 되지 않겠느냐?”
“저를 믿으십시오. 그렇게 나쁘지 않을 겁니다. 어떻게 하면 저와 동침해 주실 겁니까?”
“자꾸 그러면 그 잘난 물건에 칼이 닿는 수가 있느니라.”
그렇게 한참을 떠들다 보니 밖에서 누군가가 문을 두드렸다. 영주가 손짓을 하자 방에 쳐져 있던 소음 차단 결계가 사라졌다.
“무슨 일이더냐?”
“영주님. 공간이동이 준비되었습니다. 여왕님께서 지금 당장 성기 님을 만나고 싶다고 하십니다.”
“그렇구나. 곧 나가겠다.”
영주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고, 나도 영주를 따라 일어났다. 영주는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내가 말하고자 한 바를 이해했으리라고 믿는다.”
“잘 알아들었습니다.”
“월영을 아껴주거라.”
문을 열고 영주의 방에서 나오니 월영과 릴리, 엘리자베스와 이샤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월영. 마지막으로 묻고 싶구나. 성기를 따라가겠느냐?”
영주가 묻자 월영은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네 뜻이 그렇다면, 내가 막을 수는 없느니라.”
영주는 월영에게 다가가는가 싶더니 월영의 입에 살짝 입을 맞췄다 뗐다. 월영의 얼굴이 순식간에 터질 듯이 달아올랐다.
“영, 영, 영주님!?”
월영이 얼떨떨해하고 있는 사이 영주는 월영을 끌어안았다.
“괜찮다. 같은 여자끼리는 이 정도 애정 표현은 할 수 있느니라.”
“감, 감사합니다…”
월영도 영주를 살포시 끌어안았다. 월영이 너무 기뻐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영주가 중얼거렸다.
“딸을 한량에게 시집보내는구나… 그것도 무척이나 순수한 딸을 말이다…”
월영은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못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자, 이제 가거라. 가서 멋지게 세상을 구하고 오너라.”
“알겠습니다.”
우리는 마법사들이 준비해 놓은 마법진 위에 올라갔다. 마법사들이 정신을 집중하자 환한 빛과 함께 몸이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 났다.
잠시 뒤 주위의 모습이 순식간에 바뀌었다. 검사들의 도시의 휘장은 온데간데없고, 대신 장엄한 국장이 걸린 것이 눈에 띄었다.
영주의 성도 웅장하다는 느낌이었으나, 왕궁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금 느꼈다.
잠시 주위를 둘러보고 있으니 나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구나.”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