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129화 용사의 평판 관리
* * *
방으로 돌아와 보니 테레나는 자기 방으로 돌아간 듯 보이지 않았다. 나는 간단히 몸을 씻은 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밤을 새우다시피 섹스를 해대서 그런지 얼마 자지 않은 것 같음에도 창문 밖에서 햇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이샤의 콧소리.
“낭군님~”
방 문을 안 잠근 탓에 그새를 못 참고 내 방에 침투한 모양이다. 나는 누운 채로 이사의 몸을 쓰다듬으며 웅얼거렸다.
“조금만… 조금만 더 잘래…”
“그래도 아침 식사는 하셔야지요!”
“아으… 몰라…”
나는 그대로 이불을 머리끝까지 올려 뒤집어썼다. 그러자 이샤가 이불 속으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와 이불 속에서 나를 똑바로 쳐다봤다.
“낭군님!”
“아우… 이샤… 아침 식사가 중요한 건 알겠지만, 지금은 너무 피곤하다고요…”
“그래요? 뭘 하셨길래 그렇게 피곤하실까요?”
이샤가 손을 뻗어 내 아랫도리를 만졌다.
“분명 또 이 흉악한 물건을 놀리고 다니시느라 피곤하신 거겠죠?”
“이샤… 이건 다 제 능력을 키우기 위한 거예요…”
“흥.”
이샤는 코웃음을 치며 고개를 돌리는가 싶더니 그대로 나를 끌어안으며 내 옆에 누웠다.
“어쩔 수 없네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고마워요, 이샤.”
나는 이샤의 이마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다시 눈을 감았다. 포동포동한 이샤의 몸을 끌어안고 잠을 청하니 더 잠이 잘 온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이미 대낮이었다.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켜려고 하니 내 옆에 누워 있던 이샤가 나를 보며 활짝 웃었다.
“일어나셨어요?”
“이샤 덕분에 편하게 잔 것 같아요.”
“후훗, 농담은.”
나는 이샤의 가슴을 조물딱거리다 침대에서 일어나 옷을 입었다. 방 밖으로 나오니 이샤가 옆에서 재잘재잘 떠들었다.
“다들 연무장에 수련하러 갔어요. 특히 오늘은 릴리 양과 테레나 님이 꼭 결판을 짓겠다면서 갔는데, 서로 너무 심하게 싸우진 않았으면 좋겠네요.”
“이샤는 같이 안 간 거예요?”
“아, 저는 연무장에 가도 딱히 수련할 게 없어서요..? 저는 방 안에서 혼자 수련을 해도 괜찮아요.”
“그래도 심심하잖아요.”
“성기 씨랑 같이 있으면 시간 가는 줄 모르겠던데요. 헤헤.”
이샤가 나를 보며 환하게 웃었다. 나는 그런 이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연무장으로 향했다.
아니나 다를까 연무장에서는 릴리와 테레나의 피 튀기는 혈투가 벌어지는 중이었다. 개인 수련을 하던 다른 병사들까지도 삼삼오오 모여 릴리와 테레나의 혈투를 관람하고 있었다.
“거기까지다, 이 음탕한 마법사!”
“잡을 테면 잡아 보시죠! 치녀 투사님!”
…아직도 사이는 안 좋은가 보구나.
나는 적당히 자리를 찾아 앉고는 이샤와 함께 릴리와 테레나의 혈투를 구경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를 발견한 엘리자베스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대단하죠? 저 둘.”
“어. 진짜 대단해.”
“저 둘이 있는데도 바로 마왕을 잡으러 갈 수 없다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예요.”
엘리자베스가 피식 웃으며 말했다.
“월영은 어디 있어?”
“저 둘 사이에서 승자가 가려지면 한 번 붙어 보겠다던데요? 지금은 아마 혼자서 검술 단련을 하고 있을 거예요.”
월영의 진심 모드라, 궁금하긴 하지만 내 생각엔 오늘 안에 저 둘의 싸움이 끝나지 않을 것 같다.
넋을 놓고 둘의 싸움을 구경하고 있으니 웬 사람 하나가 다가와 내게 말을 걸었다.
“혹시 용사님 되십니까?”
“네. 제가 용사입니다만?”
“혹시 제가 용사님과 한 번 겨뤄보는 영광을 누려도 되겠습니까?”
예의를 잔뜩 갖추며 인사를 올리는 병사는 대단한 거구에 근육질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누가 봐도 나를 단숨에 메쳐버릴 듯한 체격 차이였다.
“음… 그게…”
“부탁드립니다.”
이렇게까지 정중하게 부탁하는데 그냥 거절할 수도 없고, 어떡하지?
내가 곤란해하고 있는 걸 눈치챘는지 옆에서 엘리자베스가 대신 나서서 입을 열었다.
“용사님은 지금 싸우고 있는 저 둘보다 강한 분이세요. 일단 저 둘을 이겨야 용사님이랑 싸울 수 있는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요?”
엘리자베스가 릴리와 테레나를 가리키며 말했다. 붕권을 날리는 릴리와 허공을 빵빵 터뜨려대는 테레나를 본 병사는 혀를 내둘렀다.
“죄송합니다. 주제넘은 말을 했습니다.”
“아뇨, 괜찮아요.”
“사실, 한 가지 도움을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말씀해 보세요.”
“제 동생이 이 도시에서 귀금속 가게를 하는데, 얼마 전 도둑이 든 모양입니다. 하지만 범인이 오리무중인 상황이라… 혹시 용사님이면 도둑을 잡을 수 있으실까 말씀을 여쭤보려고 했습니다.”
“도둑이라…”
사실 나도 무언가를 해야겠다고는 생각하던 참이었다. 용사라는 작자가 능력도 알려주지 않은 채 밤 시중만을 즐기고 있다면 그림이 이상하잖은가.
이런 기회에 도시의 사람들에게 인지도도 조금 얻고, 선한 이미지도 심어 줘야 앞으로의 일이 편하겠지.
“좋아요.”
나는 흔쾌히 일을 수락했다. 그러자 언제 온 건지 모를 월영이 옆에서 땀을 닦으며 말했다.
“괜찮으시겠습니까, 성기 님? 지금은 수련을 하기에도 바쁘실 텐데, 그런 일까지 맡으시고 말입니다.”
“이런 불의를 보고 그냥 지나친다면, 용사를 할 필요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월영도 이해하지?”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그럼 일단 가서 저 둘 좀 멈춰 줘.”
“알겠습니다.”
월영은 대련장으로 걸어가는가 싶더니 검을 빼들어 크게 휘둘렀다. 검기가 뿜어져 나가며 릴리와 테레나 사이의 대지를 갈랐다.
“뭐 하는 거야, 월영!”
“뭐 하시는 거죠? 방해할 셈인가요?”
릴리와 테레나는 바로 얼굴을 찌푸리며 월영을 쏘아봤다. 월영은 아무렇지 않게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성기 님이 부르셨습니다.”
릴리와 테레나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내게로 걸어왔다. 그래, 내 암컷이면 당연히 그래야지.
나는 릴리와 테레나에게 내 계획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릴리와 테레나 모두 딱히 큰 반대 의견 없이 내 말을 수용하는 분위기였다.
“하긴, 그런 것도 용사의 업무 중 하나니까요.”
릴리가 손을 탁탁 털어내며 말했다. 동의를 구한 나는 파티원들을 데리고 병사를 따라나섰다.
병사를 따라 도심지로 나오니 여태 다녔던 도시와는 다른 거대한 도심지가 펼쳐졌다. 끝을 알 수 없는 거리들과 우후죽순 솟아나 있는 건물들…
처음으로 이 도시를 본 건 탈옥했을 때긴 했지만, 그때는 도시의 광경을 눈에 담을 수 없었으니 처음 보는 거나 다름없었다.
“동생분의 귀금속 가게는 어디에 있죠?”
“이쪽으로 계속 따라오시면 됩니다.”
도시는 활발한 분위기였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언제 마물이 이곳까지 닥쳐올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인 걸까.
계속해서 병사를 따라 걷던 우리는 한 작은 귀금속 가게에 도착했다. 가게 주인은 곧바로 나와서 우리에게 인사를 올렸다.
“안녕하세요. 가게 주인 지니라고 해요.”
지니는 머리띠가 잘 어울리는 여인이었다. 귀금속 상인답게 반짝거리는 목걸이를 차고 있었으며, 곱슬거리는 갈색 머리가 목덜미 아래까지 내려왔다.
게다가 에메랄드 색인 눈동자는 마치 그녀가 파는 귀금속을 눈에다 갖다 붙인 것만 같았다.
내가 정신없이 지니의 몸매와 얼굴을 훑고 있으니 엘리자베스가 살짝 옆에서 나를 꼬집었다.
“아야, 왜?”
“실례예요.”
말은 그렇게 한다지만 그냥 내가 다른 여자를 보는 게 싫은 거겠지.
“안으로 들어오세요. 제가 아는 정보를 말씀드릴게요.”
지니가 상점 안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갖가지 휘황찬란한 귀금속들을 보니 절로 탄성이 나왔다. 귀금속에 별 관심이 없던 나도 눈이 핑핑 돌 정도였으니까.
“저는 이만 돌아가 보겠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
병사가 꾸벅 인사를 하고 가게 밖으로 나갔다. 그 사이 차를 타온 지니는 모두의 앞에 차를 한 잔씩 놓아 줬다.
“어디서부터 말씀드려야 할까요?”
“일단, 사건이 발생한 건 언제입니까?”
괜히 탐정 같은 목소리를 내며 진지하게 묻자 지니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일주일 전이에요. 처음에는 금방 잡힐 줄 알고 잠시 가게를 닫아뒀었는데, 범인이 잡히지 않더라고요. 지금은 장사를 다시 하고 있긴 하지만, 불안해서 살 수가 없네요.”
“무엇을 도둑맞으셨습니까?”
“그게 중요해요. 보통 물건을 도둑맞은 게 아니거든요.”
지니의 얼굴에 근심이 가득 들어찼다. 잠시 차를 마시던 지니가 말을 이었다.
“마력석 중에서도 가장 희귀하다는 투명한 마력석… 그게 박힌 목걸이를 도둑맞았어요.”
“투명 마력석? 대체 그런 건 어떻게 구하신 건가요?”
테레나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테레나, 투명 마력석이 그렇게 대단한 거예요?”
“그럼요. 왕궁에서도 물건이 없어서 취급하기 힘들어할 정도로 희귀한 물건인데, 그런 걸 어떻게..?”
“사실 저도 우연히 구하게 된 거예요. 다른 도시에 괜찮은 매물이 없나 경매장을 돌아다니는데, 한 작은 시골 마을에서 발견했거든요. 그래서 웃돈을 주고 사 왔죠.”
“값을 많이 지불했으니, 도둑맞았을 때 출혈이 크겠군요.”
“그럼요…”
지니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혹시 도둑을 추적할 단서 같은 건 없나요?”
“잘 모르겠어요. 이미 경비병들이 여러 가지 조사를 하긴 했는데, 이렇다 할 단서는 못 찾아내시더라고요.”
“좋은 생각 있는 사람?”
내가 파티원들을 향해 물었다. 다들 고개를 갸웃하는 가운데, 테레나가 말을 꺼냈다.
“만약 도둑맞은 게 진짜 투명 마력석이면, 이 도시에 있는 투명 마력석의 기운을 추적해서 하나하나 따져보면 되긴 해요.”
“그게 가능해요?”
“왜 안 되겠어요? 투명 마력석은 보통 마력이 깃들어 있는 게 아니라서, 도시 안에도 몇 개 없을 거고, 전 그 마력석들을 하나하나 느낄 수 있어요.”
“정말요!?”
지니가 구세주를 만났다는 듯이 활짝 웃었다. 하지만 테레나는 살짝 자신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귀족들이 가지고 있는 투명 마력석을 다짜고짜 보여달라고 하기도 힘들고, 도시가 보통 넓은 게 아니라서 그걸 다 조사하는 데만 해도 꽤 시간이 걸릴 것 같은데…”
“아…”
한껏 들떴던 지니의 표정이 다시 시무룩해졌다. 잠시 고민하던 나는 테레나에게 물었다.
“근데 만약 도둑이 이미 도시를 빠져나갔으면 어떻게 하죠?”
“그것도 문제예요. 비록 투명 마력석이 숨기기 쉬운 건 아니라고는 하나 그런 걸 도둑질할 정도의 강심장이면 이미 도시 밖으로 빠져나갔을지도 모르는 일이죠.”
갈수록 어려워진다. 머리를 싸매고 있던 나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일단은 도시 안에 있는 투명 마력석부터 조사해 보죠.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그 편이 나을 것 같으니까요.”
파티원들은 다들 내 말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테레나는 잠시 주문을 외우는가 싶더니 뱃지를 만들어 파티원들에게 나눠줬다.
“왕궁에서 나왔음을 증명하는 뱃지예요. 이게 있으면 귀족이라도 당신들을 함부로 대할 수 없을 거예요. 제가 지도에 하나하나 표시할 테니, 각자 하나씩 찾아가 보도록 하죠.”
나는 테레나가 준 지도를 받아들고 가게 밖으로 나섰다.
‘내가 처음으로 갈 곳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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